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 수업에 따르면, 조선 시대 학파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서경덕, 이이, 이황, 조식인데 각각 개성이 독특하다.
서경덕은 인생에 별 굴곡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냥 개성에서 태어나서 책 읽고 공부하다 죽는다. 저작도 별로 없다. 황진이를 비롯한 여러 기생들과 친했다.
이이는 실제로는 위인전기에 나올 만한 위인이 못 된다. 천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머리를 공부 쪽으로 안 쓰고 권력 쪽으로 쓴다. 붕당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방조하거나 조장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관료가 아닌) 정치가로 보냈고 학문을 한 기간은 비교적 짧다. 그렇지만 그의 학설은 서인의 이론적인 기반이 된다.
이황은 기록상으로 보면 똑똑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평생 꾸준히 공부해서 60대에 자기 입장을 가진 학자가 된다. 그가 이룬 학문적인 업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 것이며, 조선 후기가 되면 상대 당파에서도 이황의 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주희에서 이황까지 이어지고 이황에서 이이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물론 이건 다 뻥이다.) 이황은 어떻게 공부했느냐. 그는 열심히 옮겨 적고 요약했다. 자기 관리의 달인이며, 특히 건강 관리와 재산 관리 부문에서 돋보인다.
조식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식은 성인 집중력 장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젊어서 왕한테 상소를 과격하게 써서 죽을 뻔했는데 대신들이 만류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다. 상소 내용이 이런 식이다. “나라가 이미 망했다. 똑바로 헤리. 네가 왕인 건 맞지만 너네 엄마는 그냥 과부인데 왜 설치냐. 너도 따지고 보면 그냥 고아잖아.” 이거 실제 상소에 있는 내용이다.
조식은 늙어서도 이 버릇을 못 고친다. 옆 동네 과부가 음녀라는 소문을 듣고는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는 과부의 집을 허물어버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문이 과부의 오빠가 과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퍼뜨린 헛소문이었다. 하마터면 귀향 갈 뻔 했는데 가까스로 귀향을 면한다.
조식에 대한 ㅈ선생님의 평은 이렇다: “조식의 글을 보면 남은 게 악 밖에 없는 사람이 쓴 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식의 글은 논의가 꼼꼼하지 않다. 어쨌든 16세기 영남에서 이황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룬다.
이 네 명 중 청나라가 편찬한 <사고전서>에 들어간 글은 서경덕의 것뿐이다. 서경덕이 글을 많이 남기지도 않았는데 왜 그의 글만 <사고전서>에 실렸을까. 조선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자적인 연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물론 소옹과 비슷하다는 단서가 붙는다)
다른 세 사람과 달리, 서경덕은 개념 자체를 붙들고 혼자서 씨름을 했다. 죽을 때 서경덕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스승이 없어서 젊어서 너무 많이 고생했다. 너희들은 절대로 그러지 마라.”
(2013.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