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이 음모론자치고 생명이 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선, 누구나 인정하는 비교적 확실한 사실을 밑에 깔아놓고, 뭔가 의심스럽지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제보받았다고 하고, 이야기의 빈틈을 나름대로의 추측으로 살을 채워놓고, 이것을 일종의 소설이나 이야기라고 간주하자고 한다. 그러면 김어준 지지자들이 여기저기 퍼 나르며 팩트네, 진실이네 하며 우긴다. 그렇게 사회가 가벼운 열병을 앓을 때쯤, 김어준은 조용히 빠져나간다. 김어준은 자기가 한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했을 뿐이며, 자기 지지자들보고 난리 치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열병이 가라앉을 때쯤 김어준은 다시 음모론을 가지고 나와 이것을 또 소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김어준은 대중들에게 외면받지 않는가? 그 중 몇몇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저거 저거 또 음모론인데...’ 하면서도 볼 수밖에 없다.
양치기 소년 우화에서 양치기 소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은 것은 맨 마지막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기 전까지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음모론은 그렇지 않다. 마치 쌀-보리 게임할 때 보리가 몇 번 나오다가 가끔 쌀이 나오듯, 김어준에게서는 음모론이 몇 번 나오다 갑자기 진실이 나온다. 그러니 김어준이 음모론을 들고 나올 때마다 의심하고 찜찜해 하면서도 안 볼 수가 없다. 만일 양치기 소년이 허둥지둥 뛰어온 사람들을 비웃지 않고 김이 폴폴 나는 어떤 똥을 가리키며 “저 똥이 과연 개똥일까요, 아니면 늑대똥일까요?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이 산에 개가 산다는 게 가능할까요? 냄새가 납니다, 냄새가”라고 했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김어준이 음모론자로서 장수하는 동안 민주 진영에는 무엇이 남았나? 음모론에 대한 일종의 면역이 생긴 것 같다. 팩트라고 안 하고 소설이라고 하며 비교적 짧은 주기로 치고 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김어준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이제는 예전처럼 열렬하게 반응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바라본다.
지난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에서 한 김어준의 증언은 지금껏 김어준이 제시한 어떠한 음모론보다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김어준은 12.3 계엄 때 체포조가 아닌 암살조가 움직였고, 미국을 사살하여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도록 유도했고, 생화학 테러를 하려고 했고, 김건희가 은퇴한 정보 요원을 동원하려고 했다는 제보를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제보 내용이 충격적인데도 사람들은 차분하게 반응한다. 지지자들도 “믿기 힘든 내용이지만 일단 두고 보자”는 식의 반응이고 반대자들도 “김어준이라면 믿고 거른다”고 하며 욕도 잘 하지 않는다. 듣기는 듣겠으나 참고만 하겠다는 반응이다.
김어준의 음모론과 대비되는 것이 보수 진영의 음모론이다. 김어준의 음모론이 다종다양한 사회 현안을 주제로 다룬다면, 보수 진영의 음모론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주로 다룬다. 대표적인 것이 5.18 북한군 계입설이다. 보수 진영의 음모론은 소재도 적고 구조도 단순하고 지속 기간도 훨씬 길다. 음모론에 감염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도 민주 진영 쪽보다는 보수 진영 쪽이 훨씬 더 강하다. 김어준이 자신의 음모론을 소설이라고 말할 때, 보수 진영에서는 자기네 음모론을 팩트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김어준의 음모론이 일종의 밈이고 김어준이 그 밈의 숙주라고 한다면, 민주 진영은 김어준과 부대끼면서 열병도 앓고 피도 좀 토하고 똥도 쌌지만 어쨌든 면역을 가지게 되었다. 김어준이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버전의 음모론을 가지고 나왔고 민주 진영을 여러 번 감염되면서 증상도 점점 약해졌다. 면역력이 생기니 국회 과방위 증언을 보고서도 김어준 지지자들조차 기침 몇 번 하는 정도로 넘어가고 있다.
반면, 음모론이라고 가지고 있던 것이 5.18 북한군 계입설 정도이던 보수 진영에서는 김어준의 개표 음모론을 접하고 감염되니 맛이 가서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개표 음모론은 김어준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후 1-2년 재미보다가 문재인이 대통령되자마자 갖다버린 것인데 보수 진영에서는 그것을 주워와서는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어준의 음모론은 『총, 균, 쇠』에서 일종의 균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 뱀발
밈과 관련된 문제 중 하나가 유전자가 복제되듯이 밈도 복제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음모론이라고 해서 한 음모론이 다른 음모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부정선거 음모론은 확실히 김어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맞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가로세로연구소> 방송에서 진행자들이 김어준의 부정선거 음모론을 언급했고 그 다음 날인가 강용석이 김어준의 <더 플랜>을 보았다며 참고해야겠다고 말했다.
* 링크: [경향신문] 김어준 “계엄 때 ‘한동훈 사살’ 제보”…민주당 “확인하고 있다” 신중
( www.khan.co.kr/article/202412131216001 )
(202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