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금)로 아르바이트하는 회사와의 계약이 끝났다. 내가 들어갔던 프로젝트가 12월 초에 엎어졌기 때문에 계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내가 속한 팀의 업무는 수학 교재 만드는 일로 전면 전환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할 일 자체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계약 기간이 남아서 3주 동안은 사무실로 출근하기는 해야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회사에서는 나보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오전이든 오후든 아무도 나를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점심만 같이 먹었다. 프로젝트 취소 이후 나는 회사에서 개인적인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 들어온 일도 하고, 시청에 민원도 넣고, 학부 수업 채점도 했다. 시간은 금방 갔다. 출근해서 커피 마시면서 메일 확인하고 뉴스 몇 개 보고 내 일을 하다가 점심 먹고 다시 내 일 하고 중간 중간에 커피 몇 잔 마시면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16회 근무 중 6회는 내가 알아서 시간을 보냈다. 몇몇 대학원생들은 연구원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낸다고 부러워했다. 연구원은 자기가 원치 않는 연구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출근을 한 것은 12월 26일(화)이었다. 원래는 12월 27일(수)이 마지막 근무였는데 내가 속한 팀에서 회장님께 한 중간보고 결과가 잘 나와서 27일 하루는 팀 전원이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재택근무를 하는데 나 혼자 회사에 나오면 이상하니까 나도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다. 마침 26일이 회식날이어서 회식을 끝으로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회식 자리에는 윤◯◯ 이사님도 참석했다. 그동안 회사에서 윤 이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간혹 들은 적이 있었다. 회장님이 상당히 아낀다는 것과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 그리고 과장 1년, 부장 1년 하고 이사가 된 고속 승진의 주인공이라는 것 등을 들었다.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다니다가 마지막 날에 ‘윤◯◯’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들었나? 석사과정 때 나하고 같은 연구실에 있었던 대학원생 중에 윤◯◯씨가 있었다. 윤◯◯씨는 들뢰즈 전공인데, 직원들에 따르면 윤 이사도 대륙철학 전공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회식 자리에서 만난 윤 이사님은 6동 307호 내 뒷자리에 있었던 윤◯◯씨였다. 윤 이사님은 회식이 있기 며칠 전부터 대학원 같이 다닌 사람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 같다고 다른 직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속한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도 윤 이사님이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초기 기획안을 보고 윤 이사님이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기획안에는 1년차부터 3년차 계획이 담겨 있었다. 2년차 계획과 3년차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일인데 이 정도로 그럴듯하게 기획안을 낸 것을 보고 내심 놀랐었다. 회식 자리에서 윤 이사님에게 물었다. “저희 프로젝트 초기 기획을 윤 이사님이 했다고 들었는데…….”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윤 이사님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거 실행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건 아니에요.” 그 기획 덕으로 윤 이사님을 회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윤 이사님은 옆에 있던 상무님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제가 이 분하고 같이 대학원을 다녔는데 이 분이 작가로 활동하는 건 아닌데 거의 작가예요.” 그러면서 대학원 다니던 시절 기숙사 삼거리까지 함께 가면서 나하고 대화했었는데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쑥스러웠다. 나는 상무님께 웃으면서 말했다. “작가까지는 아닌데, 사실 그래서 이◯◯ 과장이 저를 회사로 부른 거죠.”
나는 회사를 다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회사의 직급 체계를 잘 몰랐다. 상무 다음이 뭐냐고 조용히 물으니 다른 팀의 차장님이 상무 다음이 전무라고 알려주었다. 차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언제까지 회사에 나오세요?”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에요.”
“회사에서 언제 또 부른대요?”
“그런 이야기는 아직 없던데요.”
그러자 차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내가 볼 때 또 부를 것 같은데. 옆에 상무님한테 ‘저 한 번 더 불러주시면 제가 전무님으로 만들어 드릴게요’라고 해보세요.” 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건방져 보여서 안 된다고 답했다. 차장님도 웃으면서 “아니에요. 한 번 해보세요” 라고 했다.
마침 상무님은 옆에 있던 여자 과장님한테 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상무님은 최근에 연애를 다시 하면서 회사 안에 사랑꾼이라고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 맥락을 모르기는 했는데 아마도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과장님은
“아, 상무님! 여자 언어를 너무 모르시네!”
라고 했고 그 말에 상무님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아, 그런가?”라고 했다. 그걸 보고 상무님한테 할 말이 떠올랐다. 나는 상무님한테
“여기 과장님이 ‘여자 언어’라고 하셨는데 제가 남자 언어가 무엇인지 한 번 보여드릴까요?”
라고 말했다. 회식 자리에 있던 여러 팀의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직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평상시 같았으면 부끄러웠겠지만 그 때 나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무님이 이사님일 때 저를 한 번 부르고 상무 되시고 나서 이번에 저를 한 번 더 불렀거든요? 그렇다면 남자의 언어란 무엇이냐? ‘상무님, 이사 때 한 번 부르시고 상무 때 한 번 부르셨으니, 전무 되시면 그 때 저 한 번 더 불러주십시오.’ 이게 남자의 언어입니다.”
그 말에 상무님은 손뼉을 치면서 아이처럼 좋아했고 주위에서는 “우와!” 하는 탄성 비슷한 게 터졌다. 윤 이사님이 상무님한테 이렇게 말했다. “제 말 맞죠? 작가라니까요!”
나는 옆에 있던 여자 부장님한테 이 말은 여자 언어로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고 부장님은 몇 초 간 생각하더니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웃고 대화하다가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부장님은 나보고 회사 다닐 생각은 안 해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부장님께 어떤 대답을 했고 부장님은 웃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평소보다 술을 약간 더 마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3.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