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1

JTBC <史기꾼들: 역사 이야기꾼들>에 대한 짧은 생각



JTBC에서 <史기꾼들: 역사 이야기꾼들>이라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서 어떤 프로그램인가 찾아보았다. 제목이 <史기꾼들>이라고 하니 역사학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방송국에서 <記레기들>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버나 유사 기자들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프로그램의 형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KBS1TV <천상의 컬렉션>처럼 연예인들이 문화재에 대해 아는 척 발표하고 방청객이 투표하는 프로그램은 몇 년 전에도 있었고, 강연자들끼리 누가 방청객의 표를 많이 받나 경쟁시키는 프로그램도 MBC에 있었다. 형식적으로 딱히 새로운 게 없으니, 제목을 자극적으로 지은 것이겠다.

1회 출연자는 썬 킴, 최태성, 심용환, 김지윤 박사, 이렇게 네 명이다. 썬 킴은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했다. 너댓 부분 끊어서 대충 보았는데, 별 내용은 없는 것 같아서 넘겼다. 최태성은 독립운동가 김상옥 이야기를 했다. 너댓 부분 끊어서 대충 보았는데, 역시나 별 내용은 없었다. 초등학생 자식이 있으면 보라고 할 텐데 굳이 내가 볼 필요는 없었다. 심용환은 12.12 군사반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역시나 다들 대충 아는 내용이겠지만, 기무사 자료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썬 킴이나 최태성보다는 내용 면에서 나았다. 김지윤 박사는 2차 대전 이후 80년 간 유지되었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용 면에서 앞선 세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굳이 다 볼 내용도 아니어서 몇 번 끊어서 보았다. 그러다가 뒷부분에서 약간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김지윤 박사는 철학자 헤겔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경험과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에 따라 행동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너무 뜬금없다 싶어서 앞뒤 부분을 살펴보았다. 미국이 만든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고, 그 질서를 흔드는 중심에는 미국이 있고,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고, 그러면 3차 대전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이런 흐름에서 헤겔을 인용한 것이다. 그 다음 김지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 역사를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은 그렇게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 하러 역사를 배우냐? 그렇게 전 인류를 참혹한 상황에 갖다 던져놓아도 인류는 진짜 희한하게도 살아남는 법을 배웁니다. 또,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이타심을 발휘하기도 해요. 인류애를 발휘하기도 하고. (다섯 걸음을 옮겨 위치를 이동한 뒤) 저는 거기에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3차 대전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우리 어린이 친구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번 같이 고민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대충 좋은 말로 강연을 끝내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역사를 왜 배워야 한다는 거지? 헤겔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강연자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는 것 아닌가? 소설을 써보자면, 아마도 헤겔의 말을 인용하는 것부터 전부 방송 작가가 썼을 것이고, 방송의 생리를 아는 김지윤 박사는 그게 말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수용했을 것이다.

썬 킴은 아무 내용도 없이 과장된 어조로 유사 설민석 같은 연기를 하지, 최태성은 독립운동을 소재로 합법적으로 찔찔 짜지, 이 와중에 김지윤 박사가 국제 정세가 어떻다면서 건조하게 강연을 끝낸다고 해보자.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끝내야 하는가? 철학자의 말이라면서 관객들의 기를 죽여놓은 다음,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편집본에서는 존 레논의 <Imagine> 같은 음악을 깔고, 다른 강연자의 괜한 표정도 보여주고, 느린 화면도 넣고, 이러면 값싼 감동을 쥐어 짜낼 수 있다고 제작진들은 판단하지 않았을까?

내 소설의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김지윤 박사가 자기 유튜브 채널에서는 건조하게 책을 소개하거나 쟁점을 분석하지, 밑도 끝도 없이 명언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정상적인 박사학위자가 밑도 끝도 없이 철학자의 말이라면서 인용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아는 선생님의 방송 출연 경험이다. 내가 아는 선생님이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집에서 어머니하고 저녁식사 하다가 우연히 해당 방송분을 보았는데, 방송이 재미 있고 없고를 떠나서 연결될 수 없는 두 덩어리를 억지로 한 덩어리로 합쳐놓은 것이 보였다. 저 선생님이 원고를 저렇게 썼을 리 없으니 당연히 방송국 작가가 이상하게 각본을 썼을 것으로 추측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 선생님께 물어보니, 방송국 작가가 각본을 이상하게 고친 게 아니라 아예 전부 작가가 써왔고 틀린 내용이 있는지만 그 선생님이 확인했다고 한다.

* 뱀발

유튜브 영상 때문에 사람들의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상만 놓고 보면 방송국 영상이 유튜브 채널들의 영상보다 훨씬 산만하다. 무슨 놈의 강연 프로그램이 한 화면에서 강연자가 3분 이상 나오는 법이 없다. 뻑 하면 관객 얼굴 비추고, 연예인들 잡담하는 거 넣고, 화면을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린다.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강연자가 말 좀 하려고 하면, 이 놈이 한 마디 하고 저 놈이 한 마디 하고, 빨리 빨리 넘어가지 퀴즈를 풀고 있지 않나, 유튜브 영상이면 10분이면 끝날 내용을 30-40분을 끌고 앉았으니 답답해서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방송국 교양 프로그램이 이 모양이라고 해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유튜브가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교수들을 가끔씩 불러서 <꼬꼬마 텔레토비>처럼 느릿느릿 한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방송 맛을 본 교수들이 자기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인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다. 희망은 유튜브에 있다.

* 링크(1): [JTBC] 불안한 요즘 국제 정세, 제3차세계대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 역사 이야기꾼들 1회 (2025.09.04. 방송)

( www.youtube.com/watch?v=H-3umx46tnc )

* 링크(2): [김지윤의 지식PLAY] 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은 현재와 닮아있다? / 몽유병자들, 책리뷰, 1차세계대전

( www.youtube.com/watch?v=qy2bTQj3iVc )

(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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