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8

육감도 제1호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작성해놓고 잊고 있던 워드파일을 발견했다. 석사 논문 심사 몇 주 전에 쓴 글이다. 글을 다시 읽어보니 그 당시 내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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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감도 제1호

제1의 심사위원이 이상하다 그러오.

제2의 심사위원이 이상하다 그러오.

제3의 심사위원이 이상하다 그러오.

3인의 이상해하는 심사위원과 그렇게 뿐이 모였소.

그중에 1인의 심사위원이 이상한 심사위원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심사위원이 이상한 심사위원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심사위원이 이상해하는 심사위원이라도 좋소.

그중에 1인의 심사위원이 이상해하는 심사위원이라도 좋소.

(논문은 추후 발전가능한 논의가 아니어도 적당하오.)

3인의 심사위원이 심사장 밖 복도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2016.11.18.)


2017/01/17

동양철학 뻥쟁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 EBS 보니까 앞으로 철학이 뜬다더라. 내가 잘 모르지만 아들이 철학 전공하니까 채널 돌리다가 조금 봤다.” 무슨 프로그램이었을까. 어머니는 잠들기 직전에 본 거라서 무슨 프로그램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무엇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도대체 어떤 뻥쟁이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서 EBS 편성표를 찾아보았다. 마침 동양철학 뻥쟁이와 뇌 과학 뻥쟁이가 인류 문명의 향방을 놓고 만담을 벌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두 뻥쟁이는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을 앞서기 시작한 계기가 산업 혁명이라면서 산업 혁명의 원인을 놓고 뻥을 쳤다. 관련 연구가 수없이 많을 텐데 동양철학 뻥쟁이는 그런 연구를 다 무시하고 “더 좋은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산업 혁명을 이끌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여간 뻥쟁이들은 대담하다. 그러면 동아시아에서는 잘 먹고 잘 살 욕심이 없어서 산업 혁명이 안 일어났나? 그러면 명청대의 은화 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두 뻥쟁이는 정화의 원정대와 콜럼버스의 원정대를 놓고 비교하며 동양 문명의 특징과 서양 문명의 특징을 논했는데, 동양철학 뻥쟁이는 이것도 죄다 욕망으로 설명했다. 하여간 뻥쟁이들은 세상을 참 쉽게 산다.

나는 동양철학 전공자 대부분이 자기 공부 열심히 하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서양철학 전공자 중 뻥쟁이의 비율보다 동양철학 전공자 중 뻥쟁이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 같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학부 때 본 동양철학 교수 중에도 “공자는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한국인이니 공자는 한국인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고 플라톤 철학은 이데아가 핵심인데 이데아 같은 건 없으니까 서양 철학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고,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면서 논문에다 밑도 끝도 없이 나선 모양을 그려 넣은 사람도 있었다. 이 정도면 공부나 전문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정신건강의 문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교수들만 그랬으면 또 모르겠는데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학부생들까지도 그런 소리를 듣고 헬렐레하는 판이라서,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대학원은 반드시 서양철학으로, 그리고 다른 학교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학회에서 어떤 동양철학 교수가 “그런데 동양에는 과학이 없었잖아요?”라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교수가 쓴 책이 15년 전쯤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는데 그 당시 방송에 나와서도 그 교수는 동양에는 과학이 없었다고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문제는 그 학회에 동양과학사 전공자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양에 과학이 없었으면 동양과학사 전공자들은 뭐가 되나? 그건 신학자들 앞에서 “그런데 신은 없잖아요”라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양과학사 전공자들은 동양철학 교수의 그러한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16.11.17.)


2017/01/16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빗소리>



대학원 와서 신기한 것을 많이 보았다. 그 중 하나가 <빗소리>다. <빗소리>는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학부생들이 만든 단체다. 어쩌다 <빗소리>의 주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나는 주동자한테 슬쩍 물어보았다.

- 나: “좋은 일 하시네요. 그런데 어디 소속이세요?”

- 주동자: “아, 저 철학과 소속이에요.”

- 나: “철학과인 건 아는데요, 그런 소속 말고 진짜 소속이 있을 거 아니에요?”

- 주동자: “철학과 맞는데.”

- 나: “에이, 다 알면서 왜 그러실까. 어디 소문 안 낼 테니까 말해 봐요. 나도 이 학교에 뭐가 있는지는 대충 알아요.”

주동자는 <빗소리>를 만든 경위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누군가 학교 커뮤니티에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에 관한 글을 올렸고 사람들이 여기에 반응해서 단체를 만들게 되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치즈와 구더기』 같은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 중에서 좋은 건 우라늄 농축 같아서 역량을 쏟아도 잘 되기 힘들다. 어느 학교 어느 학생회 망했다더라, 어느 동아리 망했다더라, 어느 단체 없어졌다더라 하는 일은 숱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 중에 나쁜 건 생물 농축 같아서 밥 잘 먹고 잠만 잘 자도 알아서 척척 진행된다. 신입생들 오리엔테이션 한다고 애들을 모아놓으면 선배라는 놈들이 과 전통이라고 하면서 성희롱을 하지 않나, 학내 노동자들이 시위하면 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들어서 학습권을 침해하냐고 항의하지 않나, 학내 노동자들이 월급 더 받으면 우리가 등록금 더 내야 한다면서 천막 농성장 가서 깽판치지 않나, 하여간 온갖 꼴 보기 싫은 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한다. 그러니, 학교 커뮤니티에서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연 발생적으로 이런 단체를 생겼다는 이야기는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 혼돈 속에서 신과 인간이 생기고 자연이 질서 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신비로운 이야기다. 뼈대 있고 족보 있는 단체도 망해 자빠지는 판인데 어느 운동 단체에도 소속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단체를 만든다니 말이 되나?

그러던 중 학교 곳곳에 붙은 <빗소리> 간담회 현수막을 보고 일말의 의심을 풀었다. 특정 정파에 소속된 사람들이 만든 현수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산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단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이렇게 신기한 일이 종종 일어났으면 좋겠다.





(2016.11.16.)


2017/01/15

100만 명이 모여 고작 평화시위 했다고 실망하는 사람들



11월 12일 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였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시위가 박근혜 정권에 무슨 타격을 주겠느냐며 폭력/비폭력 구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깜깜한 소리다.

나도 그 날 광화문에 있었다. 언론에서는 100만 명이나 모인다고 하고 내 주변에서도 정치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까지 집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판이었다. 그렇다면 학부 때 나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죄다 광화문으로 나올 것 아닌가? 나는 광화문에서 유사-동문회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경솔한 생각이었다.

후배들과 광화문역 5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광화문역에 내렸는데 승강장에서 어떤 사람이 “5번 출구가 막혀 있으니 8번 출구로 나갑시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경찰이 5번 출구를 막은 줄 알고 8번 출구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안전 등의 이유로 5번 출구를 막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내리는 사람이 많아 5번 출구가 막힌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1번 출구로 나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사람들과 뒤엉켰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려는 사람,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는 사람, 그냥 인도에 멀거니 서 있는 사람 등이 뒤엉켰다. 하도 사람들하고 비벼져서 마치 비빔밥의 밥알이 된 것 같았다. 지나가게 비키라는 사람, 좌우로 길을 트라는 사람, 밀지 말라는 사람들이 서로 아우성쳤다. 출퇴근 지하철이 지옥철이라면 이건 그냥 지옥이었다. 나는 후회했다. ‘그냥 연말에 만나자고 할 걸 나는 왜 굳이 여기서 보자고 해서 지옥체험을 하나’ 하고.

발 디딜 틈 없이 모인 사람들 사이에 끼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전경들이 들이닥치면 나는 꼼짝 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최 측은 사람들이 다닐 통로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들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뒤엉켰고 차도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옆 사람과 거의 들러붙어 있었다. 인원을 운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세종로 쪽은 양옆이 건물로 막혀 있고 길목이 좁다. 경찰 입장에서 방어에 유리하고 적은 인원만 동원해도 많은 인원을 포위할 수 있는 지형이다. 고대 전투에서 전투 중 한 쪽이 학살당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다. 게다가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상당수는 나이가 많거나 어려서 물리적인 충돌에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시위 말고 다른 것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같은 상황에 폭력/비폭력 구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집회에서 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에서 폭력/비폭력 구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그딴 소리나 하는 것이다. 시위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시위대가 어디로 가려는 것을 전경이 막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며, 어쩌다 보니 피를 보는 것이다. 폭력/비폭력 구분에 연연하지 않으면 뭘 어쩔 것인가? 도대체 뭘 하고 싶다는 것인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놈들이 어디서 낭만에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뿐이다. 물리적인 충돌을 하면 시위대가 훨씬 많이 다친다. 전경들은 젊고 운동도 하고 훈련도 받고 보호 장구에 진압 장비까지 갖추지만 시위대는 그냥 맨 몸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왜 100만 명씩이나 모였는가? 혁명 정부를 세우려고? 아니다. 그들은 박근혜-최순실을 부정하는 것이지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100만 명이 모여서 촛불 들면 된 것 아닌가? 의회가 해산된 것도 아니고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뭔가 비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아쉽다는 사람들이 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난장판 벌이는 것이 시민들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단일 세력이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10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서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집회를 연다는 것이 그 사회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 집회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설사 물리적인 충돌이 다소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박근혜가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를 부당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그때 가봐서 판단할 일이다. 지금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100만 명이 모인 집회가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끝났음을 폄하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100만 명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만으로 집회의 의미는 충분하다.

100만 명이나 모여서 고작 촛불이나 들었다며 실망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혁명을 다룬 영화나 소설에 심취해서 그런 것인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같은 것이나 떠올린 것인가, 아니면 <레 미제라블> 같은 것을 보고 그러는 것인가? 그런 영화나 소설을 감상하는 것은 좋은 취미일 수 있겠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판단 능력을 가진 성인이라면 현실과 작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이 주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매혹적일 수는 있겠으나, 또 그런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매력적일 수는 있겠으나, 그게 그러한 낭만은 작품 속에서나 등장한 것일 뿐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고상한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거리에 나오지 말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골방 같은 데 모여 심각한 표정 지으면서 시국 걱정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도 좋다. 군중들이 모였을 때의 흥분을 느끼고 싶다면 굳이 시위에 나오지 말고 락 페스티벌에 가는 것을 권한다.

시위대와 전경이 맞붙어서 대치할 때 시위대 뒤편에서 전경들에게 욕을 하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꼭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다. 뒤에서 돌을 던지면 시위대 앞쪽에 있는 사람들이 다친다. 뒤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서 다치는 것이 아니라 전경들과 충돌해서 다치는 것이다. 전경 방패에 몸을 맞댈 때의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성격이 불같아도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 뱀발: 광화문에서 이승환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신해철이 살아있었으면 저기서 노래를 불렀을 텐데’ 하고.

* 링크: [경향신문] 폭력・비폭력・반폭력 / 지금 SNS에선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132121015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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