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쓴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에 관하여 쓴 서평에 따르면, 빌 게이츠는 상속세를 지지하는 등 피케티의 전반적인 논조에는 동의하지만 불평등에 관하여 피케티와는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피케티의 해법이 자본에 누진세를 물리는 것이라면, 빌 게이츠의 해법은 소비에 누진세를 물리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세 가지 유형의 부자를 가정한다. 첫 번째 유형은 자기 사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부자이고,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의 부를 자선 사업에 쓰는 부자이며, 세 번째 유형은 사치품을 사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데 부를 쓰는 부자이다. 빌 게이츠는 세 번째 유형의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매기는 것이 올바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아닌 소비에 누진세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빌 게이츠는 “피케티의 r>g 분석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부의 축적을 저지하는 강력한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미국에서 구세대 상속 부자는 사회적 불안정, 인플레이션, 세금, 기부, 지출 등의 이유로 사라진 지 오래”라고 지적한다. 정말 그러한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빌 게이츠 말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부의 불평등은 세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벤처기업을 세웠다고 하자. 그 사람의 재능과 노력과 운의 결과로 그 기업이 대기업이 되고 창업자인 그가 세계적인 갑부가 된다면, 그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은 부의 불평등의 문제와 상관없을까? 그 사람이 거부가 된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생산성이 월등해서가 아니라 그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은 엄연히 구분된다.
그 회사는 수많은 프로그래머를 고용할 것이다. 벤처기업에서 대기업이 되었기 때문에 창업자는 더 이상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된다. 경영하는 것도 귀찮아서 본인이 경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최고경영자로 고용할 수도 있다. 그 회사에 고용된 프로그래머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프로그래밍하는 노동량은 어쩌면 창업자의 노동량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지만 그 프로그래머의 소득은 창업자의 소득과 비교도 안 되게 적을 것이다. 두 사람의 소득을 좌우하는 것은 노동량이 아니라 주식 보유 여부다.
결국, 부의 세습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이나 당대에서의 부의 불평등이나 불평등의 양태는 같다. 당대에서의 부의 불평등이 부의 세습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만큼이나 문제라면 피케티의 r(평균 자본 수익률)>g(경제 성장률)는 적어도 빌 게이츠의 문제제기로는 타격을 입지 않는다.
빌 게이츠는 자본에 세금을 물리는 것보다 소비에 세금을 물리는 것을 선호하는데, 여기에 적어도 네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빌 게이츠가 지적한 대로 소비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소비에 누진세를 매긴다면 물품마다 일정한 세율로 세금을 매기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누진세를 매길 수 있는가? 둘째, 어떠한 소비가 사치인지 그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 부동산 투기에 성공한 졸부가 미술작품을 구입한다고 해보자. 그런 행위가 간송 전형필이 미술작품을 구입한 것은 다른 행위라고 구분할 기준이 있는가? 셋째, 소비와 투자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골동품을 사들이는 것은 소비인가 투자인가? 넷째, 소비에 대한 누진세의 경우 얼마든지 탈세가 가능하다. 갑부가 유령회사를 세워놓고 그 회사 명의로 방탕하게 소비한다면 이 경우 어떻게 세금을 매길 것인가?
빌 게이츠는 자선 활동은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문제점이 있다. 자선은 미덕이고 세금은 의무이다. 자선은 안 해도 그만이다. 부자가 자선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부자의 선호에 따라 더 나은 사회가 될지 말지가 결정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 링크: [뉴스페퍼민트] 빌 게이츠가 직접 쓴 <21세기 자본> 서평 [전문]
( https://newspeppermint.com/2014/10/20/why-inequality-matters-capital-in-21st-century/ )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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