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6

경험 기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정말 없을까?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의 3장에는 경험 기계(experience machine)에 대한 사고 실험이 등장한다. 경험 기계는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기계이다. 그 기계에 들어가면 두뇌에 전극이 연결되고 생애의 체험이 모두 미리 처리되어 뇌에 이식된다. 기계에 연결될 때 잠시 약간 고통스러울 뿐, 경험 기계 속에 있는 사람은 기계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이 기계에 연결되었는지를 모른다. 이런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경험 기계에 평생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겠는가? 2년 간 경험 기계에 들어 있다가 2년이 지난 후 경험 기계에서 잠시 나와서 다음 2년의 경험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노직은 아무도 이런 기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어떠한 것을 단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한다. 둘째, 우리는 미결정된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방식, 어떤 종류의 인간이기를 원한다. 셋째, 경험 기계에 연결되는 것은 우리를 인공 현실, 즉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세계로 제한한다. 노직은 우리가 경험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경험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의 문제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현실과 접촉하여 능동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일이다. 경험 기계에 특정 기능이 추가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그들이 대신 산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경험 기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정말 없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주변의 과학철학 전공 대학원생 중 3분의 2는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애인과 교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애인이 있잖아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잖아요? 경험 기계에 들어가는데 둘이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경험 기계에 혼자 들어가면 혼자서 두 사람이 백년해로 하는 경험을 하고 애인은 다른 남자랑 행복하게 살든 불행하게 살든 어떻게 사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면 어때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대학원생들은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오히려 나보고 왜 경험 기계에 안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그러게, 나는 왜 경험 기계에 들어가기 싫을까?

이번에는 조교 일을 하는 수업의 학부생들에게 물어보았다. 학부생들은, 대학원생들과 달리, 열 명 중 두 명만이 경험 기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중 한 명은 지금 배울 것이 너무 많아서 경험 기계에 들어가서 다 배우고 나오겠다고 했다. 외국인 학생이었는데, 아마 경험 기계를 ‘시간과 공간의 방’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의 반응이 왜 이렇게 다를까? 학부생들은 아직 살만하고, 꿈도 있고, 미래도 있고, 희망도 있어서 그런 것인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노직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경험 기계에 안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것만 봐도 그렇다. 노직은 25세에 프린스턴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하버드 철학과 정교수가 되었다. 왜 경험 기계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노직이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비슷했을 것인데, 아마도 노직 동료들도 노직 같은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 뱀발: 내 이야기를 들은 학부 선배는 다음 논문을 소개해주었다. 나중에 읽을 생각이다.

Frank Hindriks and Igor Douven (2017), “Nozick’s experience machine: An empirical study”, Philosophical Psychology 31(2): 278-298.

(2019.09.26.)


2019/11/24

플라톤 대화편으로 힙합을 한다면

   
학부 교양수업 조교 일 때문에 <에우티프론>을 읽다가, 힙합하는 사람들이 쓸 수도 있겠다 싶은 문구를 찾았다. <에우티프론>의 주제는 경건함이니까 경건함을 주제로 하는 곡의 후렴구로 쓰면 되겠다.

내가 뽑은 문구가 곡에 들어간다면 두 가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곡의 난이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가수의 실력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 대화편에서 가사를 뽑아올 수 있을 정도로 교양 있음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안부 같은 것은 그만 묻고, 돈 자랑도 적당히 좀 하고, 이제는 경건함 같은 것으로도 곡을 쓸 법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보이는 것이오.
그것이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끌리기 때문에 그것은 이끌리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운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운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운반되기 때문에 그것은 운반되는 것이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오.
만약에 어떤 것이 생성되거나 무엇을 겪는다면,
그것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생성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기 때문에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오.
또한 그것이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겪게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겪기 때문에 그것은 겪는 것이오.(57-58쪽)
  
하지만 보시오, 에우티프론!
만약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과 경건한 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래서 경건한 것이 사랑받는 게 경건하기 때문이라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사랑받게 되는 것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일 테지만,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인 건 신들한테서 사랑을 받기 때문이라면,
경건한 것이 경건한 것도 사랑받음 때문일 것이오.
그렇지만 그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에,
그와는 반대임을 지금 당신을 알아차리고 있소.(59-60쪽)
  
  
* 출처: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3).
  
  
(2019.09.24.)
    

2019/11/23

이상형이란 무엇인가?



교회에서 사모님이 이상형을 물어보셔서 나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라고 답했다. 사모님은 예쁜 것과 똑똑한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고 물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예쁘고 안 똑똑한 여자를 좋아할 때는 ‘사람이 그렇게 똑똑할 필요는 없지. 호모 사피엔스가 언제부터 책 읽고 살았다고’ 하는 생각을 했고, 안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좋아할 때는 ‘아,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나 보네. 예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데도 이렇게 좋으니’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둘 다 중요한 것 같은데 극단적인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경우인지 잘 모르겠네요” 하고 말끝을 흐리자, 사모님은 “남자들은 젊었을 때 다 예쁜 여자를 찾아요”라고 했다. 나는 예쁜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집사님은 “예쁜데 어리면 더 좋죠? 그런데 얼굴 예쁜 것은 한때예요”라고 말했다.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그 한때라는 것이 그렇게 짧은 기간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미모가 상하는 것은 맞지만 젊었을 때보다 안 예쁘다는 것이지 미모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한국의 웬만한 주택 수명보다 미모의 지속 기간이 길다. 외모가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냐는 물음에 “예쁘고 똑똑한 여자”라고 답하면, 그렇게 나는 예쁜 여자나 밝히는 놈이 된다. 분명히 “예쁘고”에 “똑똑한”을 덧붙였는데도 그런다. 남들이 나의 이상형을 물었다면, 나는 남들이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예쁨’과 ‘똑똑함’뿐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가능한 사회성 정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만한 이상형의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형을 몇 개 들어보았는데 죄다 이상하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의견이 있다. 예쁘면 웃는 모습도 예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응원해주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의견도 있다. 애정결핍인가. 내가 벼랑으로 가고 있으면 말려야지 멍청하게 응원이나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미취학 아동도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 애인한테 응원이나 바라는 심리는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믿음이 가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래 사기꾼들이 더 믿음을 준다. 믿음을 주니까 사기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연예인 누구누구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게 제일 말 같지 않다.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다 걷어내면 결국 ‘예쁨’과 ‘똑똑함’이 남는다. 물론, ‘예쁨’과 ‘똑똑함’ 이외에도 중요한 요소가 많을 수도 있지만 그건 만난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나기 전에 가늠할 수 있는 요소는 결국 ‘예쁨’과 ‘똑똑함’뿐이다.

도대체 이상형이란 무엇인가?

(2019.09.23.)


2019/11/22

[과학사회학] 김기흥 (2009), 8장. “프리온 논쟁 (1982~1997)” 요약 정리 (미완성)

   
[ 김기흥, 『광우병 논쟁』 (해나무, 2009). ]
  
  
  1. 전쟁의 시작
  2. 프리온 유전자의 발견
  3. 프리온 단백질과 감염성의 문제


  1. 전쟁의 시작

141-142
프리온 이론은 파장을 일으키며 결국 핵산 없이 단백질로만 생명체가 유지된다는 ‘단백질 단일 감염체 이론’(protein only theory)으로 받아들여짐.
게다가 명백한 증거 없이 바로 이 병원체에 대한 이름을 제안한 것은 당시 과학자들의 암묵적 합의를 파기한 것.
프루지너는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과감한 방법, 즉 언론을 이용하는 길을 선택.
지금과 달리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자신의 연구를 학술지에 발표하기 전에 언론 매체에 먼저 알리는 것은 상식 밖의 행동.

142-144
영국 에든버러의 연구팀의 리처드 킴벌린이 <사이언스>지의 경쟁지였던 <네이처>지에 프루지너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 논문을 게재
디킨슨은 〈랜싯>지에 익명으로 비판 논평을 실음.

145-
뉴욕 맨해튼의 팻 메르츠(Pat Merz)는 스크래피에 감염된 실험쥐의 샘플에서만 발견되는 ‘스크래피 관련 섬유소’(Scrapie Associated Fibrils, SAFs)를 발견하여 학술지에 보고했는데, 프리온 이론은 이를 통해 더욱 강한 비판에 직면함.

146-
당시 프루지너는 ‘프리온’이라는 명명행위를 일종의 위험한 도박으로 생각했고 실패하면 모든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고 여김.
하지만 프루지너의 실험실 연구자였던 볼튼은 스크래피 병원체와 연관된 특이한 단백질을 젤 전기영동기(gel electrophoresis)를 이용해 발견했고, 볼튼과 프루지너는 이것이 프리온의 실체라고 믿음.


  2. 프리온 유전자의 발견

149-152
단백질로만 이루어진 병원체라는 가설
프루지너와 연구팀은 그러한 단백질이 단순한 숙주의 유전자가 만든 것인지 외부 병원체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함.
그들은 분자생물학의 대가인 르로이 후드(Leroy Hood)와 찰스 바이스만(Charles Weissmann)의 도움으로 프리온 단백질이 외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실험동물의 유전자인 핵산에서 만들어진 최종 산물이라는 것을 밝힘.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정상적인 유전자가 만든 정품 단백질이라는 것.
그러나 그들은 구성 물질이 동일한 단백질임에도 불구하고 단백질 분해 효소에 다른 반응을 보인 점을 설명해야 했음.

154-
프루지너는 정상적인 뇌조직에서 얻은 프리온 단백질, 즉 효소에 녹는 단백질을 ‘세포성 프리온 단백질’(cellular prion protein, PrPᶜ)로, 스크래피 감염 뇌조직에서 얻은, 효소에 분해 안 되는 단백질을 ‘스크래피 연관 프리온 단백질’(scrapie associated prion protein, PrPˢᶜ)로 명명.
프루니저는 단백질 형성 이후 형태 변화로 인한 3차원적 구조에서 차이를 가진다고 설명함.


  3. 프리온 단백질과 감염성의 문제

157-
그러나 여전히 프리온 이론에 가장 큰 문제를 제기던 연구 팀은 에든버러 연구자들.
스크래피의 계통적 다양성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프리온 이론과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

159-
1988년에 이르러 프리온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대립으로 이어졌고 과학적 논쟁을 넘어 개인적인 대립으로 번짐.
  
  
(2019.12.01.)
   

2019/11/21

열정을 믿지 말라는 만화가 스콧 애덤스

   
만화가 스콧 애덤스는 『열정은 쓰레기다』라는 책에서 열정을 믿지 말라고 조언한다.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열정 있는 사람들 중 대박을 터뜨리는 사람이 간혹 나오지만 대부분은 실패해서 우리에게 조언할 기회도 없었다는 점, 둘째,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 비결을 말할 때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것을 겸손하게 이야기하려고 열정을 언급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셋째, 열정은 재능을 나타내는 단순한 지표일 뿐이며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 때 따르는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근거는 관찰에 기반한다. 누구나 주변에 재능은 없지만 열정만은 대단해서 열정을 불태우고 쫄닥 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열정을 과시하지 못한다. 두 번째 근거는 추측에 기반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재능이 있는 것을 알지만 재수 없어 보일까봐 섣불리 재능을 과시하지 못한다. 세 번째는 개인 경험에 기반한다. 스콧 애덤스는 자신의 실패담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잘 풀리는 일에 열정적이기는 쉽다. 이 때문에 열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것이다. 이 때까지 나는 벤처사업을 수십 가지쯤 해봤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흥분했다. [...] 하지만 대부분은 잘 풀리지 않았고 실패할 때마다 나의 열정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잘 풀린 경우가 몇 번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열광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 놓이고는 했다.”
  
스콧 애덤스는 만화를 그리기 전에 은행에 다녔다. 애덤스는 시절의 상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의 대형 은행에서 대출 담당자로 일하던 시절, 나의 상사는 열정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대출을 해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스포츠용품점을 시작하려는 스포츠광에게 대출을 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잘못된 이유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0년차 은행원이었던 그 상사는, 최고의 고객은 열정 따위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탁소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처럼 따분한 일에 투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말이다. 다시 말해 자기 일을 사랑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를 제대로 파고드는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자, 어느 쪽인가? 열정은 성공을 이끄는 유용한 도구인가, 아니면 당신을 비합리적으로 만들 뿐인가? (26쪽)
  
열정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라는 사람과 열정을 믿지 말고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사람, 둘 중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아무래도,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나 쓰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보다는. 은행에서 일하던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 같다.
  
  
* 참고 문헌: 스콧 애덤스, 『열정은 쓰레기다』, 고유라 옮김 (더퀘스트, 2015).
  
  
(2019.09.21.)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