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보다 BODA> 채널에 [과학을 보다], [역사를 보다]에 이어 [철학을 보다] 시리즈가 올라오고 있다. [과학을 보다]나 [역사를 보다]와 비교하자면 [철학을 보다]에는 몇 가지 미비점이 있는데, 이는 시리즈 초반에 겪는 시행착오라기보다는 기획 단계에서의 결함에서 기인한 것 같다.
[과학을 보다]와 [역사를 보다]의 패널들은 상보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을 보다]의 경우, 물리학자 두 명을 거의 고정 패널로 놓고 논의 주제에 따라 나머지 패널 두 명을 바꾼다. 미생물학자가 나오기도 하고 곤충학자가 나오기도 하고 화산학자가 나오기도 한다. 오프닝 질문에 대하여 물리학자가 물리학적 지식에 기반하여 대답하고 나서 다른 패널 중 한 명이 보강하여 대답한다. 본 주제 질문에서는 다른 패널 중 한 명이 자기 전공에 기반하여 대답하면 이를 물리학자가 거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역사를 보다]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집트학 연구자, 고고학 연구자, 중동 전문가, 이렇게 세 명을 거의 고정 패널로 놓고 논의하는 주제에 따라 나머지 패널 한두 명을 바꾼다. 오프닝 질문은 새로 온 패널과 관련된 주제(남미, 동남아 등)로 하고 나머지 고정 패널들이 새로 온 패널에게 추가로 질문한다. 본 주제 질문에서는 한 연구자가 답변하면 그와 관련되거나 상반된 내용을 다른 패널들이 답변한다. 전혀 다른 시기와 지역이지만 신기하게 연관되는 경우도 있고, 가까운 시기나 지역인 것 같은데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패널들의 답변이 묘하게 비교나 대조가 된다.
[철학을 보다]에서는 패널들 간의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구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양철학자(유교) 한 명, 서양철학자(프랑스철학), 과학철학자(생물학의 철학), 이렇게 패널이 세 명인데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 다 따로 이야기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로 아무 상관없는 분야의 전문가들을 섭외했기 때문이다. 계통수로 따지면 동양철학과 과학철학은 인간의 눈과 오징어의 눈만큼이나 관련 없다.
가령, 진행자가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패널들에게 던졌다고 해보자. 동양철학자가 아무리 감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들,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어쨌고 맹자가 어쨌다는 것뿐인데, 그건 그 당시 과학 수준에 의존한 것이거나 당시 사람들의 관념을 투영한 것이어서 특별히 가공하지 않는 이상 21세기 사람들에게 마땅히 시사할 만한 것이 없다.
성리학에서는 유교적 윤리 규범을 자연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 법칙의 연장선인 것처럼 다룬다. 윤리 규범의 근거는 인간의 리인데 자연의 리나 인간의 리나 같은 리다. 그렇다면 자연에서도 인간의 효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게 있을까? 성리학에서는 그런 게 있다고 우긴다. 까마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든지, 수달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을 그러한 사례로 제시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부모 까마귀가 새끼를 키우다가 왜소해져서 다 자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 장면이 마치 새끼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수달이 눈 감고 앞발을 모으는 것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부모에게 제사 지내는 것일 리는 없다.
이런 마당에 과학철학자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언급한다고 해보자. 동양철학자가 할 수 있는 반응은 현대 과학의 성과를 조용히 수긍하거나 그건 과학의 영역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며 억지를 쓰는 것뿐이다. 전자로 가면 방송이 재미없게 되고, 후자로 가면 유익한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기획 단계의 결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증거는 오프닝 질문이다. 철학과 아무것도 상관없는 넌센스 질문 같은 것을 철학자들에게 질문하고, 철학자들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이 전체 영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진이 갈피를 못 잡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면 다 철학인 줄 알고 아무 질문이나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시리즈에는 패널이 최소 네 명인데 [철학을 보다] 시리즈에는 패널이 세 명인 것을 보면, 섭외 단계부터 매끄럽지 않았나 의심해 볼 만하다.
물론, 동양철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대화가 유익하고 매끄럽게 진행될 수도 있다. 동양철학자가 마치 유교 탈레반처럼 효도에 대한 강경하게 태도를 보이며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다가 긴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슬쩍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왜 유교에서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에요. 강조할 필요가 없어요. 효도는 절대로 본능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강조하는 거예요.”
이건 규장각에서 했던 어떤 특강에서 강연자가 실제로 했던 말이다. 그런데 유튜브 채널에 나가서 이길 수 없는 토론에서 긴장감을 쭉 끌어올리다가 이런 식으로 탁 풀어버리는 기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동양철학자 중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동양철학자 중 일부는 정말로 유교 탈레반이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토론을 할 수 없으니 이들은 제외한다면 가용 인원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화술이 뛰어나고 유교 탈레반이 아닌 정상적인 동양철학자를 모셔온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일반인 수준에서 논의할 만한 주제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의 방송 출연 모범 사례는 한양대 이상욱 선생님이 과학 유튜버 궤도와 함께 출연한 <14F> 채널의 [10분 토론]일 것이다. 해당 방송에서 토론한 주제는 빅 보스트롬의 시뮬레이션 가설이다. [10분 토론]에 궤도가 출연한 다른 방영분을 보면, 궤도는 광기 어린 눈빛을 보내며 딴 소리를 하고 상대방이 궤도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 논의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상욱 선생님의 경우는 방송 초반에 틀을 잡고 그 위에서 궤도가 뛰어놀게 하기 때문에 여전히 궤도가 광기 어린 눈빛을 희번덕거지만 방송이 매끄럽게 진행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철학자가 다른 분야의 패널들과 함께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할 경우, 그냥 유명인으로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출연한다고 한다면, 다른 패널들의 분야가 과학철학과 얼마나 밀접한지, 또는 과학철학과 밀접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접근가능한 분야인지 등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철학자로 한데 묶어서 아무 관련 없는 다른 분야의 철학자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보다는 관련된 과학이나 과학사 관련 종사자와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겠다.
* 링크: [14F] 우리는 후손들의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 (궤도X이상욱) / 10분 토론
( www.youtube.com/watch?v=8kOIkFtJLHQ )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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