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4

tvN <벌거벗은 세계사>를 살리는 방법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는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방송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결국 해당 전문가가 방송 내용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폭로하게 만든다. 제작에 참여한 전문가를 내부 폭로자로 만드는 신기한 프로그램이다. 이번에는 의대 교수가 방송에서 흑사병 가지고 아무 말이나 했음을 감수자였던 서양사학과 선생님이 폭로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전문가에게 감수를 맡기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해당 전문가에게 강의를 맡겼다면 이러한 일들이 안 벌어졌을 것이다. 이번 흑사병 편은 더더욱 그렇다. 어차피 강연자도 교수(의대 교수)이고 감수자도 교수(서양사학과 교수)이다. 교수가 재미있어봐야 교수니까 아예 처음부터 서양사학과 교수에게 맡기면 제작 절차도 줄고 제작비도 덜 들었을 것이다. 유튜브에 방송 영상의 일부가 올라와서 몇 분 보았는데 실제로도 강연자는 여느 교수들처럼 재미없게 강연했다.

설민석이 강연자로 출연하는 경우는 강연자와 감수자가 분리될 수밖에 없다. 설민석을 교수 수준으로 만들 수도 없고, 교수를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처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달리, 의대 교수나 서양사학과 교수나 둘 다 교수인데, 왜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서양사학과 교수에게 강연을 안 맡기고 의대 교수에게 강연을 맡겼을까? 서양사학과 선생님의 페이스북 글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서양사학과 선생님이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방송국 관계자가 알았던 것 같다.

한국 식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성격을 두 단어로 줄이면 ‘재미’와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설민석의 강의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만족시킨다고 할 때의 그 재미와 감동이다. 그런데 그게 쥐뿔이나 무슨 재미와 감동인가? 그냥 억지와 신파를 좋게 표현한 것이다. 억지는 사람들이 적당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되새기게 한 후 그에 부합하는 잘못된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고, 신파는 애민 정신이 어쩌구 외세의 침탈에 맞서 어쩌구 하면서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찔찔 짜는 것이다. 아닌가? 사람들이 정말로 정보를 얻고 지식을 쌓고 싶으면 히스토리 채널 같은 것을 보지 유치하게 애민정신 같은 소리나 하는 한국 식 교양-예능 프로그램을 왜 보겠는가?

서양사학과 선생님은 페이스북에 게시글 두 편에 걸쳐 방송 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첫 번째 게시글에서 지적한 바는 다음과 같다.

- 통계나 병인학적 측면에서 최근 해석을 반영해야 했다.

- 카파 공성전에 대한 자료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신뢰할 수도 없다.

- 강의 전반에 중세에 대한 편견이 깔려있다.

-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없다. 동시대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따지자면 르네상스가 시작한 후 흑사병이 발생했다.

두 번째 게시글에서 지적한 바는 다음과 같다.

- 만약 의학사적 관점에 충실하였다면, 다음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 (1) 흑사병이 발병한 원인뿐 아니라, 어떻게 대부분의 지역에서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지만) 돌연 사라졌으며, 그 후 일정 기간 후 다시 발병하게 되었는지 등의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 (2) 1980년대부터 학계에서는 중세 말과 근대 초에 주로 유럽에서 발병하였던 흑사병(2차 판데믹)과 19세기 말에 홍콩, 인도, 만주, 미주 등지까지 확산된 페스트(3차 판데믹)가 동일한 역병이었는지를 두고 뜨겁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2차 판데믹과 3차 판데믹이 동일한 전염병인가?

- (3) 중세 말에 의사들이 집필했던 흑사병 보고서(논고) 같은 것도 당대의 의학적 수준과 처방을 살펴볼 핵심적인 의학 자료를 방송에 다루어야 한다.

애초부터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되었다고 개억지를 부리면서 시청자들을 가슴 뭉클하게 할 작정이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건조하고 전문적인 지적이 방송에 반영되면 해당 프로그램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누가 보겠는가? 서양사학과 교수, 서양사학과 박사, 서양사학과 석사, 서양사학과 일부 학부생, 그리고 일부 역사 관심자 정도나 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방송을 만들면 사학계의 호평을 얻겠지만 시청률이 바닥을 쳐서 조기종영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딜레마’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만들면 시청률이 안 나올 것이고 시청률이 나오게 만들려면 비-정상적인 내용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아니다. 지금의 방송 기법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우선, 방송 내용을 최대한 자극적인 내용으로 채운다. 검증되지 않지만 널리 퍼진 온갖 이야기를 끌어모은 다음에 작가들을 갈아넣어서 정교하게 이어붙인다. 특히나 약발이 좋은 것은 아저씨들이 술 먹으면서 잘난 체 할 때나 말할 법한 수준 낮은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 위주로 대본을 만들고, 해당 분야와 관계없지만 연기력 좋고 썰을 잘 푸는 사람을 섭외해서 강연을 맡긴다. 관객 역할로 깔아놓는 연예인들은 당연히 명문대 출신이어야 하고 중간중간에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그럴싸하기만 한 이야기만으로 방송을 만든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교양-예능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교양-예능 프로그램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방송 끝나기 5분 전 쯤에 전문가 선생님이 나와서 <진실 혹은 거짓> 코너를 진행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되었다? 거~~짓!” 이런 식으로 하면 방송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역사 왜곡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마음대로 방송으로 만들면서도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을 수 있다. 물론, MBC <서프라이즈> 측과 미리 조율해야 할 것이다.

* 링크: [경향신문] “그런 자문 한 적 없다” 변명뿐인 ‘벌거벗은 세계사’가 드러낸 역사 예능의 한계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102021358001 )

(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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