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8

고량주를 마시고 정신을 잃다



지난 주말에 중국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날 간 중국 음식점은 짜장면, 짬뽕 나오는 한국식 중국 음식점이 아니고 중국 사람이 먹는 음식과 비슷한 음식이 나오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양고기 샤브샤브와 양념에 볶은 양고기를 안주로 먹었다.

처음에는 양념이 매우 강하다고 느꼈는데, 술을 마실수록 양고기 양념이 약해지더니 나중에는 마치 집에서 먹는 돼지고기 볶음의 양념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동아리 후배와 비슷한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양념이 너무 강해서 나온 음식의 반도 못 먹었다. 왜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을까? 내가 그동안 중국 음식에 익숙해져서? 중국식 중국 음식을 거의 안 먹었기 때문에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후배와 먹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이번에는 고량주를 마셔서 그랬던 것 같다.

양고기를 먹으면서 나는 중국 음식의 향과 기름기 등이 중국 술의 도수와 상관관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가설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추우니까 도수가 높은 술을 먹는다고 치더라도, 중국은 상해만 가도 여름에 더워서 죽을 판이니 날씨 때문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는 건 아닐 거고, 음식과 관계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양념이 강하니 도수가 높아져야 하고 도수가 높아지니 양념이 강해져야 하는, 일종의 오디오쟁이가 거덜 나는 패턴과 동일한 패턴이 중국 음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 오디오쟁이 망하는 패턴: 오디오를 산다 → 더 좋은 스피커를 산다 → 출력이 약해 출력을 높인다 → 스피커가 약해 스피커를 높인다 → 출력이 약해 출력을 높인다 → 스피커가 약해 스피커를 높인다 → ... → 파산)

그런데 나는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음식 맛을 다르게 느끼는 것은 맛이 갈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 사람이 고량주 네 병을 나눠 마시고 있었던 그때, 나는 이미 맛이 가고 있었다.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사와 대학 동기 자취방에 갔다. <무한도전>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퍼먹다가 중간에 내가 정신을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는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방바닥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학 동기에게 말했다. “<수호지> 보면 술집에서 심심하면 술에 약 타잖냐. 그거 약 탄 거 아니고 그냥 과음한 거다. 보면 주인공들이 ‘어...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안 움직이네.. 어...’ 이러잖냐. 멀쩡하긴 뭘 멀쩡해. 술 먹고 맛 가는 놈들이 다 그렇지. 나는 어제 그런 체험을 했다.”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너 아직 술이 안 깬 것 같은데?”

중국에 증류주가 소개된 것은 원나라 때라고 알려져 있다. 몽골군이 중동에서 증류법을 배워왔고 거기서 지금 동아시아 증류주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수호지』의 배경은 송나라 때지만 저작 시기는 원말 명초이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의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중에는 증류주 먹고 맛이 가는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발효주를 먹고 맛이 가는 것과 증류주를 먹고 맛이 가는 것은 다른 경험이며 이게 소설에 반영되었을지 모른다. 일어나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동기의 말대로 내가 술이 덜 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기 집에서 나와 곧바로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했고 기도하며 회개했고 새 사람이 되었다. 새 사람이 되었으니 연말에 또 술을 마실 것이다. 원래 새 술은 새 사람이 먹는 법이다.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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