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과학철학] Kuhn (1996), Ch 1 “Introduction: A Role for History” 요약 정리



[ Thomas S. Kuhn (1996),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3rd e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1-9.

토머스 S. 쿤, 「1장. 서론: 역사의 역할」,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홍성욱 옮김 (까치, 2013), 61-72쪽. ]

■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 [pp. 1-2, 61-62쪽]

- 우리가 가진 과학의 이미지는 과학 고전이나 교과서를 통해 얻은 것.

• 과학 교과서는 설득과 교육을 위한 것.

• 실제 과학 활동과 부합하지 않음.

- 이 책의 목표: 연구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에 드러나는 과학의 다른 개념을 그리는 것.

- 과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

• 과학의 내용은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관찰, 이론, 법칙에 의해 예시됨.

• 과학적 방법은 교과서의 자료를 모으는 조작적 기술과 그러한 자료를 일반화로 연결하는 논리적 조작

- 과학이 과학 교과서에 실린 사실・이론・방법들의 집합이라면, 과학자는 특정한 집합에 한두 요소를 보태기 위해 애쓰는 사람.

•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인 축적 과정

• 과학사는 과학 기술과 지식의 지속적인 증가와, 그 축적을 방해한 장애물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분야.

■ 과학사학자들의 비판 [pp. 2-3, 62-64쪽]

- “축적에 의한 발전”(development-by-accumulation) 개념을 비판하는 과학사학자들

- 비판(1): 새로운 발견의 시점을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 예) 산소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에너지 보존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가?

• 심지어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다.

- 비판(2): 과거 관찰과 믿음의 “과학적인” 요소를 “오류”와 “미신”과 구별하기 어려움.

• 과거의 견해가 오늘날의 견해보다 덜 과학적이지 않음.

• 예)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플로지스톤 화학, 칼로릭 열역학 등

•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을 신화나 미신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신화나 미신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음.

• 과거의 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과학은 현대 과학과 양립불가능한 것도 포함하게 됨.

•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쿤을 포함한 과학사학자들은 후자를 선택.

- 역사가들은 옛 과학이 우리에게 남긴 영속적 기여를 따지기보다는 그 당시 과학의 역사적 온전성(historical integrity)을 드러내려고 함.

• 예) 갈릴레오의 견해와 현대 과학의 견해의 묻는 대신, 갈릴레오의 견해와 그의 집단의 견해의 관계를 물음.

• 알렉상드르 쿠아레(Alexandre Koyré)의 저술에 잘 예시되어 있음.

■ 2장에서 다루는 내용 [pp. 3-4, 64-66쪽]

- 과학사는 많은 종류의 과학적 질문에서 유일하게 본질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적 지령(methodological directive)이 불충분함을 보여줌.

• 특정 분야는 모르지만 무엇이 과학적인지 아는 사람에게 그 분야의 현상을 시험하라고 지시하면, 양립불가능한 여러 결론 중 하나에 적법하게 도달할 수 있음.

• 결론에 도달하게 한 것은 다른 분야에서의 사전 경험, 탐구의 우연, 개인적 특성 등.

- 대부분의 과학의 초기 발전 단계는 상이한 견해들 간의 지속적 경쟁으로 특징지어짐.

• 각 견해들은 부분적으로 과학적 관찰과 방법의 지시로부터 나온 것임.

• 다양한 학파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과학적 방법의 실패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공약불가능한 방식임.

- 관찰과 경험은 허용가능한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고 제한해야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과학적 믿음을 결정할 수는 없음.

•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우연이 만드는 임의적 요소는 과학적 공동체의 믿음의 구성요소가 됨.

■ 3장-5장에서 다루는 내용 [pp. 4-5, 66-67쪽]

- 효율적 연구는 모종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합의되었을 때만 가능함.

• 예)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는 무엇인가?

• 이러한 해답은 학생들이 자격을 갖추게 하는 교육에 내재함.

- 이는 정상과학 연구 활동의 효율성과 그러한 활동의 진행 방향을 설명함.

• 자연을 전문 교육이 제공하는 개념들의 상자 속으로 밀어 넣는 시도.

- 3장-5장에서 정상과학을 검토함

■ 6장-8장에서 다루는 내용 [pp. 5-6, 67-68쪽]

- 임의성이 과학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6장-8장에서 다룸

- 정상과학의 활동은 세계가 무엇인지를 과학자 사회가 안다는 가정에 입각함

• 과학 활동에서 성공은 그러한 가정을 옹호하려는 의지에서 나옴.

- 정상과학은 근본적인 새로움을 억제함.

• 이는 근본적인 새로움은 정상과학의 기본 공약들을 전복하기 때문임.

- 정상 연구의 목적으로 고안된 도구가 예상하는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 정상과학이 길을 잃으면, 새로운 공약으로 이끄는 비상적인(extraordinary) 탐구가 시작됨

•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은 전문 분야의 공약이 변동하는 비상적인 에피소드

■ 9장-13장에서 다루는 내용 [pp. 6-8, 68-71쪽]

- 9장-10장은 코페르니쿠스, 뉴튼,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 등 과학 발전의 주요 전환점을 다룸.

• 각 혁명은 과학의 탐구 대상이 되는 문제들에서 변화를 일으킴.

• 어떤 것을 문제로 간주할지, 어떤 것을 적법한 문제 풀이로 인정할지 결정하는 기준을 바꿈.

- 11장은 교과서의 전통을 논함으로써 이전에는 과학혁명을 보기 어려웠던 이유를 다룸

- 12장은 옛 정상과학 전통의 옹호자들과 새 정상과학의 지지자들의 경쟁을 다룸.

• 과학자 사회에서 분파 간 경쟁은 수용된 이론을 폐기하거나 다른 이론을 채택하는 결과를 낳는 유일한 역사적 과정.

- 13장은 혁명을 통한 발전이 과학적 진보의 독특한 특성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물음.

■ [pp. 8-9, 71-72쪽]

- 역사는 순수하게 기술적인(descriptive) 분야인데 어떻게 규범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철학적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 쿤의 일반화의 대부분은 과학자들의 사회학이나 사회심리학에 관한 것이지만, 결론 중 몇 가지는 전통적인 논리학이나 인식론에 속함.

• 쿤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을 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지금까지 전개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할 것임.

• 과학사는 이론에 관한 지식이 적용되도록 요구받는 현상들의 근원.

(2018.06.03.)


2021/07/10

[외국 가요] 조지 마이클 (George Michael)



George Michael - Careless Whisper

( www.youtube.com/watch?v=Cc8BGqfcXCI )

(2021.04.10.)


평택항 노동자



2005년인가 2006년인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즈음에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강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래 전에 들은 거라서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나마 기억나는 것을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연대해야 하는데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원들은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쓴다. 자동차 왼쪽 바퀴 끼는 사람하고 오른쪽 바퀴 끼는 사람하고 월급이 두 배 차이 나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런데 같은 공장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천막 치고 농성하는데 옆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점심 먹고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내가 다른 공장을 가니까 점심 때 어떤 노동자가 혼자서 한 발로 깽깽이를 뛰고 가더라. 도대체 이 공장에서는 무슨 재미난 놀이를 하나 궁금해서 봤다. 그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발목이었다. 일 하다가 발목이 잘렸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서 그렇게 혼자서 자기 발목을 들고 깽깽이발로 뛰어간 것이다.


노동 유연화가 뭐냐? 세 사람이 하던 일을 두 사람한테 시키고 다시 그 일을 한 사람한테 시킨다는 것이다. 자본의 눈으로 보면 한 사람이 해도 될 일을 두 사람, 세 사람이 하는 것은 낭비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는 일은 두 사람이 일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자기 발목을 들고 깽깽이발을 뛰던 노동자가 하던 일도 원래는 세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그게 두 사람이 하던 일이 되었고 다시 한 사람씩 교대로 하는 일이 되었다.


15년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평택항 부두에서 300kg짜리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스물세 살 대학생이 용돈을 벌려고 아버지의 작업장에 나왔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사전에 안전교육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전관리자는 옆 컨테이너에 다른 작업을 하느라 현장에 없었다고 한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현장에 두 명만 있었어도 사고가 날 수 없는데 아들만 혼자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한다.

15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하고 있다. 그렇게 어떤 청년이 죽었고 그의 아버지는 오열하고 있다.

* 링크: [스브스뉴스] 300kg 철판에 깔린 아들의 마지막을 직접 본 아버지

( www.youtube.com/watch?v=NheZoIlt7CY )

(2021.05.10.)


2021/07/09

철학자는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를 어떻게 볼까?



<조선일보>에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가 국내에서도 인기라고 하는, 광고인지 기사인지 헷갈리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는 실용성을 강조”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철학이 어떤 식으로 실용성을 가지는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새벽 기상해 자기계발을 하는 ‘미라클 모닝’을 한 달째 실천하는 IT 개발자 최원형(34)씨는 오전 4시 45분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떠올리며 잠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지금처럼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침대에서 나오기 어려우면 이렇게 말하라.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장 써먹을 수 있고, 내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철학이란, 새벽 일찍 일어날 때 침대에서 뭉개적거리지 말라는 지침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잠자리에서 뽈딱 일어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철학의 용도라면, 그에 대한 더 좋은 대체제는 충분히 많다.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건강보조식품을 먹거나 기상용 알람시계를 하나 더 구입하는 것이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철학보다는 약발이 좋을 것이다. 할 일이 많아 일찍 일어나야 할 상황이면 그냥 일찍 일어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놈의 철학이고 실용성이란 말인가.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가 전하는 다른 메시지도 침대에서 뽈딱뽈딱 일어나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우리의 계획을 거스르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카토)는데, 인생이 계획대로 다 잘 풀리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계발서를 돈 주고 사서 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가진 것만 잃을 수 있는 법이다”(에픽테토스)라고 하는데, 이런 말은 신용대출 받아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사람에게 위로가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작가 에릭 와이너는 자기 책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고대 아테네에 대형 서점이 있었다면 철학과 자기계발 섹션은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는 철학이 곧 자기계발이었고, 심리 치료였다. 실용적이었다.” 철학자들은 이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이 말에 대해 철학자가 직접적인 답변을 남긴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먼 블랙번이 다른 책에서 한 말을 통해 철학자들이 자기계발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 유추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사이먼 블랙번은 『국가론 이펙트』(Plato’s Republic: A Bio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교육자였다. [...] 플라톤의 적인 소피스트들[...]은 살아가는 데 유용한 지혜라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상품화하여 돈을 받고 팔았다(오늘날 서점을 빼곡히 채우는 무분별한 ‘지혜서’와 ‘자기계발서’를 떠올리면 된다). (21쪽)


그리고 주석에는 이렇게 써놓았다.


소피스트들이 그렇게까지 타락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귀족이었던 플라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사실 플라톤의 진술도 그리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 아테네의 법정과 공회의 속성으로 보아 재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자료를 정리하는가를 배우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런 기술을 가르쳐주고 수업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블랙번은,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수업료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가르쳐주고 돈을 받았으므로 플라톤이 비난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기계발서를 팔아먹는 사람들은 가치 없는 것이나 팔아먹는, 그렇게까지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만 보아도,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보다는 철학 교양서적이 오히려 더 실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으려나? 이런 단편적인 사례만 놓고 보아도, 철학 교양서적보다 철학 기반 자기계발서가 더 실용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링크: [조선일보] ‘당장 써먹는’ 철학, MZ세대 사로잡았다

( 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1/05/05/AHSPO5QWUJEGJBMN3MPZDUU3DQ )

* 참고 문헌

사이먼 블랙번, 『국가론 이펙트』, 윤희기 옮김 (세종서적, 2014).

(2021.05.09.)


2021/07/08

독립연구자



학회에서 발표를 한다든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때는 이름과 함께 소속도 명시하게 되어 있다. 대체로, 학생은 다니고 있는 학교를 소속으로 표기하고, 강사나 교수는 일하고 있는 학교를 소속으로 표기한다. 강사들이 학회 때마다 소속이 계속 바뀌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속이 없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다. 이런 사람들은 “독립연구자”라고 자기 소속을 표기한다. 신문에 이상한 칼럼 쓰는 사람 중에 독립연구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독립연구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원래 독립연구자라는 말은 소속된 곳이 없음을 나타내는 중립적인 표현이다. 내가 아는 선생님들 중에도 상당히 훌륭한 선생님인데 마찰적 실업 상태일 때 자기 소속을 독립연구자라고 한 분도 있고, 현직 교수이고 매우 훌륭한 분인데 조만간 교수직을 그만 둘 예정이어서 올해 하반기부터 독립연구자가 될 분도 있다. 이런 분들은 독립연구자의 좋은 예일 것이다.

그렇지만 독립연구자 협회가 있어서 회원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독립연구자 취득 자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연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연구라고 주장하는 자의식 넘치는 사람들이 독립연구자를 자처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어떠한 제약을 걸지 않으면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이 압도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 독립연구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분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독립연구자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눈을 이상하게 뜨게 된다.

나는 아직 대학원 다니는 대학원생이라 소속 표기를 고민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나중에 소속 없이 붕 뜨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장을 소속으로 표기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연구소가 아니라 그냥 기업이면 표기가 약간 이상해지고 자영업이면 표기가 더더욱 이상해질 것이다. 학회에서 발표하는데 소속 표기를 “네네치킨 신림점”이라든지 “페리카나 봉천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다. 발표장 내의 사람들이 소속을 보고는 PPL인가 의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연구자’는 이미 오염된 표현이어서 쓰고 싶지는 않다.

‘독립연구자’의 원래 취지를 살리면서 소속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면서도 연구자를 자처하지 않는, 그런 중립적인 표현이 없을까? 그런 표현이 있다. 바로 ‘무소속’이다. 내가 마땅한 소속이 없어지면 소속을 ‘무소속’이라고 표기해야겠다. 그런데 웬만하면 붕 뜨지 않고 괜찮은 곳에 계속 소속되어서 ‘무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1.05.08.)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