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9

“그러니까 어떻게 잘 될 건데요?”



예전에 A라는 여성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내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저도 잘 되겠죠, 잘 될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나는 내가 잘 될 것이며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잘 될 건데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기 마련인데, 그 사람은 나한테 어떻게 잘 될 거냐고 물었다. 막상 답하려니 막막했다. ‘그러게, 나는 어떻게 잘 되지?’ 그 사람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이 하던 일이 잘 되어 만난 자리라 분위기도 좋았다. 분명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정말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잘 될 것인지 궁금해 한 것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그냥 잘 될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잘 될 건데요?” 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강 넘기려고 했는데 또 물었다. ‘그러게, 나는 어떻게 잘 되지?’ 나는 내가 잘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걸 정당화할 만한 요소가 없다. 대강 생각한 건 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저 사람이 나를 정말 미친놈으로 볼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투자 설명서를 들이밀면서 투자금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잘 될지가 왜 궁금할까?

“그러니까요, 그냥 잘 될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잘 될 건데요?” 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를 30년 간 키운 어머니도 내가 어떻게 잘 될지 별로 안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저 사람은 내가 어떻게 잘 될지 왜 궁금해할까? 어쨌거나 대답을 하기는 해야 했다. “사실 저는 망할 놈이에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잘 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잘 될 건데요?” 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 사람이 오늘 왜 이러지? 나한테 관심이 있나?’ 그런데 그 사람은 멀쩡하게 연애를 잘 하고 있었으니 그것도 아니다. 어쨌든 나는 뭔가 대답을 하긴 해야 했다.

“예수님이 저를 도와주실 겁니다.” 이 정도 대답을 하면 웃고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 사람은 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〇〇씨는 정말 기독교를 믿으세요?” 나는 제대로 말을 못했다.(예수님, 미안.) 어쨌거나 나는 내가 왜 잘 될지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른 건, 최근에 B라는 사람이 애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B와 B의 애인은 성격이나 취향도 비슷하고 싸우지도 않고 사이 틀어질 일도 없었는데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로 헤어졌다고 한다. 헤어진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슬프다고 하길래, 나는 슬픈 이야기 하면 못 놀리니까 하지 말라고 했다.

멀쩡히 잘 사귀던 사람들도 경제적 이유로 헤어지는 마당이라, 경제적으로 안 멀쩡한 나 같은 사람은 상황이 더욱 암울하다. 나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도 아니고 30대 초반의 대학원생이다. 지금까지 한 짓을 보아서는 내가 봐도 내가 연구자로 유망할지 의심스럽다. 이런 와중에, 나와 미래를 약속하거나 약속할만한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잘 될지를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미래를 약속하거나 약속할 가능성이 높아서 나한테 어떻게 잘 될 거냐고 묻는 사람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혹시라도, 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나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이 저를 도와주실 겁니다, 아멘”이라고 답해야겠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상의 답변인 것 같다.

(2016.08.09.)


2016/10/07

[과학철학] Feyerabend (2010), “Introduction” in Against Method 요약 정리

     

[ Paul Feyerabend (2010), “Introduction”, Against Method, 4th edition (Verso), pp. 1-5.
  Paul Feyerabend (1975), Against Method, 1st edition (New Left Books).
  파울 파이어아벤트, 「서론」, 『방법에 반대한다』 (그린비, 2019), 53-60쪽. ]
  
  
[pp. 1-2, 53-54쪽]
- ‘무정부주의’(anarchism)가 인식론과 과학철학에 매우 훌륭한 처방이라고 확신함.
- 역사, 특히 혁명의 역사는 방법론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내용이 풍부하고 변화무쌍하며 다면적이며 이해하기 힘든 것.
• 우발적인 사건과 중대한 국면, 사건들의 진기한 연결
• 인간적 사상은 변화무쌍함.
• 인간들의 행위나 결단은 모두 그 궁극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님.
- 방법론자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규칙들이 ‘상호작용의 미궁’을 설명할 수 있는가?
- 파이어아벤트는 가차 없는 편의주의자만이 이러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함.
• 편의주의자(opportunist)는 특정한 철학에 속하지 않고 그때그때 적합해 보이는 방편은 어느 것이라고 채택하는 사람
  
3, 56-57
- 과학사는 어떠한 사실들이나 사실에서 도출한 결론만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여러 관념들, 사실들에 대한 해석들, 대립하는 해석들이 일으키는 문제들, 실수 등을 포함함.
- 과학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bare facts)이 존재하지 않음.
- 우리의 지식으로 들어오는 ‘사실들’은 이미 어떤 일정한 방식에 따라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관념적임.
- 오늘날의 과학 교육의 목적은 과학을 ‘객관적’인 것으로, 또한 엄격하고 불변하는 규칙으로 쉽게 다룰 수 있도록 만드는 것.
- 과학 교육은 과학에 포함되는 요소를 단순화하여 과학을 단순화함.
- 1단계: 연구 영역이 제한됨.
• 과학의 영역은 역사의 다른 부분(형이상학이나 신학 등)과 분리됨.
• 과학은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짐.
- 2단계: 이러한 ‘논리’에 대한 철저한 훈련은 그 영역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조건화함.
• 한 개인의 개인적인 성향은 그의 과학 활동과 연관성을 가져서는 안 되므로 그의 상상력은 억압되고 그의 언어도 그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함.
• 이것은 과학적 ‘사실들’의 본성에 반영되어 ‘사실들’은 의견, 신념, 문화적 배경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경험됨.
   
3-4, 57-58
- 엄격한 규칙들에 묶인 전통을 창조하는 일이 가능하게 됨.
- 과학은 지식을 다루는 독자적인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전통에서 과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얻은 결과를 배제하게 됨.
- 파이어아벤트는 이를 반대함.
- 이유(1): 우리가 탐구하는 세계는 대부분 미지의 존재(unknown entity)라는 점
• 따라서 우리는 선택지를 열어두고 우리 자신을 미리 제약해서는 안 됨.
- 이유(2): 과학교육이 인도주의적(humanitarian) 태도와 조화될 수 없다는 점
• 개인을 잘 계발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개성을 기르는 것인데 과학교육은 이것과 상충됨.
- 그래서 파이어아벤트는 무정부주의적 방법론과 이것을 따르는 무정부주의적 과학의 윤곽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함.
  
  
(2020.11.15.)
    

2016/10/06

진정한 페미니즘과 잠재적 가해자

   
계량화하기 힘든 것에 ‘진짜’나 ‘진정한’을 붙이기 시작한다면, 그 논의는 수렁으로 빠진다고 보면 된다. ‘진짜’나 ‘진정한’은 난장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금이나 꿀 같은 것은 진짜와 가짜를 가릴 명확한 기준이 있다. 철학이나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미남이나 미녀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누가 미남이고 미녀인지 분별할 수 있고 대부분 비슷한 사람을 미남이나 미녀로 지목하지만, 미남이나 미녀의 명시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철학이나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진짜’나 ‘진정한’을 붙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은 쥐뿔도 모르면서 자기도 남들만큼 안다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죽겠는 사람들이다.
  
학계에서 논의되는 철학이 있다. 철학을 모르면 “나는 철학을 모른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철학을 안다고 말하고 싶고 어찌된 것인지 뭔가 아는 것 같다는 착각이나 자기기만 같은 데 빠지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그들이 쓰는 전략이 ‘진짜’ 철학, ‘진정한’ 철학이다. 철학자들이 진짜 철학과 가짜 철학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악용하여 자기 머리 속에 들어있는 개똥 같은 철학과 정상적인 철학을 구분하는 기준도 없고 따라서 자기도 철학을 알거나 할 줄 안다고 주장한다. 물론 개똥 같은 소리다.
  
‘진짜 보수’, ‘진짜 좌파’, ‘진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 치고 해당 주제나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당 분야 전공자들은 웬만하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로즈마리 퍼트넘 통 같은 사람들이 쓴 책만 봐도 페미니즘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다. 정상적인 페미니즘 연구자가 ‘진짜’나 ‘진정한’ 같은 말을 쓰겠는가?
    
<메갈리아>가 사회 쟁점이 되면서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거나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이기나 한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은 활동 내용이나 범위를 말하지 무슨 주의자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노조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제가 이주 노조에서 활동하는데요”라고 말하지 “제가 사회주의자인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 활동 내용이 아닌 무슨 주의자로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쥐뿔이나 아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한두 마디만 들어도 대충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무식쟁이인지 견적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페미니즘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이 매우 핫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다. 내가 스무 살 때부터 10년 넘게 들은 헛소리인데 최근에 페미니즘에서 핫하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한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고 여자도 애완동물한테는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개념으로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라고? 여자가 애완동물에게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라고?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면 안 된다고 없어 보이니까 전문 용어처럼 보일 것 같은 용어를 끌어온다. 그래봐야 개소리는 개소리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뭔 개뼈 같은 소리를 들으면, 잊고 있던 학부 때의 악몽이 스믈스믈 떠오른다. 반-성폭력 내규 교양을 하면 꼭 빠지지 않고 “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냐”는 신입생 놈들이 있었다. 반-성폭력 내규 교양하는 게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면,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받으라고 하는 건 그 사람을 잠재적 시체로 보는 것인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놈들이 어쩌다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것들은 단체로 헛소리 학원이라도 다니나 싶었는데, 그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실제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순화된 게 아니고 더 정신 나간 소리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나는 어떤 여성학자가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나 싶어서 관련 논문을 RISS로 찾아봤는데 잠재적 가해자 같은 용어를 쓴 논문은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구글에서 한글로 찾아보고 영어로 찾아보았지만 범죄학에서나 나오지 여성학자 중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범죄학에 등장하는 잠재적 가해자는 가상 적국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잠재적 가해자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관련 서적을 읽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관련 논문을 읽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딱 자기만큼 알고 자기만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쓴 글을 보고 확신을 얻어 무식한 소리를 하는 것뿐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곧 죽어도 자기가 페미니스트라고 우긴다. 그 때 사용하는 필살기가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다. 당신은 어떤 근거로 페미니스트냐는 나의 물음에, 어떤 사람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면 누구나 페미니스트다”라고 답했다. 좋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런 말을 특정 상황에서 정치적 구호로 쓰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쥐뿔 아는 것도 없고 판단 능력도 좋지 않은 사람들이 과도한 확신을 가지면 반드시 헛짓거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헛소리하고 헛짓거리하면, 그들과 무관하게 여성단체에서 최저 임금 받아가며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정상적인 활동가들이 욕을 먹는다.
    
   
(2016.08.06.)
   

2016/10/04

구린 작명



이화여대에서 <미래라이프대>를 설립한다고 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름이 너무 구리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가르친다는 건지 알 수 없으면서 이름만 구리다. ‘평생교육원’이라고 하든지 ‘미용대학’이라면 안 되나? 굳이 한자와 영어를 조립해서 ‘미래라이프’라고 하는 기괴한 이름을 만들 필요가 있었나?

한국에서 개떡 같이 작명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단과 대학이든 정부 부처든 이름을 희한하게 만든다. 한두 단어로 해당 기관이 하는 역할을 표현하지 못하고 이 단어 저 단어 막 갖다 붙이거나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놓거나 한자와 영어를 섞어놓는다. 식민지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고, 왜 이렇게 근본 없는지 모르겠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영문 표기는 “Ministry of Science, ICT and Future Planning”이다. “Ministry of Science”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정부 부처 이름에 굳이 Future Planning 같은 걸 붙일 필요가 없다. 어느 부서든 미래를 계획하지 과거를 계획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과거를 계획하는 부서는 조지 오웰 <1984>에 나오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밖에 없다. (진리부는 현재의 필요에 맞게 과거 사실을 조작하는 부서다.)

이런 추세면 국방부도 <멸공통일 국방부>나 <밀리터리부>로 바뀌지 말란 법이 없다. 대학에서 학과 통폐합과 개떡 같은 작명 실력이 결합하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학과> 같은 기괴한 학과명도 곧 나올 것 같다.

* 링크: [중앙일보] 이대, 직장인 단과대 '미래라이프대' 설립 추진 철회

( http://news.joins.com/article/20394482 )

(2016.08.04.)


2016/10/03

<인지과학캠프>에 참여한 외고 학생들의 태도

     

이번 여름 <인지과학캠프>에 참여한 외고 학생들의 태도는 지난 겨울 <인지과학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의 태도보다 안 좋았다. 이번 캠프에 참여한 강사들은 이 점에 불만을 토로했다. 요즘 애들이 못 됐다, 학교 교사한테는 안 그러면서 강사라서 얕잡아본다, 자기들이 상위권이라고 생각해서 오만하다 등등. 어떤 강사는 자기가 강의를 하는데 학생이 눈치도 안 보고 삼각함수를 풀어서 울 뻔했다고 했고, 다른 강사는 앞에 앉은 두 여학생이 한 시간 내내 휴대전화로 셀카를 찍었다고 했다. 강사들은 다들 학생들이 자기 강의를 안 듣고 딴청 부리는 것에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들어간 반에서도 학생들 태반은 딴청을 부렸는데, 나는 그다지 화가 안 났다. 워낙 내가 인격자인 탓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딴청 부리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화가 안 났다. 대학생도 수업 태도가 안 좋다는 말을 안 듣는 판이니 고등학생이 자세가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보면 공부 못하고 수업 태도 나쁜 애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 외고 애들이 공부 잘한다고 오만해서 수업 태도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나도 30년 간 인지과학과 무관한 삶을 살다가 아르바이트 하려고 속성으로 인지과학캠프 강사가 된 것이니, 10대 후반 애들이 대학원생의 강의 한 번 듣고 강의가 재미있어서 경청할 가능성은 낮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니 한창 노화중인 나도 힘이 없는데, 한창 자라는 애들이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으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 이번 여름은 특히나 덥다. 나는 학교 교사도 아니라 아르바이트 강사일 뿐이다. 내가 가르치는 걸 잘 듣든 귓등으로 듣든 생활기록부에 남는 기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강의하는 걸 멀쩡히 잘 듣는 애가 한 반에 몇 명씩은 있었으니, 사실은 이게 더 신기하다. 그리고 애들이 딴청 부리든 말든 내가 받는 돈은 달라지지 않는다.
  
원래 캠프에서는 한 반에 두 번 안 들어가게 시간표를 만드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날 나는 같은 반에 두 번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에 개론을 가르친 반에 오후에 철학을 가르치러 들어가니, 애들은 “선생님, 놀아요”, “선생님, 쉬었다 해요”라고 했다. 나도 애들 말대로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뒤에 있는 보조 강사가 학생을 감시하는지 나를 감시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애들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학생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어차피 이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여러분들 말대로 하면 제가 잘리겠죠? 어쨌든 하긴 해야겠지만 쉬엄쉬엄 합시다. 쉬엄쉬엄하려면 여러분들이 내 노동 강도를 높이면 안 돼요. 내 노동 강도가 높아지면 내 강의를 보는 여러분들도 피곤해지니까 여러분들도 손해예요. 떠들지만 않으면 돼요. 여섯 시에 일어나니까 힘이 없잖아요. 힘이 없는데 왜 떠들어요? 굳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안 돼요. 집에서 유튜브 본다고 생각하고 편한 자세로 보세요. 힘들면 책상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고 봐도 돼요. 그러다 졸리면 조금 자도 돼요. 옆에 친구랑 이야기할 거 있으면 필담해도 돼요. 떠들지만 않으면 돼요. 떠들면 내 노동 강도가 높아지고 그러면 여러분도 피곤해지니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앞에 앉은 못 생긴 남학생 두 놈이 떠들었다. “야! 너네는 그냥 자! 쫑알쫑알 떠들 거면 그냥 쳐 자!” 이랬는데도 약 30초 후에 두 놈은 또 떠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수업 종료 5분 남기고 강의 내용을 다 설명했다. 
  
  
* 뱀발: 
  
캠프 때는 항상 이사가 와서 현장을 살핀다. 네 번쯤 보니 낯이 익어서 그런지 이사가 나한테 한두 마디씩 물어본다.
  
- 이사: “◯◯씨도 인지과학 협동과정 소속인가요?”
  
- 나: “아니오, 철학과 소속입니다.”
  
- 이사: “아, 철학과면 <인문학 캠프> 강사가 더 좋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인지과학 캠프>에 참여하게 됐나요? 인지과학에 관심이 있어서?”
  
- 나: “아니오. 인지과학에 별다른 관심은 없었는데요.”
  
- 이사: “그러면 왜...?”
  
- 나: “돈이 필요해서요.”
  
내 말을 듣고 이사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웃고 나서, 이사는 다음 번 캠프 하기 전에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고칠 건데 그때 교안을 같이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6.08.03.)
     

내가 철학 수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

대학원 다니면서 들은 학부 수업에서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 중간에 농담으로 반-직관적인 언어유희를 하곤 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언어철학> 수업을 하면서 그런 식의 농담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부터 그런 반-직관적인 언어유희에 재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