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교양수업에서 과제물을 첨삭하고 있다. 설명문을 쓸 때는 나름대로 괜찮게 썼던 학생들인데 에세이를 쓰라고 했더니 죄다 자아분열 하는 글을 쓴다. 그런 글을 수십 편 읽다 보니 내 정신도 분열되는 것 같다.
과제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읽고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무임승차를 막는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를 토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논하는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이타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 교양서적이다. 상대방이 협조 전략(이타적인 행위)을 구사할 때 내가 배신 전략(이기적인 행위)을 취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라면, 배신 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만 남고 협조 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는 사라질 것인데, 자연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협조전략을 구사하는 종이 존재한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는 여섯 가지 가설(혈연선택 가설, 반복-상호성 가설, 유유상종 가설,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 의사소통 가설, 집단선택 가설)을 소개한다. 이 여섯 가설은 모두 이타적인 행위가 개체의 생존이나 유전자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기반하여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논한다면, 올바른 행위가 개체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된다고 결론내리기는 쉬워도 올바름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 책은 윤리학 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과 무관한 올바름 자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의 완성도를 고려한다면 생존과 무관하게 올바름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전략적으로 좋다. 그런데도 학생들 대부분은 어떻게든 ‘생존이나 이익과 무관하게,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본론 중반부까지는 책의 내용에 기반해서 글을 쓰니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 그딴 거 없다’는 식으로 글을 쓰다가, 자기 주장을 쓰는 부분에서는 느닷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글의 내용을 뒤집는다. 게임이론을 언급하던 글에서 갑자기 “인간의 양심”과 “올바른 가치관의 중요성”과 “맹자의 성선설”이 등장한다. 글 중간에 이런 대격변이 일어나니 글이 망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고등학생 때 전국 최상위권에 속했다. 대면 첨삭 때 맞춤법이나 어법을 지적하면 어떤 학생은 해맑게 웃으며 “아, 제가요 맞춤법을 잘 못해요. 수능 때도 이런 거 틀렸어요”라고 한다. 이 말은 수능에서 언어영역을 거의 다 맞고 맞춤법 문제 하나 틀렸다는 말이다. 이들이 추론 능력이나 이해 능력이 부족해서 글을 이렇게 쓰는 건 아니다.
담당 선생님이 수업에서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다.(선생님은 니체 전공자다.) 그러니 학생들이 억지로 결론을 끼워 맞추려다 글이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이 약아서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왜 그럴까? 학생들의 글쓰기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받았을 교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
10년 전 내가 들었던 학부 수업에서 어떤 철학과 선생님은 대학입시 논술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대학이 고전에서 일부분을 따와서 논술 문제를 출제하고 이를 두고 언론은 논술 문제의 난이도가 너무 높다고 비판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논술 시험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비판했다. 대학에서 논술을 채점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논술 문제를 잘 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은 인문계열 전공자를 채점자로 동원했다고 한다. 지원자만 수천 명이라 교수뿐만 아니라 강사와 대학원생까지 탈탈 털어서 채점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철학 전공자는 극소수고 대다수는 어문 계열 전공자인데, 그 선생님 말씀으로는 어문 계열 전공자들한테 채점을 시키면 논증을 따지는 게 아니라 문장이 예쁘고 내용이 익숙한 글에 좋은 점수를 주고, 논증을 멀쩡히 잘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결론을 내린 글에는 “논리가 비약되었음” 하고는 감점했다고 한다. 어문 계열 전공자에 대한 철학 전공자의 불신이 뿌리 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논술이 제대로 운용될 환경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글쓰기 평가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글쓰기 교육이 가능할 리 없다.
내가 학부 때 수강했던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어문 계열 교수는 학생들이 해온 과제물을 보고 글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면서 화를 냈고, 그 다음 시간에 학생들은 모두 교수의 구미에 맞게 글을 고쳐왔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와서야 그 교수가 잘못 가르쳤고 오히려 교수 지도 전의 과제물이 더 정상적인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교육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낫다는 보장도 없다. 논술 학원 강사 중 상당수는 대학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학부생이고 그들이 배운 것이라고 해봐야 대학 들어오기 전에 받은 사교육과 대학에서 받은 교양수업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받은 교양교육이란, 앞서 말했듯 멀쩡한 글을 매끄럽게나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에 도움이 되어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교사들이 방학 때 사범대 같은 데서 받는 글쓰기 지도 연수 같은 것도 앞서 언급했던 교수들이 하는 것이다. 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이 어떠한가와 별개로 교사들도 정상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음악 감상문에 “음악회가 별로였다”는 솔직한 감상을 쓰고 최하 점수를 받았다. 음악 교사에게 글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 평가는 내가 이후 글을 쓰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석차가 뒤바뀌는 경험을 해왔을 최상위권 학생이 내가 겪은 일을 겪는다면 (잃을 게 없는 나와 달리)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어쩌면 주위에서 나 같은 사람이 최하 점수를 받는 것을 보며 저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대학에 올 때까지 학생들은 글쓰기 교육을 거의 못 받거나, 받는다고 해도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매끄럽게나 쓰면 좋아하는 수준의 사람들에게 지도받는다. 그러니 사회통념에 맞지 않는 결론이 도출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면 첨삭 때 보면, 자기가 글을 제대로 썼는지, 이상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학부생들이 종종 있다. 다음 번 대면 첨삭 때 학생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 “글에서 꼭 착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조영남이나 마광수처럼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요”라고.
(201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