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번역 사업을 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학문을 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면서, 한국도 일본처럼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건 의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 한국은 일본처럼 할 수 없었나?
번역 사업을 하려면 번역 인력이 있어야 한다. 외국어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를 잘 알면서 외국어를 잘 해야 한다. 번역에는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기 연구를 미루어두고 번역에 시간을 전념할 수 없다. 연구자 수가 많으면 번역에 전념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번역해도 되니까 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는데, 한국에서는 어떤 분야든 연구자 수가 충분하지 않다.
연구자 수는 경제 규모와 인구 규모에 비례한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해서 고구려 역사가 쟁점이 되었을 때, 중국은 고구려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100명이 넘는데 한국은 다섯 명 밖에 안 된다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보다 인구가 25배 정도 많기 때문에 그 정도 연구 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사학 전공자가 고구려사에 몰리면 다른 분야가 구멍 난다.
일본은 18세기 초반에 이미 인구가 3천만 명이 넘었다. 한국은 20세기가 들어서야 인구가 3천만 명이 넘어서는데, 김구 선생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고 할 때의 그 3천만은 남북한 합쳤을 때의 숫자다. 한국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인구가 3천만 명이 되는데, 분단되어서 그게 반 토막이 난다. 이후로도 반세기 동안은 번역 사업 같은 것을 할 여건이 못 되었고, 지금도 연구자는 모자라다. 정부에서 돈을 아낌없이 지원한다고 해도 연구자가 모자라서 단기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듣기로, 일본에서는 웬만한 외국 서적은 1년 이내에 일본어로 번역된다고 하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연구자들이 1년 내내 번역만 해도 일본처럼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연구를 안 할 수 없으니 그냥 원어로 봐야 한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길이 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상황이 이러니, 모국어로 학문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통일한다고 해도 북한이 워낙 상태가 메롱이라 한 세대 안에 뭔가 뾰족한 수가 안 나올 것이다. 당분간은 연구자가 이중 언어 사용자 비슷하게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영어를 아직도 심각하게 못 하는 나는 그냥 가슴이 답답하다.
* 링크: [한국일보] 우리말로 학문하기 / 서화숙
( www.hankookilbo.com/v/196508af110047d99e9d600dea9ef2df )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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