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2

117년 만의 11월 폭설



수요일에 눈이 왔다. 아직 11월인데 눈이 꽤 많이 온다 싶었는데 너무 많이 내려서 점심 때 음식을 배달시킬 수 없었다. 저널클럽 회식을 점심에 하기로 했는데 음식 배달이 안 되니 교내에서 먹기로 했다. 식당마다 재료가 소진되어 주문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눈이 많이 와서 음식 재료를 납품받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세 번째로 들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도록 눈이 그치지 않았다. 이후에도 눈이 계속 왔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그 다음 날 하는 수업이나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강의 나가는 학교에서도 문자가 왔다. 교칙에 폭설로 인한 휴강에 관련된 규정이 없으니 교수자 재량껏 휴강 여부를 판단하라는 것이었다. 교칙에 폭설 관련 규정이 있든 없든 그 다음 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숙사에 갔다. 눈이 와서 풍경이 예쁘게 변해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학교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날씨도 춥고 해야 할 일도 있어서 기숙사 근처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 밤새 내렸는지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는데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11월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것을 본 적도 없다. 117년 만에 11월 적설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살면서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것을 못 본 것 같다. 기숙사 근처를 둘러보았다. 죄다 눈이었다.

도로 쪽으로 나가보았는데 마을버스도 보이지 않고 셔틀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가서 눈을 치워야 하는데 집에 가기 어려워 보였다. 기숙사에서 지하철역으로 걸어 내려간다고 한들 어차피 버스로 갈아타야 집에 갈 수 있는데 눈 때문에 길이 한참 막힐 것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눈 구경이나 하기로 하고 학교를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계속 걷다 보니 건축학과에서 지었다고 하는 한옥이 나왔다. 한옥 근처에 폭포로 가는 길이 있다. 이런 날씨에는 폭포가 어떻게 보이나 궁금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발목보다 높이 눈이 쌓여있었다. 자세히 보면 아예 발자국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발자국 위로 눈이 한참이나 쌓인 흔적이 있었다. 분명히 그 전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폭포에 온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다녀간 뒤 처음 온 사람이 나였을 것이다. 그렇게 폭포로 가기는 했는데 사방이 죄다 눈이어서 그렇게 대단한 풍경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라 폭포 물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폭포에서 빠져나와 시계 방향으로 학교를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셔틀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짐을 챙겨 집에 가려고 셔틀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올 때 멀쩡했던 나무가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산책로 쪽으로 쓰려져 있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집에도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었다. 도로에서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내리막이라 어머니는 차를 다른 곳에 세워두고 조심해서 걸어오셨다고 한다. 눈이 양이 어마어마한 데다 물기까지 머금고 있어서 어머니가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설작업 때 쓰는 밀대로도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나는 삽으로 눈을 퍼낸 뒤 남은 눈을 밀대로 밀어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집에 오면서 걱정했던 것이 지붕 끝에 달린 챙이었다. 챙은 지붕에서 빗물을 모아 한쪽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인데, 눈이 많이 오면 눈의 무게 때문에 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전에는 눈이 녹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밀고 내려와서 지붕에 달린 챙이 휘어진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이미 챙이 휘어져 있었다. 여기서 눈이 살짝 녹아 위에 쌓는 눈이 아래로 흘러내리면 챙이 완전히 망가질 것이었다. 응급조치로 챙에 있는 눈을 밀대로 모두 퍼냈다. 챙에서 눈을 퍼내자 아직 탄성이 망하기 전이어서 원래 상태 비슷하게 돌아왔다.

문제는 창고 지붕에 달린 챙이었다. 창고 지붕의 높이는 4미터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는 이상 조치를 취하기 힘들었다. 토요일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일요일 점심 때쯤 되니까 그 전날보다 훨씬 많이 휘어있었다. 아래에 있는 눈은 그대로 쌓여있고 위에서 눈이 녹으며 밀고 내려오니 챙 쪽으로 하중이 쏠린 것이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고 지붕에 쌓인 눈도 치웠다. 지붕 위로는 올라갈 수 없어서 지붕 옆에 달라붙어서 삽으로 챙과 지붕에 쌓인 눈을 퍼냈다. 그렇게 눈을 퍼내니 창고 지붕의 챙도 원래 상태 비슷하게 돌아왔다.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눈을 치우는 데만 3-4일이 걸렸다.

(2024.12.02.)


2025/01/27

글쓰기 과제 첨삭의 무용함



내가 학부수업 강사 일을 하면서 글쓰기 수업 조교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글쓰기 수업을 맡은 대학원 선배가 개인적으로 아는 대학원생이 나 말고는 없어서(그 선배가 아는 다른 대학원생들은 모두 박사가 되거나 그만두었다), 의리상 글쓰기 수업 조교 일을 또 하게 되었다. 학교 규정상 같은 학교의 강사 일과 수업 조교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다른 학교의 강사 일은 해도 된다고 해서 강사와 조교를 병행하게 되었다.

학부 전공수업 강사 일과 글쓰기 조교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래도 대학원생에게 지원을 많이 하는 편이라는 것이다. 노동 시간당 단가로 따지면 강의하는 것보다 조교 업무할 때 받는 돈이 더 많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수업 조교 일은 아무리 봐도 무가치한 일인 것 같다는 것이다. 일거리 없는 대학원생에게 돈을 나누어 주려고 불필요한 노동을 시키는 것인가 싶을 정도다.

학교에서는 글쓰기 과제물에 첨삭을 좀 하면 학생들 글솜씨가 향상되는 줄 아는 모양인가 보다. 학교에서는 글쓰기 수업뿐 아니라 일반 교양수업에서도 일정 분량 이상의 첨삭을 수업조교에게 요구한다. 글쓰기 과제물에 첨삭을 하는 것이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으나, 그래서 개선 효과가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거의 없거나 있기는 있더라도 투입되는 노동량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첨삭은 이미 쓴 글에서 일정 부분을 고치라고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구조 자체가 망한 글을 가져오면 첨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글의 구조가 망했으면 일부분을 고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다시 쓰게 해야 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멍청해서 구조부터 망한 글을 써오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망한 글을 쓰게끔 하는 과제를 내주기 때문에 그에 부합하는 과제물을 가져오는 것뿐이다. 글쓰기 수업하는 선생님들이 미쳐서 그런 과제를 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 과제를 내주게끔 학교에서 프로그램을 이상하게 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제물에 첨삭 좀 해준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설계 결함이 있는 건물에 방수 페인트를 칠하면 어쩔 것이며 일반 페인트를 칠하면 어쩔 것인가?

첨삭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틀에 맞추어 쓴 글에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는 경우이다. 글쓰기 프로그램 기획하는 선생님들이 자기들이 학술지에 투고한 원고의 심사본 받을 때의 경험을 고려하여 글쓰기 수업에서의 첨삭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술지의 경우와 글쓰기 수업의 경우는 아예 다르다. 선생님들이 학술지에 투고하는 원고는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는 글이고, 글쓰기 수업의 과제물은 데스크 리젝(desk reject)되는 원고도 안 된다. 첨삭이 약발이 거의 안 받는 상황인데도 학교에서는 일정 분량 이상의 첨삭을 요구한다.

학생들에게 구조에 맞추어 글을 쓰게끔 프로그램만 짠다면 조교 없이 강사 혼자 수업을 진행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이 쓴 글의 문제점이야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굳이 한 편 한 편 첨삭할 필요 없이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표본 몇 개를 보여주며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고 어떤 것을 고치면 된다고 말하면 된다. 오히려 한 편씩 첨삭하는 것보다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효율적일 뿐 아니라 효과적일 수도 있다. 첨삭한 것이야 받고 안 보면 그만이지만,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면 억지로라도 듣게 될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이 추가로 질문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무 명 모아놓고 10분 동안 말하면 되는 일을 가지고 학교에서는 한 편당 15-20분씩 스무 명 어치 첨삭을 하라고 한다. 불쌍한 대학원생들에게 돈을 주려고 하면 그냥 주지, 왜 무가치한 노동을 시키고 돈을 주나? 차라리 글쓰기 수업 하나의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줄이고 수업 수를 두 배로 늘려 한 수업당 학생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수업 조교 시킬 대학원생들한테 글쓰기 수업을 시키는 게 지금보다는 더 낫겠다.

글쓰기 수업 전체 계획에 따르면, 강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학생들에게 연구도 안 할 연구계획서를 써오라고 하고, 논증도 할 수 없는 주제를 선택할 수밖에 해놓고 논증 에세이를 써오라고 하고, 발표도 안 할 건데 포스터 발표를 만들어오라고 하고, 그렇게 만들어온 것을 가지고 고만고만한 학생들끼리 몇 주씩이나 뭘 잘 했네 뭘 못 했네 하며 토론하게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 단행본이든, 논문이든, 학생들하고 몇 주씩 같이 읽으면서 구조를 분석하게 한 다음에 과제를 내주게 해야 한다. 서론은 어떻게 쓰네 본론은 어떻게 쓰네 하며 아무 감도 안 잡히는 수업이나 듣게 만든 다음, 할 수 없는 과제나 할 필요 없는 과제를 내주고 학생들끼리 몇 주씩 토론하게 만드는 것은, 학부생들 시간을 갖다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교들이 과제물 첨삭을 백날 해봐야 대학원생들의 아까운 노동력만 허비하게 될 뿐이다.

* 뱀발

달리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일정 분량 이상의 첨삭을 요구하는 것이 정말로 첨삭에 교육 효과가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강사들을 못 믿어서 일종의 증거 자료로 과제물 첨삭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2024.11.27.)


2025/01/21

학교의 주인은 학생인가



내 집의 주인은 나인가? 그렇다. 내 명의로 된 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을 팔 수도 있고 이 집으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나의 어머니는 이 집의 주인인가?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대충 이 집의 주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머니는 나와 가족관계를 유지하며 같은 집에 산다. 어머니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엄마가 이 집 주인이 아니고 집 주인인 나의 동거인일 뿐이지”라고 말한다면, 법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불효자 새끼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법적으로는 내 집의 주인이지만 나의 소유권만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트럼프가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된 이후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는데, 내가 정신이 살짝 돌아서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비트코인을 사려고 한다고 해보자. 내 집인데 내 돈으로 투자도 못 하나? 그러면 안 된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면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때 어머니는 이 집이 나 혼자만의 집이 아니며 어머니도 집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보자. 법적으로는 틀린 말이지만 그렇게 이상한 말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이 집의 주인이 아님을 확인받는 상황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어머니가 미쳐서 집을 팔아 허경영한테 돈을 갖다 바치려 한다고 해보자. 다행히 나는 제 정신이라 이를 반대했는데, 어머니가 살짝 미친 게 아니고 단단히 미쳐서 등기권리증 등 주요 문서를 탈취하고 사문서를 위조하려다 나한테 걸렸다고 해보자. 어머니는 이 집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음을 확인받고 쫓겨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본다면, 이 집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때, 해당 발언이 정당화되는 일종의 맥락이나 층위가 있는 것 같다. 어떤 것이 법적으로 A의 소유가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해당 물건에 대한 B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지지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회적 지지가 작동하게 하는 B의 행동 범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B가 그 범위를 넘어선 행동을 하게 되면 그러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거나 무력해진다.

여기서 질문을 약간 바꾸어 보자. 학교는 학생들의 것인가? 법적으로 사립학교는 재단의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이 먹히는 맥락들이 있다. 이사장이 학교 재산을 빼돌리려다 걸린다든지, 등록금은 더럽게 많이 받아먹는데 교육은 개똥같이 한다든지, 학생이 학교에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은 법적으로는 틀렸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며 정당화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회적인 지지를 받아 학내에서 시위를 하든 건물을 점거하든 무언가를 할 때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 법적으로 학교의 주인이 재단임을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법적 층위가 드러나면 사회적 지지든 뭐든 모든 게 무력해진다. 이런 것도 일종의 기술이라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시위나 운동에서도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덕여대 사태를 보자. 동덕여대 학생들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며 염병들을 떨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교의 주인은 재단임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다. 학교 재단이 재물손괴로 학생들을 형사고발하고 이후 원상복구와 관련된 민사소송이 진행된다고 해보자.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학생인가? 아니다. 내가 내 것의 가치를 손상시켰다면 누가 나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는가?

동덕여대 학생들은 굳이 말을 안 해도 모두가 아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보여주었다. 멍청하고 근본 없는 것들의 분별없는 난동은 언제나 해로울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2024.11.21.)


내가 철학 수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

대학원 다니면서 들은 학부 수업에서 몇몇 선생님들은 수업 중간에 농담으로 반-직관적인 언어유희를 하곤 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언어철학> 수업을 하면서 그런 식의 농담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나부터 그런 반-직관적인 언어유희에 재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