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30

[외국 가요] 콰이어트 라이엇 (Quiet Riot)



Quiet Riot - Cum On Feel The Noize

( www.youtube.com/watch?v=cDSJs95TfT0 )

(2025.11.02.)


성을 간다는 표현



30년 전만 해도 TV 드라마 등에서 “성을 간다”는 표현이 자주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새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일종의 조건문의 형태로 사용되며, 전건이 거짓임을 강하게 강조할 때 쓴다. 가령, 복덕방 하는 김 사장이 별다방 정 마담과 오붓하게 어딘가를 향하는 것을 이웃 주민이 목격하고, 그 사실을 김 사장의 부인에게 전했다고 해보자. 1990년대 TV 드라마에서는 김 사장의 부인이 펄펄 뛰고 나서, 그다음 장면에서 김 사장이 정 마담과의 관계를 부인하며 “정 마담하고 무슨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면, 내 성을 간다”는 식의 대사를 했다.

“성을 간다”는 표현이 한국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성과 강하게 결부 짓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성을 목숨처럼 여기지 않으니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김 사장이 정 마담과 긴밀한 관계였을 경우, 성을 바꾸는 대신 성을 유지하면서 할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김 사장이 최 사장으로 성을 바꾸고 멀쩡히 사는 것과 김 사장이 할복하고 故 김 사장이 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겠는가?

“성을 간다”는 표현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살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진짜로 뼈대 있는 양반들이 그런 표현을 썼을 법하지는 않다.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청에 복수하지 못한다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이상해 보인다. 예송논쟁을 하면서 “3년복 이론이 틀리면 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럴법한 집안의 종손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문중 어른들한테 귀싸대기를 쳐맞을 일이다. “성을 간다”는 표현은 가까운 조상이 성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근본 없는 집안의 사람들(자신이 양반이라고 믿지만 족보 이외의 어떤 증거도 없는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법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당 표현이 쓰인 것은 기껏해야 100-200년 이내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뱀발

어쩌면 캐삭빵의 원조는 “성을 간다”는 표현은 아닐까?

(2025.07.30.)


2025/09/27

[심리철학] Ravenscroft (2005), Ch 12 “Phenomenal consciousness” 요약 정리 (미완성)



[ Ian Ravenscroft (2005), Philosophy of Mind: A Beginner’s Guide (Oxford University Press), pp. 171-189.

이안 라벤스크로프트, 「제12장. 현상적 의식」, 『심리철학: 초보자 안내서』, 박준호 옮김 (서광사, 2012), 278-307쪽. ]

12.1 지식 논증 (The knowledge argument)

12.2 지식 논증에 대한 답변

(Responding to the knowledge argument)

12.3 설명간격 (The explanatory gap)

12.4 설명간격 메우기

(Can the explanatory gap be filled?)

12.5 기능주의와 현상적 의식

(Functionalism and phenomenal consciousness)

12.6 결론 (Concluding remarks)

12.1 지식 논증 (The knowledge argument)

12.2 지식 논증에 대한 답변

(Responding to the knowledge argument)

12.3 설명간격 (The explanatory gap)

12.4 설명간격 메우기

(Can the explanatory gap be filled?)

12.5 기능주의와 현상적 의식

(Functionalism and phenomenal consciousness)

12.6 결론 (Concluding remarks)

(2024.09.27.)


2025/09/26

철학자의 공책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철학자의 공책』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 제목만 봐도 이 책은 철학하고 아무 상관이 없겠다 싶었는데, 저자가 서강대 철학과 교수였던 최진석이었다. 최진석 교수가 공책에 적어놓은 구상이나 메모 같은 것을 책으로 정리해서 냈나 싶어서 책을 펴보았다.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 책 속에 있었다. 굉장한 것을 보았다 싶어서 주저하지 않고 그 책을 샀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출판계에는 필사책을 출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나 경증 치매 노인도 아니고 멀쩡한 성인들이,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서 몇 줄 옮겨쓰는 것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필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을 사서 한 줄 한 줄 옮겨적는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이든 아니든,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기존의 필사책은 아무리 글자가 크고 띄엄띄엄 있더라도 검증된 고전이나 문학작품을 필사하도록 했다. 『철학자의 공책』이라는 책은 기존의 필사책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진석 교수의 책이나 강연 내용 중 일부를 어록으로 따서 독자들이 필사하거나 메모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이나 글을 어록으로 정리해서 필사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그렇게 좋으면 그냥 돈을 갖다 바치지 왜 그걸 필사하나 싶지 않을까? 공자가 다시 살아났는데 사람들이 『논어』를 암송하고 필사하면 남사스러워할 것 같다. 예수가 재림했는데 기독교인들이 복음서를 필사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남사스러워할 것 같다. 홍위병들이 모택동 어록을 필사한다고 하면 모택동이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 시기 모택동은 확실히 정상은 아닐 것이니 굳이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진석 교수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책을 냈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말 새몸짓인가?

책에 실린 어록은 정확히 300개인데,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기존의 권위, 관습 등에 얽매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라는 어록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진짜로 원한다면, 누군가가 자기 책을 필사하고 있어도 그것을 뜯어말려야 할 것 같은데, 자기 어록을 필사하라고 책을 내니 이해하기 어렵다. 두 번째 부류는 철학이 어떤 것이고 인문학이 어떤 것이라는 어록이다. 틀렸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내용이다. 어쨌거나 철학으로 먹고 산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철학이나 인문학에 대해 망상을 품는 것을 막지는 못할망정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5.07.26.)


공무원 가족 무고단을 상대하는 나의 각오

내가 읽은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대충 기억에 얼마 전까지 인문계열의 조교수 최초 임용연령 평균은 47.6세였다. 박사학위를 27살에 받는다고 치면 20년, 35살에 받아도 10여 년의 일시적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인문계열의 조교수 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