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철학자의 공책』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 제목만 봐도 이 책은 철학하고 아무 상관이 없겠다 싶었는데, 저자가 서강대 철학과 교수였던 최진석이었다. 최진석 교수가 공책에 적어놓은 구상이나 메모 같은 것을 책으로 정리해서 냈나 싶어서 책을 펴보았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 책 속에 있었다. 굉장한 것을 보았다 싶어서 주저하지 않고 그 책을 샀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출판계에는 필사책을 출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나 경증 치매 노인도 아니고 멀쩡한 성인들이,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서 몇 줄 옮겨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필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을 사서 한 줄 한 줄 옮겨적는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든 아니든,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기존의 필사책은 아무리 글자가 크고 띄엄띄엄 있더라도 검증된 고전이나 문학작품을 필사하도록 했다. 『철학자의 공책』이라는 책은 기존의 필사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진석 교수의 책이나 강연 내용 중 일부를 어록으로 따서 독자들이 필사하거나 메모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이나 글을 어록으로 정리해서 필사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그렇게 좋으면 그냥 돈을 갖다 바치지 왜 그걸 필사하나 싶지 않을까? 공자가 다시 살아났는데 사람들이 『논어』를 암송하고 필사하면 남사스러워할 것 같다. 예수가 재림했는데 기독교인들이 복음서를 필사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남사스러워할 것 같다. 홍위병들이 모택동 어록을 필사한다고 하면 모택동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 시기 모택동은 확실히 정상은 아닐 것이니 굳이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진석 교수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책을 냈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말 새몸짓인가?
책에 실린 어록은 정확히 300개인데,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기존의 권위, 관습 등에 얽매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라는 어록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진짜로 원한다면, 누군가가 자기 책을 필사하고 있어도 그것을 뜯어말려야 할 것 같은데, 자기 어록을 필사하라고 책을 내니 이해하기 어렵다. 두 번째 부류는 철학이 어떤 것이고 인문학이 어떤 것이라는 어록이다. 틀렸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내용이다. 어쨌거나 철학으로 먹고 산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철학이나 인문학에 대해 망상을 품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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