30년 전만 해도 TV 드라마 등에서 “성을 간다”는 표현이 자주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새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일종의 조건문의 형태로 사용되며, 전건이 거짓임을 강하게 강조할 때 쓴다. 가령, 복덕방 하는 김 사장이 별다방 정 마담과 오붓하게 어딘가를 향하는 것을 이웃 주민이 목격하고, 그 사실을 김 사장의 부인에게 전했다고 해보자. 1990년대 TV 드라마에서는 김 사장의 부인이 펄펄 뛰고 나서, 그다음 장면에서 김 사장이 정 마담과의 관계를 부인하며 “정 마담하고 무슨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면, 내 성을 간다”는 식의 대사를 했다.
“성을 간다”는 표현이 한국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성과 강하게 결부 짓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성을 목숨처럼 여기지 않으니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김 사장이 정 마담과 긴밀한 관계였을 경우, 성을 바꾸는 대신 성을 유지하면서 할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김 사장이 최 사장으로 성을 바꾸고 멀쩡히 사는 것과 김 사장이 할복하고 故 김 사장이 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겠는가?
“성을 간다”는 표현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살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진짜로 뼈대 있는 양반들이 그런 표현을 썼을 법하지는 않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청에 복수하지 못한다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이상해 보인다. 예송논쟁을 하면서 “3년복 이론이 틀리면 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럴법한 집안의 종손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중 어른들한테 귀싸대기를 쳐맞을 일이다. “성을 간다”는 표현은 가까운 조상이 성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근본 없는 집안의 사람들(자신이 양반이라고 믿지만 족보 이외의 어떤 증거도 없는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법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당 표현이 쓰인 것은 기껏해야 100-200년 이내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뱀발
어쩌면 캐삭빵의 원조는 “성을 간다”는 표현은 아닐까?
(202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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