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4

[형이상학] Gilson (1949), Ch 1 “On Being and the One” 요약 정리 (미완성)

     

[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1-40.
  E. 질송 지음, 「제1장. 존재와 일자에 관하여」,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17-81쪽. ]
  
  
  형이상학의 탐구 주제
  
[17쪽]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존재로서의 존재(being as being)와 본성상 이것에 속하는 속성들을 탐구하는 학”.
특수과학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다루지 않고 존재의 한 부문을 분리하여 그 부문의 속성을 탐구.
  
[17-18쪽]
존재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존재의 파악 가능한 어떤 부문을 탐구하는 것(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특수과학을 파악하는 것)과 존재의 부문들 중 어느 한 관점으로 존재 전체의 속성을 탐구하는 것(특수과학의 관점에서 형이상학을 파악하는 것)은 개념상 모순.
그래서 이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나 그의 추종자는 실패의 책임을 형이상학 자체에 전가함.
회의론은 형이상학이 인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설쳐대는 사이비 학문이므로 형이상학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함.
  
[18-19쪽]
회의론은, 철학적 경험의 본성이나 통일성을 두 명제로 요약함.
(1) ‘존재’는 인간 인식의 제1원리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제1원리이다.
(2) 형이상학에 관한 과거의 모든 학문은 그 책임이 형이상학 자체가 아닌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자들의 거듭된 실수에 있다.
- 역설적인 것은, 존재가 인간 인식의 제1원리라면 인간의 마음에 파악되는 최초의 대상도 존재일 텐데, 왜 철학자들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나 하는 점.
인식의 계열에서 처음에 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되어야 하는데, ‘존재’가 마음에 현존하면서도 표상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가능한 대답: 인간 마음의 본성에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 형이상학자들이 ‘존재’를 자신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이면서도 존재의 우위성과 보편성을 존재의 어느 한 부분으로 돌렸는데, 이는 ‘존재’의 본성 때문이다.


  존재의 다양한 의미

[19-20쪽]
- ‘존재’라는 관념(notion)의 근본적으로 애매하다.
(1) 존재라는 말은 명사로서 ‘하나의 존재(즉 실존하는 어떤 것의 실체, 본성, 본질)’ 또는 존재 자체(being itself)를 지시.
(2) 존재라는 말은 ‘있다(is)’라는 동사의 현재분사이다. 어떤 주어진 실재가 현실적으로 있거나 실존하는 현실(act)을 지시.
“있다”와 “존재”는 대치 가능한 관계가 아님. “존재(being)”는 파악 가능, “있다(to be)”는 파악 불가능.
- 하나의 “있다”를 있거나 실존하는 어떤 것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음(존재는 현실적 실존과 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존재를 실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구분 가능.
- 현실적 실존이 존재와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는 반면, 존재는 현실적 실존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철학자들은 현실적 실존을 빼버린(minus) “존재”를 형이상학의 제1원리로 정립.


  개념과 실존의 구별

[20-22쪽]
- 어떤 의미에서는 실존 자체가 도저히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가 항상 실존에 무관하게 ‘파악’됨.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는 한 사물의 개념에 부과할 수 있는 실재적인 술어나 어떤 것의 개념이 아니라고 함. 여기서 존재는 ‘있다’를 나타낸다.
- 어떤 사물의 “있다”는 실존하는 그 사물과 별개로 파악할 수 있으려면, 우리 마음에 그것이 표징될 때 서로 다르게 나타나야 하는데(실존이 더해지거나 빠진 것으로), 그 대상을 실존하는 것으로 나타내기 위해 개념에 부과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22-23쪽]
사변적으로 말할 때 실재적인 100달러의 개념은 가능적인 100달러와 같지만, 실존적으로 말할 때 실재적인 100달러는 많은 양의 1센트가 들어있는 반면 가능적인 100달러는 1센트도 없음.
실존이 개념 속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철학적 사변이 개념들로 이루어지는 그 정도만큼, 철학적 사변 자체는 실존적으로 중립.
따라서 철학적 사변 자체는 그 대상들이 현실적으로 실존하든 아니든 똑같은 것으로 남게 되며, 이렇게 이해된 철학은 실재의 현실적 실존과 비-실존에 대하여 이무 것도 말할 수 없음.


  실존을 배제한 존재의 형이상학적 귀결

[23-25쪽]
- 존재를 자기 철학의 제1원리로 정립하려는 철학자는 실존 자체의 근본적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
실존은 자명하지만 어떠한 해명도 허용하지 않음.
그래서 그러한 철학자는 실존을 자신의 존재 관념에서 제거하고, 그의 형이상학도 하나의 명사로서의 존재에 관한 학이 될 것.
현실적 실존은 능동적인 힘이고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물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능동인(efficient cause). 이러한 실존이 빠진 존재 관념에 기초한 모든 철학은 파멸에 이를 것.
-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를 확인했다. 현실적 실존이 존재의 함축에서 제거될 때 존재 관념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스적 사유에서의 존재

[25-26쪽]
-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의 최초의 물음은 “실재는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것과 본성상 동일하다고 파악하는 것이고, 따라서 실재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이 본성상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연 일반을 물, 공기, 불로 환원했고 마침내 실재를 구성하는 1차적 재료가 존재임을 찾아냈다.
존재는 있는 모든 것이 공통적으로 분유하는 유일한 특성
따라서 존재는 근본적이면서 궁극적인 요소이다.
  
[26-27쪽]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발견은 철학적 사변을 궁극적 한계로 단번에 이끌어낸 동시에 가장 나쁜 형이상학적 난점 중 하나에 휘말리게 함.
우리 모두는 많은 존재를 알지만, 존재 자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극히 모호하고 복잡함.
존재를 분유하는 것 전체가 있는 반면, 분유하지 않는 것은 있지 않다. 
있는 것 전체가 존재라면, 존재는 전체적이고 보편적.
존재는 있는 것의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므로, 존재는 원인을 갖지 않음.
그래서 존재의 실존 원인은 파악할 수 없다.
존재의 파괴 원인도 존재 이전에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음.
그래서 존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단지 있다고 말할 뿐임. 영원한 현재이며 역사가 없음.
있던 게 없어지고 없던 게 있게 될 수 없으므로 존재의 구조가 변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존재는 구조가 없다. 존재 자체에는 실존하지 않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등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동일한 조건과 장소에 있는 것, 즉 “중심에서 등거리에 있는 둥근 구의 덩어리”로 상상할 수 있다.
  
[27-28쪽]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를 “존경할만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사람”으로 본 것은, 그의 형이상학적인 막다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함.


  파르메니데스의 순수 일자의 존재론: 존재와 실존의 동일화

[28쪽]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보든지 그 안에서 실재의 실존만을 발견하므로, “존재는 있지만 비존재는 있을 수 없다(존재는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언명은 반복됨.
실존과 비실존 사이에 매개는 없다.
그래서 “존재는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28-29쪽]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교설 전체를 ‘존재는 있다’는 자명한 가정 위에 기초 지어서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남지만, 아무 제한 없이 실존과 존재를 동등하게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일으킴.
하나의 “존재”(to be a being)라는 것은 실존하는 것(to exist)으로, 그 역으로 실존하는 것이 하나의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듯 보이지만, 이러면 우리가 통상 실재라고 부르는 것 중 극소수만 남게 됨.
  
[29-30쪽]
존재는 하나지만, 감각적 세계는 우리에게 여러 형태로 나타남.
다양한 요소가 있고 다른 것과 동일하지 않음.
다양한 요소가 있고, 빛과 어둠처럼 대립적인 것도 있으며, 개별적인 사물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짐.
존재 외에는 아무 것도 실재적이지 않음.
비-생성적이고 비-파괴적이며, 동일하고 연속적이며,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실재는 마음속의 순수 대상.
이때 우리가 사는 변화의 세계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함.
  
[30-31쪽]
우리가 ‘실존’을 변화하는 세계에 속한 특정한 양상의 존재라고 한다면, 있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
실존하는 것이 있지 않듯이, 실존하는 것은 있지 않음.
서양 사상사의 시초부터 존재가 참으로 있다면 어떤 것도 실존하지 못한다는 점이 제시됨.


  플라톤: 파르메니데스적 존재의 계승자

31쪽
플라톤은 이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상속자 겸 계승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물론이든 플라톤의 관념론이든, 존재는 동일한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따른다. 
존재인 한에서 그것은 똑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다룰 때 “온토스 온(ontōs on)”을 추구했다. 
이는 영어로 “참으로 실재적인(really real)”이라고 번역되는데 플라톤은 “참으로 실재하는” 것(참된 존재)은 “자기 자신에 따른 그 자신 자체”라고 보았다(자체성). 
그런데 이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동일성과 실재의 필연적인 관계를 다시 진술한다. 
아플레이우스의 <황금나귀>에서 원래 사람인 주인공이 당나귀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했을 때, 동일한 존재가 다른 모습을 해도 실존하지 않는 일은 없다. 
즉, ‘있다’와 ‘그것인 바의 것이다(자기 동일성)’는 같다.


  실재의 교설: 존재의 징표: 자기 동일성

33쪽
자기 동일성이 실재의 조건이 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단일하고 동질적이며 변화에서 면제된 것이다.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닐 수 없는데, 어떤 한 존재에게 이 존재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과 하나의 ‘사물’이 되는 것은 꼭 같은 것이다. “참으로 실제적인” 것은 ‘다름’으로부터 자유롭다.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에서 ‘다름’은 바로 존재의 부정이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는 변화로부터 자유롭고 불변한다.
  
참으로 있는 것들 모두의 공통적 특성이 우시아(본질, essence)이다. 
우시아는 참으로 실재적인 것 자체에 속하면서, 이것을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특성을 지시한다. 
이것은 존재를 구성하고 존재의 귀속을 정당화하는 자기 동일성에 놓여 있다. 
자체성, 자기 동일성, 자기 유사성, 순수성 등이 플라톤의 존재의 근본적인 필수 조건들이다.
  
참으로 실재적인 것은 항상 가지적인 것이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동등시되기 때문에, 실재와 동일성을 동등시하는 것은, 인간 지성에 철저하게 가지적이기 위해서 실재가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것으로 실재가 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존재와 사유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플라톤의 세계가 자기 동일성의 성격을 띤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감각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에 있어서의 실존 물음의 불가능성

37쪽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실존은 감각적인 것들인데, 만약 스스로 실존하는 자체적인 불 자체가 ‘있다’, 미가 ‘있다’고 하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플라톤에게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참으로 실재적인’ 것이 참으로 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존재는 있는 ‘것’을 의미하거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 플라톤은 두 번째 의미를 무시한다. 
플라톤적인 이데아가 있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그 자신인 바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있다는 것이다.


  변량으로서의 존재: 실재성의 정도

40쪽
플라톤은 존재와 비존재, 즉 실재와 현상을 혼합하는 일 대신에 현상에서조차도 실재성의 정도가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하나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있거나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중간점을 사유할 수 없는 반면, 플라톤의 우시아의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은 ‘존재의 정도’ 또는 실재성의 정도가 있고 이것은 상이한 존재들 속에서의 본질의 순수성 lac 자체성의 정도에 비례한다.


  이데아의 통일성 문제

41쪽
다수의 어떤 것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데아의 통일성을 분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개개의 이데아는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개의 이데아는 하나인 까닭에, 자체적으로 통일성이란 이데아를 같은 모양으로 분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는 존재와 다르며, 하나는 있지 않고 하나와 존재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들도 있지 않다. 
통일성의 존재가 파악 불가능함은 존재의 통일성이 파악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데아의 통일성 문제

42쪽
존재의 통일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존재에게 어떤 종류의 통일성을 귀속시키지 않고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같음(sameness)을 통일성을 발견해야 하는데, 존재가 같음과 동일하다면 존재는 더 이상 두 개의 상이한 것들에 귀속될 수 없다. 
그 자신과 같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여타의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기 때문에, 같음은 다름을 수반한다. 
그러면 있으면서 있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존재(우시아) 너머의 선의 가정

46쪽
그에게 있어서 있다(to be)는 그것인 바의 것(to be that which it is), 또는 같은 것(to be the same)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에게서 참된 존재라는 것의 징표가 자체성, 자기 동일성인 한, 하나의 이데아를 하나의 이데아이게끔 해주는 어떤 것이 요구된다. 
플라톤 자신의 어법에 따를 때 하나의 이데아가 하나의 이데아이기 위해서는, 이 하나의 이데아가 통일성이나 같음이라는 이데아를 분유해야만 한다.
  
어떠한 이데아도 오직 그것인 바의 무엇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또한 이데아들이 그들인 바의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내적인 일관성과 상호 양립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이데아를 이데아이게 하는 존재 너머에 있는 어떤 최고의 원리, 즉 현실적으로 존재인 것에 대한 어떤 원인을 정립했다. 
우시아 너머에는 존재를 능가하는 선이 있다.
  
결과적으로 “참으로 실재적인” 것은 실재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의존한다. 
즉 존재와 가지성은 더 이상 최고의 영역을 차지하지 않는다.


  플로티누스의 형이상학: 존재 너머의 일자와 선

47쪽
플로티누스는 존재 너머에 최고의 원리를 설정하고 이를 일자이자 선이라고 말한다. 
선과 일자는 같은 것이지만 그들 자체는 사물들이 아니고, 그들이 지시하는 것도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상호보완적이지만 구분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최고의 원리는 개별자들이 지니는 통일성의 근원이자 원인이라는 점에서 일자이고 모든 존재를 유출한다는 점에서 선이라고 불린다.

 
  형이상학의 제1원리로서의 일자의 등장
  
50쪽
일자는 존재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존재에 관련해서 일자의 초월은 여기에서 완전히 명백한 것이 된다. 
더불어 존재는 더 이상 형이상학에 있어서나 실재에 있어서 제1원리가 아니게 된다. 
플로티누스에게서 존재는 제2의 원리이고, 바로 이 점(제1원리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의해서 제1원리는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자를 존재 너머에 놓는 것이 필연적임은 플라톤에게 이미 말해졌던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에 비해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각각의 개별적 존재는 통일성 자체를 분유하지만 통일성 자체는 아닌 하나의 개별적 단위이다. 
마찬가지로 일자가 단지 하나의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일자 자체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일자 자체는 단지 하나의 어떤 것인 바의 것에 앞서 오기 때문이다. 
일자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고, 여기서 우리는 대담하게 일자는 무(無)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자가 사유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플로티누스는 자기 인식을 갖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자는 존재가 아니다. 인식과 존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일자는 비실재적이고 사유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일자로 하여금 사유와 존재의 원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일원론과 범신론의 문제

51쪽
플로티누스의 교설에 대해 “범신론” 혹은 “일원론”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플로티누스에게서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규정은 플로티누스의 선과 일자를 기독교의 신인 존재(the Being)와 동일화하면서, 일자로부터의 다수의 플로티누스적 유출을, 존재로부터의 존재들의 기독교적 유출로 바꾸려고 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질송은 이것이 오류라고 생각함.
왜냐하면 기독교 형이상학과 일자의 형이상학은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형이상학 같은 존재 형이상학에서는 개개의 낮은 등급의 실재는 그 자신의 존재를, 제1원리가 그 자체로 있다는 사실에 힘입고 있는 반면에, 일자의 형이상학에서는 낮은 등급의 실재가 그들의 제1원리 자체가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플로티누스의 철학의 제1원리가 존재라면, 그 철학은 틀림없이 일원론일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누스 철학의 제1원리는 존재 이상이다.
  
“어떻게 일자가 그 가신이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부여하는가?”라는 세계 기원의 문제에 관한 플로티누스의 대답은 기독교 형이상학과 구별되는 플로티누스 철학을 정식화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게 되는 그런 일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일자 자체가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산출하는 것이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존재는 그래서 일자의 첫 번째 아이로서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평가 절하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는 참되고 순수한 플라톤주의가 어느 곳에서 유행하든지 간에 우시아는 우주적 질서에 있어서 처음에 나오지 않고 두 번째로 나올 것이며, 존재 전체의 거대한 연쇄는 그 자체로 완전히 존재를 초월하는 어떤 원인의 의존할 것이다.


  일자에서 유출된 최고 지성이 곧 존재
  
54쪽
다른 철학들은 “ens”(있는 것)라는 명사가 esse(있다)라는 동사로부터 파생한 것과 같이, 존재들은 있는 하나의 존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거듭 말할 것이다. 
반면에 플로티누스에 의해 제시된, 존재의 파생은 전혀 상이한 것이면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일자의 흔적이 실재를 낳고 존재는 일자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einai 라는 단어가 하나를 뜻하는 en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ens)가 있다(esse)로부터 나오는 교설 내에서는, 존재들과 그들의 원리 사이의 어떠한 본질적 공통성이라도 필연적으로 일원론을 수반할 것이며, 만약의 그들의 원리가 신이라면 범신론을 수반할 것이다. 
반면 있다(einai)가 하나(en)로부터 파생하는 교설 속에서는 어떠한 일원론도 없다. 
즉, 존재와 그 자체로는 존재를 갖지 않는 제1원리 사이에는 존재에 관한 어떤 공통성도 있을 수 없다.
  
플로티누스의 철학 내에서 존재가 일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이처럼 분명하지만, 존재와 인식이 하나인가라는 문제는 분명하지 못하다. 
하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다양하겠지만, 그것 모두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미지의 x에 관한 많은 규정들을 사유에 의해 구성한다는 공통적인 성격을 가짐.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의 전통에서는, 가지적이라는 것 과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 꼭 같게 되는 그런 어떤 가지적 대상을 산출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존재가 나타난다고 플로티누스는 봄.
즉, 있다는 것은 사유 가능하다는 것, 즉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적인 사유 대상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플로티누스는 사물들이 알려지는 한 실재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며, 어떤 사물에 있어서 있다는 것은 알려진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님.
플로티누스의 참된 입장은 그 반대로 가지적 관계들이 그것으로부터 존재가 만들어지게 되는 그런 재료라는 것이다. 
최고 지성의 통일성 내에서는 모든 가지적 관계들이 동시적으로 있거나 시간 밖에 현존한다. 
이러한 통일성이 바로 플로티누스의 ‘누스’이다. 최고의 지성은 일자의 가지성 전체이지만, 그것은 일자와 동등하지는 않다. 
지성의 대상들이 그 지성인 것과 같이, 지성은 지성의 대상들인 것이다. 
그리고 지성의 대상들 각각이 그의 가지적 정의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통일성이 모든 가능적 존재들을 포함하는 그 지성에 있어서는 그의 통일성이 존재 자체라는 것이 말해질 수 있다. 
그래서 존재는 오직 일자 이후에만, 최고의 지성 안에서 또 그것과 더불어 시작되고, 그러한 만큼 플로티누스 자신의 말대로, “지성은 존재와 동일하다.” 
또한 플로티누스는 지성을 또 하나의 신이라고 말한다.


  神, 善, 一者의 동일화: 프로클로스
  
60쪽
프로클로스에게서 형이상학은 종교로의 전회를 겪는다. 
그는 “일자는 신이다”라고 말한다. 
선과 일자가 같은 것이고, 선과 신이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자는 신이 아닐 수 없다는 것
프로클로스는 존재가 피조물들 중에서 최초로 나온다는 사실은 창조주가 하나의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리스의 플라톤주의는 이러한 원리를 계속 지닌다.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사유의 혼합
 
62쪽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적 사유의 접합은 일종의 우연이다. 
기독교로의 개종이 자신의 철학을 바꿔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면서 플라톤주의자로 있기에, 존재의 본성에 관한 몇 가지 난점이 있었다.
  
성경의 <출애굽기>에서는, 신을 존재로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기독교의 신은 우주의 최고 원리이며 원인이다. 
따라서 신이 존재라면, 존재 이상의 무엇은 정립될 수 없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에서는 “피조물 중의 첫 번째는 존재이다”고 말한다. 
이는 제1원리는 일자이고 존재는 그의 최초의 피조물로서 그 다음에 오는 것임을 말하는 것. 
논리적으로 누구도 동시에 플라톤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으로 사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이 난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는 신플라톤주의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존재를 평가 절하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의 신: 선(先)존재

64쪽
빅토리누스에게서 신 자신은 있는 모든 것과 있지 않는 모든 것 이상이다. 
신은 영원하기 때문에 있지만, 신은 존재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신에 관해서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빅토리누스의 기독교 신은 존재를 낳는 하나의 비-존재이다.
  
빅토리누스는 하느님은 전체적인 선존재이고, 예수는 전체적인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세계 존재가 비록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다고 할지라도 세계 존재가 아버지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사실상 존재인 바의 말씀은 그의 원인으로서의 아버지 안에 있으며, 아버지 안에 잠재적으로 있는 존재는, 신의 이러한 자기 생성 덕분으로 현실적인 존재로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낳아진 것으로서의 신은 결코 낳은 신보다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신은 그 자신의 원인이며, 또한 신이 신인 것은 그 자신을 통해서이다.

 
  디오니시우스와 존 더 스코트의 신: 비존재
  
68쪽
디오니시우스 역시 기독교인이면서 플로티누스의 핵심 원리에 충실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디오니시우스는 신이 존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일컬었음을 알고 있었음과 동시에, 플라톤주의자로서 신이 심지어 존재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신적인 이름들” 중에서 최고인 존재라는 이름 속에서 그분에 의한 결과물들로부터 알려지는 것으로서의 신의 최고 명칭을 발견하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바의 전부였다. 
“신 자신은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존재들의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역설적 성격은 매우 분명한 것이어서,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것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언제나 동일한 결과에 도달했다. 
디오니시우스의 한 제자인 존 더 스코트 역시도 거기에 포함된다.

존 더 스코트의 제1원리 역시 비존재이다. 
기독교도였던 존은 그의 제1원리를 신성(divinity)과 동일화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결과들이 있기 때문에 신성 자체는 있지 않다. 
존은 신과 존재 사이에 혼돈을 제거하기 위해, 신을 존재 이상으로 높였다. 
“신은 피조물들의 유(類)가 아니고, 피조물들이 신이라는 유(類)의 한 종(種)인 것도 아니다. [...] 신은 그의 창조 행위의 전체가 아니며, 그의 창조 행위가 신의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역으로 창조 행위가 신의 전체인 것이 아니며, 신이 그의 창조 행위의 한 부분인 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과 신의 이데아들 간의 관계
  
72쪽
기독교 신이 존재라는 이유로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신의 이데아들이 되어야 함.
신의 이데아들은, 신 안에 있는 것이기보다는 자신들이 신.
하지만 존 더 스코트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존재가 가지성과 일치한다면 가장 가지적인 것들은 또한 최초의 존재들이어야 함.
그런데 신의 이데아들은 가장 가지적인 것이고, 따라서 신의 이데아들은 최초의 존재들이 됨. 
이는 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는 합당하다. 
반면에, 기독교 신이 존재이기 때문에 그 분은 그 자신의 이데아들인데, 이 점은 신의 이데아들이 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데아들이 피조되었다는 것과 이데아들이 신이라는, 절대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입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은 신의 이데아들은 피조물이지만, 이데아들은 영원하다는 점에서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 딜레마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한다. 
신의 이데아들은 영원하지만, 신과 함께 공동 영원하지는(co-eternal) 않는다.

 
  에크하르트의 신: 말씀과 사고
  
74쪽
에크하르트는 신은 스스로가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한다. 
그분의 사고의 현실이 그 분의 존재의 뿌리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줄 근거를 성경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문장에서 발견함.
또한 요한복음의 “나는 진리이다”라는 문장 역시 그렇다. 사고를 신적인 완전성 중 최초의 것으로, 그리고 존재를 그 다음의 것으로 정립해 보자.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존재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 후에 그것들에 속함.
고로 '최초의 피조물은 존재이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주의의 귀결: 일자 형이상학
  
77쪽
실존 자체가 파악 불가능한 듯 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반성은 자발적으로 존재를 “그것이 있다”는 사실(that it is)에 무관하게 “있는 그것”(that which is)으로 파악했다. 
존재는 그래서 자체성이 되었고, 자체성은 통일성으로서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 형이상학은 일자의 형이상학을 낳았다. 
이렇게 존재 전체를 자기 동일성으로 환원했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결국 존재를 근본적으로 존재와는 다른 어떤 초월적 원인에 종속시킴.
그리고 존재 이상인 것이 가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실존을 배제함에 의해서 철저한 가지성을 성취하려는 의도는 형이상학으로 하여금 가지적 실재의 전체 계열을 하나의 불가 지적 비존재에게 종속시키게끔 함.

하지만 철학의 목적은 완전한 가지성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실존이 존재로부터 배제된다면, 무엇이 존재에서 일어나는지를 추측하는 일은 쉽지 않다. 
존재로부터 배제되었을 때, 실존은 결코 존재로 되돌려질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실존을 빼앗겼을 때, 존재는 그 자신에 관한 가지적 설명을 줄 수가 없는 것.

그런데 플라톤의 존재 내에서 결여하고 있는 것이 실존이라는 것은 확실한가? 
존재는 실존을 포함하지 않고도 플라톤의 자체성보다 더 복합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실체일 수 있다.
  
  
(2018.11.18.)
    

2021/06/23

새삼



두 달쯤 전에 폐가 주변을 정리한 적이 있다. 밭 주변을 정리하다가 밭 주변에 있는 폐가 주변까지 정리하게 된 것이다. 폐가 대문 근처에는 찔레나무가 너무 많이 자라서 근처에 가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폐가의 담벼락에는 새삼이 잔뜩 붙어있었다. 밭 주변을 정리해도 폐가 근처를 정리하지 않으면 폐가 근처에서 자라던 것이 밭으로 침범할 것이었기 때문에 손댄 김에 폐가 근처도 정리했다.

담벼락에 붙은 새삼은 굵기가 거의 손가락만 했다.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여기 정리한 것이 언제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시집와서 처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시집와서부터 폐가였던 것은 아니고 20년쯤 전부터 폐가가 된 것이니 새삼도 나이가 그와 비슷할 것이었다.

담벼락에 하도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 새삼을 억지로 잡아당겨서 뜯어내고 톱으로 썰고 불에 태웠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소나무 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내가 일하다가 소나무 냄새를 맡느라 잠깐 일을 쉬니까 어머니는 나보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가 소나무 냄새가 나서 냄새를 맡고 있다고 하니, 어머니는 근처에 소나무도 없는데 어디서 소나무 냄새가 나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분명히 소나무 냄새가 났다. 새삼에서 나는 냄새였다.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자연인들이 산에서 소나무 줄기에 붙은 새삼을 채집하여 술로 담그는 장면이 나온다. 자연인이 톱으로 새삼을 자르면, 자연인 옆에서 윤택이나 이승윤이 소나무에 붙어서 자란 거라서 소나무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하고, 그러면 또 자연인은 새삼이 약재라고 하면서 술에 담근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나중에 산에 가서 소나무 빨아먹은 새삼을 채취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보았던 가느다란 새삼에서 향기 같은 것은 안 났는데 소나무에 붙어 산 새삼에는 소나무 향기가 난다고 하니 뭔가 약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담벼락에 붙어서 자란 새삼에서도 소나무 향기가 짙게 났다. 새삼은 일정 연령만 지나면 그러한 향기가 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담벼락에서 떼어낸 새삼을 모두 불태웠다. 소나무 향기 때문에 잠깐 흔들리기도 했지만, 시멘트벽에 붙어서 자란 새삼을 술로 담그는 것은 너무 찝찝했기 때문이다. 굳이 시멘트독을 우려내서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RISS에서 새삼의 효능을 분석한 한국어 논문이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그에 해당하는 논문은 없었다. 영동농업기술센터 연구팀이 2011년에 새삼을 인공재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 기사는 나오는데, 새삼의 정확한 효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 찾지 못했다. 새삼의 정확한 효능은 무엇인지, 소나무에 붙어서 자란 새삼과 다른 나무에 붙어서 자란 새삼 간에 성분상 차이가 있는지, 몇 년 된 새삼을 술로 담그는 게 좋은지 등을 연구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 그런 연구가 없는 건지, 그런 연구가 있는데 내가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다.

(2021.04.23.)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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