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에서 하는 전시회를 다녀왔다. 100번째 서화전이라 졸업생 작품과 재학생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역사가 50년이 넘는 동아리인데다가 선배 중에 서예 작가로 활동하는 분도 계셔서 전시회에 좋은 작품이 많았다. 재학생 중에도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웠는지 상당히 잘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작품들 사이에서 유독 내 눈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10센치의 <스토커> 노래 가사를 한글로 쓴 신입생의 작품이었다.
서예 동아리마다 배우는 방법이나 순서가 다른데, 내가 활동했던 동아리에서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순으로 붓글씨를 배운다. 석고문을 쓴 다음, 을령비 같은 예서를 쓰거나 태산각석 같은 소전을 한 번 더 쓰고 예서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한글 서예를 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보통은 어려서 서예 학원 다닌 사람이나 한문 서예를 꽤 잘 하게 된 사람이 한다. 한글 서예라고 해서 쉬운 것도 아닌데다 한글은 한자보다 알아보기 쉽기 때문에 못 썼을 때 훨씬 티가 많이 난다. 그래서 붓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한글 서예를 안 한다. 동아리에 가입하기 전에 서예를 배운 적이 없는 신입생은 석고문이나 태산각석을 써서 전시회에 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신입생은 대담하게도 한글 서예로, 그것도 대중가요 가사를 작품으로 써서 전시회에 냈다. 글씨 쓴 것을 보니 대학 와서 처음 붓을 잡은 것 같은데 그런 행동을 한 것을 보면 대단한 용자임에 틀림없다. 동아리 선후배들을 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있고 내 동기 중에도 난정서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쫙쫙 써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신입생 같은 용자는 10년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다. 내 후배 중에 이런 용자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저녁식사 때 술 한 잔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전시회장에서 재학생들한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그 날은 그 신입생이 전시회장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에 그 신입생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2017.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