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는 <우주 생명 마음>이라는 과목을 맡아서 강의하고 있다. 지난 학기에 학부 철학과목 강사 자리 여러 곳에 지원했다가 모두 떨어졌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강의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강의를 주선해 준 분한테 학교에서 요구하는 수업 방향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분은 “학교에서 따로 요구하는 것은 없구요, 아마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거예요. 잘할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과목 이름에 <우주 생명 마음>이니 일단 각 단어에 해당하는 내용이 수업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맡은 곳은 인문캠퍼스가 아니라 자연캠퍼스였다. 내가 맡은 수업을 듣는 학생 중 대부분은 이공계 학생들이니, 내 마음대로 수업을 해버리면 문제가 생기겠다 싶었다.
학교 포털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전임자들의 몇 년 치 수업계획서를 훑어보았는데, 수업 방향이 제각각 달랐다. 우주, 생명, 마음 부분의 강의 비율도 달랐다. 교강사마다 다루는 세부 분야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우주 부분에서 물리학을, 생명 부분에서 생물학을, 마음 부분에서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을 다룬다는 점은 공통이었다. 나도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여러 수업계획서 중 유독 두드러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느 수업에서는 한 학기 내내 한의학만 했다. 수업이 <우주 생명 마음>인데 왜 한의학 강의만 했을까? 한의학적 세계관에서는 우주와 생명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에 한의학 강의만 해도 <우주 생명 마음>에 부합한다는 점에 착안했던 모양이다. 이런 참신한 접근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공계 학생이라면 일반 물리, 일반 생물은 기본으로 들을 것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에게 일반 과학교양 강의보다 한의학 강의가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보고 같은 제목의 일반 과학교양 강의와 한의학 강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한의학 강의를 들을 것 같다. 나는 한의학은 잘 모르니까 어쨌거나 과학 교양강의를 해야 한다.
한 학기 수업이 열다섯 주다. 첫째 주는 강의 소개를 하고, 중간고사 한 주, 기말고사 한 주, 이렇게 세 주를 빼면 열두 주가 남는다. 우주, 생명, 마음을 각각 네 주씩 하면 균형이 딱 맞는다. 마치 <천자문>이 “천지현황”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로 끝나며 우주와 문명과 역사와 지리를 훑는 것처럼, 우주의 탄생부터 인간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흐름이 이어지게 수업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ChatGPT로 수업계획서를 만들고 수업 얼개를 짰는데, 그대로 할 수가 없었다. ChatGPT가 산출한 얼개만으로는 수업 분량을 채우기 어려운 데다, 환각이 발생해 중간중간 사이비 과학 비슷한 것을 끼워 넣는 바람에 그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머리를 쥐어짜서 대강 틀을 짜고, 이전에 정리한 자료를 가져오고, 남은 공백을 인공지능과 검색으로 메우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음 부분은 예전에 해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마음 첫째 주는 이대열 교수의 『지능의 탄생』 요약한 것을 바탕으로 지능이 무엇인지 수업하고, 둘째 주는 튜링 검사나 중국어 방 같은 인공지능 철학 쪽 내용을 다루고, 셋째 주는 인간의 합리성과 『넛지』 등 행동경제학을 다루고, 넷째 주는 확장된 마음을 비롯한 4E를 다루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우주와 생명은 어떻게 하나?
우주 첫째 주는 탈레스부터 갈릴레오까지를 다루었다. 둘째 주는 원래 뉴튼부터 아인슈타인까지 했어야 했는데, 뉴튼 생애와 자연철학 위주로 하고 상대성 이론은 거의 안 했다. 다음 주가 우주 셋째 주인데 상대성 이론과 거기서 파생된 우주론을 해야 한다. 넷째 주에서는 지구의 탄생과 지질시대를 다루면서 생명 첫째 주와 연결되게 수업 내용을 만들 생각이다. 사실, 셋째 주와 넷째 주 내용은 아직 세부 구성을 정하지 못했다. 나도 공부해야 한다.
생명 첫째 주는 생명의 탄생과 왜 탄소 기반 생명체인지 등등을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생명 넷째 주는 마음 첫째 주와 연결되어야 하니까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둘째 주나 셋째 주쯤에 진화, 유전자 같은 것을 다루면서 밈 같은 소리도 좀 넣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쥐어짜도 한 주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어떻게 하다 보면 무언가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약간 걱정은 된다.
한 주 한 주 간신히 강의자료와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다. 강의자료는 강의 때 쓰는 파워포인트 파일을 가리키고, 수업자료는 A4용지에 개조식으로 쓴 글 형식의 자료를 가리킨다. 수업자료를 만들다 보니 여백을 줄인 A4용지에 2단으로 열 쪽에서 열두 쪽 정도를 만들게 된다. 덜 만들고 싶은데 세 시간 분량을 염두에 두고 만들다 보면 그렇게 된다. 앞으로도 매주 그 정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처음 생각한 수업의 모습은, 나 혼자 많이 말하고, 학생들은 편하게 수업 듣고 적당량만 기억하고, 시험 부담 적고, 과제 부담 거의 없고, 평소에 접하지 않을 법한 잡다한 지식을 약간 얻고, 약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패키지 관광 같은 것이었다. 아무 고민 없이 가이드 따라 버스 타고 다니면서 보라는 거 보고 먹으라는 거 먹는 패키지 관광 말이다. 나는 첫 시간에 이런 말도 했다.
“요즈음 사고력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좋은 이야기인데, 사고력이 그렇게 중요하면 전공 수업에서 키워야지 교양 수업에서 키우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수업에서는 그런 거 키우지 맙시다. 저는 여러분한테 발표 같은 것도 안 시킬 거고, 여러분들이 부담 없이 ‘아, 이런 게 있다 보다’ 하면서 편하게 듣고, 듣고 있으면 기분도 좀 좋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험 부담도 별로 주고 싶지 않습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그렇지 않아요? 중간고사도 일단은 다 선다형 문제만 낼 겁니다. 서술형 문제는 당연히 안 내고, 단답형 문제도 안 낼 거예요. 그리고 어떤 문제 낼지 2배수 정도로 알려줘서 그 부분만 봐도 되게끔 할 겁니다. 학점은 학교 방침에 따라 상대평가구요.”
이 정도로 안심시켜 놓으면 학생들이 편하게 수업을 들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안심을 시켜놨는지 학생 중 절반에서 3분의 2 정도는 꾸벅꾸벅 졸거나 약간 영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언어철학>이나 <심리철학> 수업할 때는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기세도 진도를 나갔는데, 이공계 학생들 앞에서 과학 이야기를 하려니 내가 기가 약간 꺾여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수업을 듣고 있는 3분의 1 정도의 학생들도 표정이 안 좋았다.
수업 끝나고 몇몇 학생들이 나에게 와서 시험 문제가 어떻게 나오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학생들 표정이 안 좋은 이유를 알았다. 도대체 시험을 어떤 식으로 내려고 수업을 저런 식으로 하나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어차피 선다형 사실확인 문제만 낼 것이어서 학생들의 학습 부담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보기에는, 수업에서 과학자 일생도 나왔다가, 수식도 나왔다가, 수식 도출하는 방법도 나왔다가, 과학사도 나왔다가, 공간에 관한 철학적 논의도 나왔다가 하니, 선다형 문제를 낸다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가늠이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을 한 번 더 안심시켜야겠다고 판단하여 중간고사 출제 방침을 LMS에 공지했다. 공지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강의자료는 강의에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시험 문제는 수업자료에서만 출제한다.(강의자료에 수식이 있고 수업자료에 “강의자료를 참고할 것”이라고 써놓았다면, 그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2) 선다형 문제만 출제한다. 단답형, 서술형 문제는 출제하지 않는다.
(3) 시험 일주일 전에 시험 키워드를 공지한다. 시험 문제가 60문제라면 키워드는 120세트 정도 될 것이다. 시험 문제는 공지한 키워드와 관련해서만 출제한다.
(4) 키워드 세트와 문제 예시
(5) 답안지 작성 방식
가령, 내가 수업 시간에 뉴튼의 『프린키피아』의 원제가 “자연철학의 수학적 기초”라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왜 자연철학이라고 했는지, 어떤 점에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데카르트의 중력 개념과 뉴튼의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라이프니츠와 공간 개념을 두고 어떤 논쟁을 벌였는지 등을 설명했다고 해보자. 이와 관련된 키워드 세트와 문제는 다음과 같다.
- 키워드 세트(1): 프린키피아, 자연철학의 수학적 기초
문제(1): 뉴튼의 『프린키피아』의 원래 책 제목은 “( ㉠ )( ㉡ )의 ( ㉢ )적 기초”라는 뜻이다. ㉠/㉡/㉢에 들어갈 단어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① 자연/과학/수학
② 자연/철학/공학
③ 자연/수학/철학
④ 자연/철학/수학
⑤ 자연/과학/철학
뉴튼의 생애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문제로 만들 수 있다, 뉴튼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것을 많이 믿었다. 마법 같은 것도 믿었고, 연금술도 믿었고, 고대 성서도 연구했고, 무신론이 환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펠로우십 하는 사람들도 다들 받는 사제서품을 안 받아서 학장이 되지 못했다. 뉴튼이 사제서품을 받지 않은 것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은 유니테리언이었기 때문이다. 뉴튼이 사제서품을 받지 않고도 석좌교수를 했던 것은 특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와 관련한 키워드 세트와 문제는 다음과 같다.
- 키워드 세트(2): 뉴튼, 광학, 역학, 연금술, 석좌교수, 학장, 사제서품
문제(2): 다음 중 뉴튼이 하지 않은 것은?
① 광학 연구
② 역학 연구
③ 연금술 연구
④ 루카시안 석좌교수
⑤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
공지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아직 모른다. 다음 주에 수업할 때 보면 알겠지.
내가 원래는 OMR 카드로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OMR 카드 판독기가 한 대당 가격이 500만 원 내외여서 손으로 채점하기로 했다. 학생들이 작성할 답안지도 따로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공개했다. 60문제 정도 내고 한 사람당 채점하는 데 3분 정도 걸린다고 하면, 한 번 채점하고 확인차 한 번 더 채점한다고 해도 이틀이면 다 채점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문제가 100번이 아니라 99번까지 있는 것은, 수에 관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관념 때문은 아니고, 문제번호가 세 글자가 되면 칸이 밀려나서 두 자리까지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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