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5

19대 대선 홍준표 득표율 24.0%의 의미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최종 득표율은 문재인(민주당) 41.1%, 홍준표(자유한국당) 24.0%, 안철수(국민의당) 21.4%, 유승민(바른정당) 6.8%, 심상정(정의당) 6.2%이다.

수십만 명이 촛불을 들고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 실세들이 구속되는 난리통에도 투표자의 4분의 1은 홍준표를 찍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박근혜 탄핵을 반대한 사람이 그 정도는 되었으니 그들이 홍준표를 찍었을 것이다. 고정 지지자들의 표가 갈 곳을 간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홍준표를 찍은 사람이 24%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한국사회가 좋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987년과 2016년을 비교해보자. 6월 항쟁이 나고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했는데 노태우가 36.7%를 받았다. 그 때 김종필이 8.1%를 받았으니 김종필이 출마하지 않았다면 노태우의 득표율이 40%를 넘겼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홍준표의 득표율은 24.0%이며 유승민이 받은 표를 합쳐봐야 30% 남짓이다. 한 세대 동안 10% 가량 줄어든 셈이다.

혁명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에게 한 세대 동안 10% 변한 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혁명 정부를 세울 것도 아니고, 좋든 싫든 대의 민주제에 따라 결국은 선거해서 대표자 뽑을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10% 변했다는 것은 꽤 큰 변화다. 10%면 정치 지형이 바뀐다.

1997년에는 김대중-김종필 단일화하고 이인제가 신한국당 탈당해서 난리치고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이 터지고 대통령 선거 직전에 IMF 구제금융 받았는데도 김대중이 40.3%를 받고 이회창이 38.7%를 받아 가까스로 김대중이 이겼다. 2002년에는 노무현이 정몽준하고 단일화했다가 깨지고 별 난리를 거쳐서 48.9%를 얻었다. 그 때도 이회창과의 차이는 2%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둘로 쪼개지고 5자 구도로 선거가 진행되었는데도 민주당이 단일화 같은 거 안 하고도 안정적으로 41.1%를 받았다.

정의당이 6.2%나 얻은 것도 큰 성과다. 최근 30년 동안 진보 정당이 그렇게 많은 표를 받은 적이 없다. 1997년에 국민승리21의 권영길은 이회창-김대중-이인제가 하는 토론회에 끼지도 못하고 군소후보 토론회에 나왔다. 그 때는 권영길이 허경영과 같은 급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진보 정당을 그 정도로 의식한 것도 내 기억으로는 이번 선거가 처음이다. 이번 선거에서 막판에 민주당 우상호 공동선대위원장이 이상한 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진보 정당의 득표율을 의식했음을 보여준다.

달라진 정치 지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홍준표다. 홍준표가 막말을 많이 했다고 논란이 되었지만, 예전 선거와 비교한다면 귀여운 수준이다. 부끄러워서 지지한다고 하지도 못하고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이 홍준표의 막말이다. 더 이상 박근혜처럼 방긋 웃으면서 옛날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도 통하지 않고 우리가 남이냐는 지역 감정도 안 통한다(물론 주요 대선 후보 다섯 명 중 두 명이 대구 경북 출신이고 두 명이 부산 경남 출신인 이유도 있겠지만). 홍준표가 토론회에서 동성애를 언급했다는 것은 북풍이나 사상 검증 같은 기존 재료가 건 더 이상 안 통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정치 성향은 잘 안 바뀌지만 사람은 언젠가 어떻게든 죽는다. 아무리 조직이 촘촘해도 재생산되지 않는 조직은 결국 없어진다. 자유한국당이 20대와 30대 지지층을 넓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당장 망하지는 않겠지만 현상 유지하기도 힘들 것이고, 결국 민주당은 인적 자원을 포함한 자원을 자유한국당보다 더 많이 점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두 당이 엎치락뒤치락하더라도 결국 자유한국당은 자민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는 홍준표를 찍은 사람이 24%밖에 안 된다는 것이 희망적인 징표라고 본다.

(2017.05.15.)


2017/07/14

주위에서 말려야 할 지식인의 사회 참여



지식인이 자기 능력을 사회를 위해 쓰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지식인이 자기 전공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일에 아무 말이나 하면서 의사 결정 과정을 왜곡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회 참여인 것처럼 칭송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식인에게도 해롭고 그 사람이 속한 조직에도 해롭고 사회에도 해로운 일이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자기 분야에서나 지식인이지 다른 분야에서는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는 경우도 많다. 사회 문제가 한두 가지도 아니고 또 그런 문제가 한두 분야에 걸친 것도 아닌데, 특정 분야의 전문가랍시고 온갖 문제에 다 참견하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자기 의견을 표명하는 것과 달리 지식인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꽤나 존중받는다.


자신의 전문 분야 관련하여 자문을 한다든지, 후원금을 낸다든지, 지지를 표명한다든지, 의혹 규명 등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권장할만하다. 예를 들어, 경제학과 교수가 경제 관료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고 말도 된다. 그들은 자기 분야의 일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벌이는, 빗나간 사회 참여다. 특히나 해로운 건 인문대 교수들의 사회 참여다. 훌륭한 인문대 선생님들은 어디선가 연구를 열심히 하든지, 교육을 열심히 하든지, 행정을 충실히 보든지, 셋 다 잘 하든지 하는데, 꼭 학부생들 앞에서 트랜스휴먼 같은 쌈싸먹는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대외 활동은 또 활발히 해서 인문학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여러 곳에 해를 끼친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부분 틀린 소리이거나 틀려먹은 소리다.


과학기술학 수업을 듣느라 재난 관련 자료를 찾다가 문학 전공자들이 재난에 대해 써놓은 글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박사나 교수들이 쓴 것이었는데 죄다 한심한 내용뿐이었다. 문학에 등장하는 재난의 성격을 분석한 것이었다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그들이 쓴 것은 재난 자체의 성격을 분석한 글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분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신문을 가끔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에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가 나쁘다”를 덧붙여놓은 정도의 글이었다. 학부생도 박사와 교수가 그러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이었다면 그 당시 하도 슬퍼서 그랬나보다 하겠는데, 그건 2012년 글이었다. 자본주의의 위기, 현대 문명의 위기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감수성이 독특하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래서 해당 사안에 대하여 그들에게 쥐뿔이나 무슨 전문성이 있는가?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것 말고 일반인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적어도 해당 글에서는 그러한 전문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지식인의 사회 참여는 일종의 지표가 될 수 있다. 교수가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는 건 곧 하락장이 도래할 것임을 보여주는 징조이듯이, 교수들이 들고 일어섰다는 건 그 사회가 상당히 안 좋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교수들의 시국 선언을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정권이 막장이며 곧 관 뚜껑 닫는다는 것이다. 딱 그 정도일 뿐이다. 그런 비상시국이 아닌 이상, 각자 자기 전문 분야의 일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사회 참여적 지식인에 대한 환상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지식인이 상아탑에 갇혀 있는 것이 당연하며 오히려 그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자기 분야도 아니고 막장 상황도 아닌데 어설프게 참여하려고 하는 지식인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려야 한다. “교수님, 지식인은 상아탑에 있어야죠. 상아탑 밖은 위험합니다. 이불 밖보다 훨씬 위험해요”라고 하면서 만류해야 한다.



* 링크(1): [중앙일보] “사과할 때까지 文 저주” 정의당 관계자, ‘강간당한 여성’ 비유 논란

www.joongang.co.kr/article/21564668 )


* 링크(2): [전자신문] 이광수 위원장 ‘사과할 때까지 문재인 저주 15편’...“임기 5년 10000개 올릴 것”

www.etnews.com/20170512000082 )



(2017.05.14.)


2017/07/13

[과학사] Gere (2011), “Nature’s Experiment: Epilepsy, Localization of Brain Function and the Emergence of the Cerebral Subject” 요약 정리 (미완성)

     

[ Cathy Gere (2011), “Nature’s Experiment: Epilepsy, Localization of Brain Function and the Emergence of the Cerebral Subject,” in Francisco Ortega and Fernando Vidal (eds.)(2011), Neurocultures: Glimpses into an Expanding Universe (Frankfurt: Peter Lang), pp. 235-47. ]

  

  

  1. Introduction

  2. Localization Theory From Anatomy to Physiology

  3. Nature’s experiment

  4. Psychical Seizures

  5. Electrical control of the mind

  6. Thought Experiments

  7. Conclusion




  1. Introduction


235

이 장은 실험실과 병원실에서 전개된 뇌적 주체(cerebral subject)와 간질 연구의 역사적 계보를 제안할 것.

여기서는 iconic manifestation을 다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분석철학의 사고실험에 나타난 뇌적 주체의 모습.

기어는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합리적인 논증의 연습문제일 뿐 아니라 실제 인간에 관한 실험의 오랜 역사에 영감을 받은 것임을 제안하고자 함.

철학과의 뇌적 주체는 뇌 기능의 국소화에 대한 한 세기 동안의 탐구, 특히 간질을 앓는 인간 주체에 관한 탐구의 결과물

20세기 중반, 이러한 탐구 전통은 놀랍지만 종종 확대해석된 결과들에 도달함.

철학자들은 이러한 과장된 해석들을 포착하고 그러한 해석을 동일성과 의미에 관한 일련의 질문을 하는 데 동원함.



  2. Localization Theory From Anatomy to Physiology


237

뇌 기능에 관한 국소화는 골상학에 기원을 둠.

프리츠 조셉 갈(Franz Josef Gall)


237

외과의사이자 인류학자인 피에르 폴 브로카(Pierre Paul Broca



  3. Nature’s experiment


238

같은 해 레보그네(Monsieur Leborgne)의 뇌가 적출되고, 영국 외과의사인 존 헐링스 잭슨 (John Hughlings Jackson)이 간질과 뇌의 국소화에 연결을 윤곽짓기 시작함.


239

1870년, 잭슨의 『경련에 대한 연구』(Study of Convulsions)가 등장하는 해에 

외과의사인 에두아르트 히칙(Eduard Hitzig)과 인류학자인 구스타프 프리트쉬(Gustav Fritsch)는 간질 발작에에서 비정상적인 cerebral discharge에 대한 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실험 결과를 발표함.




  4. Psychical Seizures


240

데이비드 페리어(David Ferrier)


240-241

살아있는 사람의 뇌에 전기자극실험


240-241

독일 신경외과의 페도르 크라우스(Fedor Krause)


241

캐나다 뇌과학자 윌더 펜필드(Wilder Penfield)




  5. Electrical control of the mind


242

호세 델가도(José Delgado)는 1915년 남부 스페인에서 태어남.


243

펜필드

비-물질적 영혼의 활동에 관한 이원론자

델가도

물리주의적 일원론


243-244

펜필드처럼 델가도는 그의 결과를 과대해석했다는 혐의가 있음.




  6. Thought Experiments


244

1970년대 중반까지, 분석철학은 펜필드와 델가도의 작업을 둘러싼 선전이 제기한 철학적 난제를 즐기기 시작함.

사고실험에서 뇌적 주체(cerebral subject)는 주요 주인공


244

뇌적 주체의 환상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주요한 철학적 퍼즐

외부 세계의 지식에 관한 의심과 개인의 동일성에 관한 질문

전자는 “통 속의 뇌” 사고실험


245

개인의 동일성

대니얼 데닛


245

로버트 노직

“Knowledge and Skepticism”(1981)

1. 두뇌 복제

2. 두뇌 이식

3. 두뇌 전이(transferal)

4. “완전한 심리적인 유사성”을 가진 뇌 절반을 이식

5. “완전한 심리적인 연속성”을 가진 뇌 절반을 제거

6. 4와 5를 결합하여 완전히 다른 두 몸에 뇌 절반씩 이식

7. 


245-246

기어는 이러한 예들이 뇌적 주체들이 펜필드와 델가도의 작업에 대한 과장된 반응으로 분석철학에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데 충분하다고 봄.

철학적 뇌의 손쉬운 환원주의는 신경학자들과 경험적으로 공유하지 않은 것.

...

환원주의에 관한 델가도와 펜필드의 급진적 평판은 철학자들의 사고실험에 의해 속는 사람들에 대한 신사적인 교정으로 역할을 함.




  7. Conclusion



 



(2021.02.09.)

    

2017/07/12

봉당을 쓸든 말든 신경 안 쓰는 화천이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현관 앞 봉당을 쓸려고 하면, 다른 고양이들은 어머니가 빗자루만 손에 쥐어도 죄다 비키는데, 화천이는 안 비키고 가만히 누워있다. 화천이를 불러도 안 비키고 빗자루로 화천이 주변을 쓸어도 안 비킨다. 어머니는 화천이를 안아서 다른 곳에 옮겨놓고 청소를 마저 한다.





(2017.05.12.)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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