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0

[경제학의 철학] Hoover (2009), “Microfoundations and the Ontology of Macroeconomics” 요약 정리 (미완성)

   

[ Kevin D. Hoover (2009), “Microfoundations and the Ontology of Macroeconomics,” in Don Ross and Harold Kincaid (eds.)(2009),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Economics (Oxford University Press), pp. 386-409. ]

  

  

  1. The Ideology of Microfoundations

  2. On What There Is in the Macroeconomy

    2.1 Supervenience and Reductionism

    2.2 A Critique of Supervenience

    2.3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3. Implications for Applied Macroeconomics

  4. The Irony of Ideology



  1. The Ideology of Microfoundations


388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에 관계에 대한 환원론자들의 견해

견해(1)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의 구분은 유용하지 않다. 이것은 로버트 루카스가 둘의 구분을 제거하고자 한 것을 요약한 것

견해(2): 방법이나 개념 틀에 의해 거시경제학이 미시경제학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영역에 따라 구분된다.

예)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

산업 조직이 노동 경제학과 다른 것처럼 거시경제학도 다르다는 것, 

한편 둘 다 미시경제학의 하부분야.

견해(3): 다른 방법과 접근을 허용하지만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이 경제학적으로 더 폭 넓은 문제에 적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한다는 것.


388


389

실제로, 거시경제학자들은 대표 행위자 모형을 받아들임.

...

대표 행위자는 단지 미시경제학적 행위자를 넓힌 것

대표 행위자는 총 생산 함수에 맞게 이익을 극대화함.

모든 함수의 형태는 미시경제학적 분석에서의 형태와 동일함.


389

개인들의 합계를 기술하는 미시경제학자는 개인들에 적용할 함수의 형태에 타당한 이유가 없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모든 개인들이 콥-더글러스 효용 및 생산 함수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총 소비, GDP, 총 자본이 콥-더글러스 함수의 형태를 따르는 거시경제에는 이상함.


389

대표 행위자 모형이 개인들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시경제학이 개체주의 방법론을 성공적으로 따르지 않고 미시경제학의 형태를 흉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후버는 이러한 근본적인 동기가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추측함.

거시경제학의 존재론적 실수는 거시경제학적 분석의 대상들이 존재론적으로 독립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


389

경제적 환원주의의 전략은 다른 과학과 다름.

많은 생물학자는 기능적 설명이나 목적론적 설명을 두려워함.

개체적 유치게의 믿음, 목적, 다른 지향적 상태에 의존하는 설명을 좋아하지 않음.

이와 반대로, 경제학자들은 지향적 상태를 다루지 않고서는 경제학적 분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음.

미시적 기초의 요점은 거시경제학이 놓친 것으로 보이는 목적론을 재포착한 것.


389-390

물론 거시경제학적 총합이 "헤겔 식 세계 정신"처럼 떠다디는 플라톤 식 형상은 아님.


390

그러므로 후버는 두 가지 질문을 함.

질문(1): 거시경제학의 성공적인 존재론이 있는가?

질문(2): 실제 거시경제학이 가지는 존재론은 어떤 함축을 가지는가(또는 가져야 하는가)?




  2. On What There Is in the Macroeconomy

    2.1 Supervenience and Reductionism


390

후버는 이전부터 거시경제학이 미시경제학에 수반한다고 주장함.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의 구조는 구분되지만, 미시경제학적 특성들의 특정한 배열은 항상 정확히 같은 세트의 거시경제학적 특성들을 산출한다는 것.


390-391

수반은 거시에서 미시로의 환원의 근본 목적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약한 형태의 환원주의

예) 정신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생물학자들과 반대로.지향성을 재포착하는 방향으로 함.

후버가 반-환원주의자의 방식으로 수반을 사용한 목적은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총합에 대한 존재론적 독립성을 보존하면서도 거시경제학이 개인들에서 존재론적 닻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

재화의 가격은 달러/재화단위의 차원을 가지는 반면,

종종 미시경제학적 가격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일반 가격 수준은 기준 시점 달러당 현재 달러의 차원을 가짐.

이와 비슷하게도, 실제 재화는 물리적 단위인 반면,

유비적인 거시경제학적 양, 실질 GDP는 화폐적인 단위일 뿐.

후버의 주장은 거시경제학적 총합을 거시경제의 창발적 속성들이지만, 즉, 미시경제학적 행위자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물리적 속성에서 창발하는 정신적 속성처럼, 존재론적으로 구분된다는 것.

그런데 이것이 왜 개념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해야만 하고 존재론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가?

특히나, 왜 우리는 거시경제학적 집계를 미시경제학적 자료들의 (다소 불완전한) 모음으로 보는가?

왜 우리는 거시경제학적 집계를 외재적으로(즉 개인 마음과 독립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가?


391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으로 환원하는 데 거부하는 논변(1)

데이비드 레비

미시경제학적 행위자는 의사결정할 때 필연적으로  거시경제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

거시경제학적 개념이 미시경제학적 사실들을 관찰하고 모으는 외부자의 것이 아니고, 미시경제학적 사실들을 만드는 개별 행위자들의 것이므로, 거시경제학적 개념들은 미시경제학적 실재의 구성적 부분이라는 것.


391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으로 환원하는 데 거부하는 논변(2)

후버가 한 논변

거시경제학적 총합의 외재적 실재를 옹호하는 논변

(1)이언 해킹의 조작가능성 기준을 거시경제학에 적용

연방준비위원회의 조작

실질 이자율 같은 거시경제학적 총합을 통제하면 yield curve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

(2)과학적 모형의 구성에서, 인과적 과정에 포함된 본질적 요소를 분리해야만, 이상화가 경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대표 행위자 모형을 포함하여 모든 성공적인 거시경제학은 거시경제학적 총합에서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것.

대표 행위자 모형이 거시경제학적 총합의 존재에 관한 암묵적 주장에 성공적으로 도달함.



    2.2 A Critique of Supervenience


391-392

줄리안 라이스는 수반이 거시경제학의 실재론적 존재론에서 미시-거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빈약한 틀을 제공한다고 함.

라이스의 주장(1): 수반에 관한 고전적 응용은 환원론이고 미시와 거시 수준에서 개념적인 분리를 요구함.

거시경제학적 개념을 미시경제학적 수준에 적용한 것은 사소한 것으로 잘못 이끈 것임.

원래 개념에서 남은 것은 개인과 총합 사이에 다대일 관계




    2.3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3. Implications for Applied Macroeconomics

  4. The Irony of Ideology




(2021.04.01.)

    

2020/12/09

농생대에서 먹은 떡볶이



나는 입맛도 까다롭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는 편이지만, 시중에서 유통되는 떡볶이에 몇 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 떡볶이는 달면 안 되는데 꽤 많은 분식점에서는 물엿을 너무 많이 넣는다. 너무 달아서 쓴맛이 나는 집도 있다. 단 것만 쳐넣으면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음식이 그렇게 달면 안 된다. 어떤 분식집에서는 동남아 쪽 고추가루를 쓴다. 동남아 쪽 고추가루를 쓰면 떡볶이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향이 난다. 아마도 동남아 쪽 고추가루가 국내산 고추가루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어떤 분식점에서는 뻘건 떡볶이 국물에 떡만 볶는다. 떡볶이 국물에 파, 양파, 어묵 등이 국물에 우러나서 감칠맛이 나야 하는데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학생식당에서 만드는 떡볶이에는 물엿도 그렇게 많이 넣지 않고 고추가루도 국내산을 쓴다. 별미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정상적인 떡볶이다. 메뉴에 떡볶이가 끼어있으면 항상 두 번씩 받아먹는다.

같은 음식도 학생식당들마다 약간씩 맛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떡볶이도 그런 음식이다. 언젠가 농생대 식당에서 반찬으로 떡볶이가 나왔던 적이 있다. 농생대 떡볶이는 맛이 어떤가 하고 한 입 물었다. 학생식당들에서 나오는 떡볶이가 다 거기서 거기지 하면서도 이 식당의 떡볶이는 맛이 어떤가 하고 한 입 베어 문 것인데, 그 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맛이어서 순간 놀랐던 적이 있다. 내가 그런 떡볶이를 먹었던 것은 아마도 16년 전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16년 전에 먹었던 것은 떡볶이가 아니었다.

내가 학부를 다닐 때 학교 근처에 <종로분식>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이름은 <종로분식>인데 이름만 분식집이고 분식점에서 파는 것은 하나도 팔지 않는 이상한 음식점이었다. 떡볶이도 안 팔고, 어묵도 안 팔고, 순대도 안 팔았다. 그 대신 거기에는 ‘오돼떡’이라는 메뉴가 있었다. 오징어와 돼지고기와 떡을 넣고 볶은 음식이라 ‘오돼떡’이라고 불렀다. 그 동안 내가 갔던 어떤 분식점에서도 오돼떡 같은 음식은 팔지 않았다. 농생대 식당에서 먹은 떡볶이 맛이 <종로분식> 오돼떡 맛과 비슷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오돼떡을 만들 때 일반적인 떡볶이 국물 대신 제육볶음 소스 같은 것으로 맛을 냈던 것 같다. 예전에 농생대 식당에서 먹었던 떡볶이는 그런 맛이 아니었는데 그 날 먹은 떡볶이에서 그런 맛이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떡볶이가 떨어져서 제육볶음 소스로 응급처방 비슷하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종로분식>은 과에서 행사가 있으면 끝나고 다 같이 저녁식사 하러 가는 곳이었다. 좁은 지하로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장판이 깔린 바닥에 앉아 오돼떡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가게 벽에는 그 가게 사장님과 백기완 선생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가게 구석에 있는 선반에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저녁식사를 하다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게 내가 신입생이던 2004년에 있었던 일이다. 벌써 16년 전이다.

내가 농생대 식당에서 오돼떡 같은 떡볶이를 먹은 그 날, 같이 저녁을 먹던 대학원생들에게 학부 때 갔던 음식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내가 학부를 다닌 학교에는 정문이 있고 후문이 있고 옆문이 있고 쪽문이 있는데, 그 중 쪽문으로 나오면 <종로분식>이라는 음식점이 있었는데 어쩌고 저쩌고... 그 자리에 있었던 대학원생 중에 나와 같은 학부를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나는 나만 아는 이야기를 그렇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저 사람은 떡볶이 먹다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노인들이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외국에 살아본 적도 없고 유학가본 적도 없어서 외국에서 한국 음식 먹고 한국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몰랐는데, 농생대 식당에서 떡볶이를 먹고는 이런 게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싶기는 했다.

돌이켜 보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았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즐거운 일이 있기도 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학부 때 어떤 사람들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게 한 것은 책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고 떡볶이였다.

(2020.10.09.)


2020/12/07

노벨상의 혁신성



요즈음은 덜 그러는 것 같은데,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언론들은 우리는 언제 노벨상 타냐고 안달복달하고 사탕 달라고 조르는 애새끼들마냥 보채기나 했다. 혁신해야 노벨상을 받는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었다. 어떤 혁신을 해야 연구가 혁신적으로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연구를 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벨상 자체가 혁신적이라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본 것 같다. 왜 그런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가?

어쩌면 노벨상의 최대 수혜자는 노벨일지도 모른다. 노벨상이 아무리 권위 있다고 해도 전체 노벨상 수상자들 중 우리가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를 모두 아는 사람은 사실상 얼마 없을 것이고, 그 이전년도의 노벨상 수상자는 관심 분야가 아니고서는 거의 모른다.(영화평론가 최광희가 그러겠다. “노벨상은 그 정도 상입니다”라고.) 그렇지만 노벨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안다.

구글에 “노벨상의 경제 효과”라고 치면 노벨상을 받는 쪽의 경제적 효과는 나오는데 노벨상을 주는 쪽의 경제적 효과는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노벨상 때문에 스웨덴이 얻는 경제적인 이득이 있을 텐데, 이런 건 잘 나오지 않는다. 노벨도 상당히 성공한 기업가니까 경제 신문 같은 데서 노벨 같은 기업가를 기르자고 할 법한데 그런 기사도 여간해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노벨은 어떻게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는 상을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다루면서, 브랜드 가치라든지, 기업의 사회적 공헌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도 역시나 하지 않는다.

노벨상이 혁신적인 것이라면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름을 따서 기여자의 공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내가 서양사를 잘 몰라서 서양에서는 언제부터 상에 사람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전-근대 시기에 그런 식의 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황희가 명재상이라고 해도 조선시대에 장기 근속한 벼슬아치에게 황희 메달이나 맹사성 훈장 같은 것을 수여하지는 않았고, 아무리 군공이 높은 사람에게도 을지문덕 상이라든지 강감찬 상 같은 것을 주지는 않았다.

두 번째는 매년 상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첫 번째보다 중요한 것이 두 번째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매년 상을 줄 생각을 했을까? 고대나 중세에는 매년 한 번씩 꼬박꼬박 상을 준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도 어쩌다 한 번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비단 몇 필, 식읍 몇 호 하는 식으로 상을 주었을 것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학자로서 명망이 높으면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지 매년 한 명씩 연구업적이 뛰어난 유생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년 상을 주고 그것도 생존자에게만 준다는 것은 그만큼 상 줄 업적이 매년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건 전-근대 시기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유럽이든 동아시아든, 아랍이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노벨상의 조건은 성장과 진보가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역사를 잘 모르니까 자신 있게 말은 못하겠지만, 노벨이 노벨상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을 즈음에는 아마도 상이나 보상체계에 관한 유럽 사람들의 생각이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아마도 노벨은 동시대 사람들의 그러한 변화를 포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벨상만큼 두드러진 근대적 산물도 드물 것이다.

노벨상 자체의 혁신성과 관련된 연구가 있을 법해서 한국어 논문을 찾아보았는데 찾지 못했다.(영어 논문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영어를 아직 잘 못해서 취미생활을 위해 굳이 영어 논문을 찾아서 읽지는 않았다.) 내가 관련 분야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노벨상이 혁신에 미치는 영향 말고) 노벨상 자체의 혁신성에 대해 연구한다면, 적어도 근대성 같은 소리나 하면서 개뻥 치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020.10.07.)


2020/12/06

고등학교에서 독서 지도 아르바이트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



어느 고등학교에서 독서 지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줌을 이용하여 비-대면으로 한다.

학교에서는 『멋진 신세계』, 『1984』, 『바이러스 쇼크』, 『홍길동전』, 『SF의 힘』, 『엄마의 말뚝』, 『국경시장』, 『금오신화』,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4차산업혁명 새로운 직업 이야기』,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 중 하나를 골라서 학생들과 읽으라고 했다. 청소년이 4차산업혁명 같은 것을 알아봐야 개뻥 칠 때나 도움이 될 테니 필요 없고, 설민석 책은 제끼고, 그러면 소설 몇 권이 남는다.

나는 아직도 소설 읽는 것이 어떤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소설 읽는 게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읽은 소설이 『삼국지연의』 뿐이라서 소설의 교육적 효과를 정말 모르는 것이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억지로 소설을 읽게 만드는 것이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내가 알아서 책을 잘 읽을 텐데 왜 학교에서 생각 없이 한국 근현대 소설 같은 것이나 읽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죄다 우중충한 배경에 하나도 재미없는 이야기들인데 그런 것을 읽고 무슨 교양을 쌓을 것이며, 무슨 수로 독해 능력이나 자료 해석 능력이 길러진단 말인가?

어쨌거나 돈 받은 만큼은 일을 해야 한다. 소설책을 붙잡고 아무 이야기나 궁시렁 궁시렁 하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런 아르바이트에서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RISS에서 한국어로 된 논문을 찾아 학생들이 쉽게 접하지 못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왜 영어 논문이 아니라 한국어 논문인가? 내가 아직 영어를 잘 못해서 영어 논문 읽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서 일정 금액 이상을 받지 않으면 한국어 논문만 보는 것이다.

RISS에서 한국어 논문을 찾아보니 이번 아르바이트에서 내가 읽을 소설과 관련된 적절한 자료는 매우 드물었다. 내가 문학 까막눈이라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한마디 하자면 문학 쪽에는 왜 그렇게 이상한 논문이 많은지 모르겠다. 논문들 중 상당수는 소설에 대해서 말하는 척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그 소설의 어떤 측면이 현대 사회의 어떤 측면과 관련된다면서 그냥 현대 사회에 관한 글을 쓴다. 그렇다고 사회과학 쪽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 비평을 할 만한 전문성이 없어서 소설을 끼워 넣는 것 같다. 어떤 논문은 어떤 철학자를 빌려와서 그 철학자의 어떤 측면과 그 소설을 어떤 측면이 비슷해 보인다고 주장한다. 비슷해 보이는데 어쩌라고? 그 철학자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증거도 없고 그 소설가가 그 철학자의 철학을 접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비슷해 보인다면서 아무 이야기나 하면 소설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는가, 철학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는가? 벽에 걸린 시계가 둥그런 것이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비슷하다고 하면, 시계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는가, 달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는가?

물론, 나는 그런 와중에도 독서 지도를 어떻게 할지 구상이 다 섰고, 해당 소설과 관련된 독서 토론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자료도 다 구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고등학교 독서 교과서에는 독서 토론의 예시가 나오는데, 이건 일과 끝난 직장인들이 하는 책읽기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나 만나서 아무 책이나 읽고 아무 말이나 하고 엉뚱한 놈한테 돈이나 갖다 바치는 책읽기 모임 말이다. 독서 토론 방법에 관한 논문도 있는데, 그 논문에서 말하는 독서 토론이라는 것도 결국 소설책을 읽고 소설 내용 관련해서 그냥 아는 대로 말하고 주워들은 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이게 학생들의 사고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고등학교 독서 토론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는데 우수토론자를 뽑아서 학생부에 기록한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 읽은 것이고 토론을 하면 토론을 한 것이지, 책 내용이 유익하면 일기장에 기록하든지 공책에 기록하면 되고 내용이 감명 깊었으면 가슴에 담아두면 되는 것이고 토론이 유익했으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면 되는 것이지, 굳이 스무 명 중에서 다섯 명에서 열 명을 우수토론자로 뽑아서 기록한다고 한다. 치사하게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교사들이 소인배여서 이러는 것은 아니고 제도가 이상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대학에서도 소설책 몇 권 읽은 것이 학생의 지적 능력에 대해 아무런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뻔히 알 텐데, 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책을 읽는 것이 책 안 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꼭 이렇게 치사하게 해야 하는가?

어쨌거나 이것은 일이고 해당 학교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20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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