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에서는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하면서 떠받들면서, 자연 언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신이 수학자라고 해도, 이론이든 실험이든 내가 얻은 결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쓰는 것은 결국 자연 언어일 텐데, 왜 자연 언어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쓸까?
동료 대학원생의 소개로 과목 연계 글쓰기 과목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학부 공통 글쓰기 수업의 경우, 프로그램 자체에 결함이 있어서 학생이 글을 못 쓴다고 해도 그게 학생 잘못인지 프로그램 잘못인지 가리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교과목 연계 글쓰기 과목은 전공 수업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학부 공통 글쓰기 수업보다 프로그램 자체의 결함이 비교적 적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학생이 글 쓰다 누워버리면 역시나 답이 없다.
나도 학생이라 글 쓰다 누워버리는 그 마음을 대강은 이해한다. 다른 중요하고 급한 과목에서 과제가 쏟아지는데,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글쓰기를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손댈 수 없는 글을 냅다 내버리면 어쩌라는 것인가?
나는 손댈 수 없는 글을 낸 학생에게 예상 독자가 누구냐고 물어본다. 똘똘한 고등학생이냐, 학부 저학년이냐, 학부 고학년이냐, 대학원생이냐, 교수냐 등등. 그러면 우물쭈물하다 그 중 하나를 정하기 마련인데 가끔은 당당하게 대학원생이나 교수라고 답하는 학생이 있다. 내가 해당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리뷰 페이퍼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는 안 쓸 것 같은 느낌은 받는데, 내가 해당 분야를 전혀 모르므로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학생을 족칠 수가 없다. 해당 내용만 알았어도 이러저러한 내용을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기술해야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냐고 족쳤을 텐데, 물증이 없으니 “이 글을 어떻게 하죠?”라고 말하다가 40분이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글쓰기 조교가 준비를 안 해오고 대충 한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대충한 건 맞는데, 그래도 그런 글은 건당 2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손대기 힘들다.(참고로 글쓰기 지도 한 건당 4만 원이다.)
손댈 수 없는 글을 읽다가 ‘내가 왜 이런 글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전공 대학원생 중 한 명에게 글쓰기 조교 일을 시켰다면, 나처럼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학생을 못 족치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아무래도 이공계 쪽에는 글쓰기 조교 일을 할 인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다.
어떤 분야가 학문 분야라면, 이공계가 아니라 예체능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분야 전공 수업의 글쓰기 조교를 할 인력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글쓰기 조교를 다른 과에서 데려온다는 것은, 경제학과로 비유하자면, 경제수학 수업의 조교를 수학과에서 데려오고 경제통계학 수업의 조교를 통계학과에서 데려온다는 것과 비슷하다. 수학이나 통계학과 관련된 전문적인 연구라면 모르겠으나 학부생 지도 관련해서는 경제학과 내에서 다 해결된다. 그런데 왜 글쓰기는 그렇지 않은가?
중요성만 놓고 보면, 다른 요소보다 글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수학을 많이 쓸 수도 있고 적게 쓸 수도 있으나, 어떠한 경우에도 글은 안 쓸 수가 없다.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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