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

[분석철학] Peirce, “Some Consequences of Four Incapacities” 요약 정리 (미완성)



[ Charles Sanders Peirce,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 

James Hoopes (ed.)(1991), “Some Consequences of Four Incapacities”, Peirce on Signs: Writings on Semiotic by Charles Sanders Peirce, New editi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pp. 54-53.

찰스 샌더스 퍼스, 「네 가지 무능력의 귀결들」, 『퍼스의 기호학』, 제임스 훕스 편, 김동식 옮김 (나남, 2008), 103-152쪽. ]



[p. 55, 104쪽]

데카르트주의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언급될 수 있음.

1. 데카르트주의는 철학이 보편적 회의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가르침.

스콜라주의는 근본적인 것들을 결코 문제 삼지 않음.

2. 데카르트주의는 확실서으이 궁극적 시험은 개별적 의식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침.

스콜라주의는 현인들과 가톨릭교회의 증언들에 의존함.

3. 중세의 다양한 형식의 논변은 종종 눈에 띄지 않는 전제들에 의존하는 단일한 한 가락의 추론에 의해 대체됨.

4. 스콜라주의는 ...


55-56, 104-105

근대 과학과 근대 논리학은 데카르트주의와는 전혀 다른 강단 위에 서기를 요구함.

1. 우리는 완전한 회의로부터 시작할 수 없음.

애초에 이 회의는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 진정한 의심이 아님.

2. 데카르트: “그 무엇이건 내가 명석하게 확신하는 것은 참이다.”

단일한 개인들을 진리의 절대적 심판관으로 만드는 일은 가장 해로운 것임.

형이상학자들만 그 밖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를 봄.

과학에서는 한 이론이 제기되었을 때 의견 일치에 도달하기까지 그것은 유예 상태인 것으로 고려됨.

의견 일치에 도달하면 의심할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성은 한가한 문제가 됨.

훈련되고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한 이론을 검토하고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면, 그러한 거부는 그 이론을 만든 사람 자신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겨나게 해야 마땅함.

3. 철학은 과학을 모방해야 함.

어떤 논변이 결정적이라는 것보다는 그 논변의 다수성과 다양성을 더 신뢰하는 한에서

4. 모든 비-관념론적 철학은 어떤 절대적 해명될 수 없는,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적인 것을 가정함.

절대로 해명불가능한 사실을 가정하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

그러한 가정은 결코 허용될 수 없음.


56-57, 106-107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능력에 대한 비판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

1. 우리는 내성 능력을 가지지 않으며, 내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외적 사실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으로부터의 가설적 추론에 의해 도출됨.

2. 우리는 직관 능력을 가지지 않으며, 모든 인지는 선행적 인지에 의해서 도출됨.

3. 우리는 기호 없이는 사고 능력을 가지지 못함.

4. 우리는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개념도 가지지 못함.


57-, 108-

마음이 실제로 삼단논법의 과정을 관통할까?


61-, 114-

가설의 기능은 그 자체로는 통일성을 형성하지 못하는 많은 술어들을, 수많은 다른 것들과 더불어 그 술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술어로 대체하는 것임.

따라서 이는 다에서 일로의 환원이기도 함.


76, 137-138

주의는 신경 체계에 영향을 미침.

...

따라서 습관의 형성은 귀납이며, 습관은 필연적으로 주의나 추상과 연관됨.


76, 138

모든 종류의 의식의 변용(주의, 감각, 이해)은 하나의 추론임.

- 가능한 발론: 추론은 일반명사만을 다루며, 따라서 이미지나 절대적으로 단일한 표상은 추론될 수 없음.

(2023.01.28.)


2020/02/14

논증 에세이 쓰기 상담 요령



이번 학기 학부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맡은 일은 논증 에세이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이다. 학생 한 사람당 15분 간 면담하며 기획서를 검토한다. 학생이 원할 경우 다른 시간을 정해서 추가로 면담할 수도 있다.

면담하기 전에 학생들이 제출한 기획서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설명문 기획서나 실험 보고서 기획서에 가까운 글을 썼고, 기획서를 거의 못 쓰거나 아예 안 쓴 학생도 일부 있었다. 나는 학생들의 기획서를 하나하나 봐주는 것보다는 논증 에세이의 취지를 설명한 뒤에 글의 방향을 잡거나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초교육원에서 이공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글쓰기 과제는 주로 설명문, 논증 에세이, 연구보고서, 이렇게 세 가지다. 왜 이렇게 구성되었을까? 기초교육원에서 그와 관련된 안내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글의 기능과 관련된 것 같았다. 설명문은 기존의 있던 지식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이 알기 쉽도록 전달하는 글이다. 글쓴이의 의견 같은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연구보고서는 기존에 없던 지식을 새로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글이다. 아마도 논증 에세이는 설명문과 연구보고서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기존의 지식 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린지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공계 학생들이 과학 활동에서 필요한 글쓰기 능력과 관련될 것이다.

기존의 상충되는 주장들 중에서 어떤 주장이 옳은지 논증하는 글을 쓰려면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어떠한 주제에 대해 대립되는 두 입장을 찾은 다음, 어느 지점에서 논쟁이 벌어지는지를 찾고 어떤 입장을 지지할지 정한다. 기존 주장을 지지해도 되고 기존 주장에 대한 비판을 지지해도 되고, 둘 다 틀렸다고 해도 된다.

서로 대립하는 의견들 중 어느 의견이 옳은지에 대하여 논증 에세이를 쓰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아닌지를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니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입장의 허실을 비교적 알기 쉽다는 것이다. 장점은 지지자가 말하고 단점은 비판자가 말한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교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직류 체계의 문제점은 테슬라가 설명할 것이고 교류 체계의 문제점은 에디슨이 설명할 것이다. 이 것은 옛날에 중고차 살 때와 비슷하다. 자동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중고차 살 때 시승해본다고 하고 그 차를 끌고 다른 중고차 가게에 가서 사장한테 이 자동차 팔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냐고 물으면 그 가게 사장이 그 자동차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다 짚어준다.

논증 에세이는 대체로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세분하면 다섯 부분이 된다. 1절은 서론, 2절은 기존 입장, 3절은 기존 입장에 대한 기존 비판, 4절은 글쓴이의 의견, 5절은 결론이다. 이 중 2절부터 4절까지가 본론이다. 서론에서는 이 글을 왜 쓰고 어떤 목적에서 쓰고 어떻게 쓸지를 쓰고, 결론에서는 본론에서 한 말이 무엇이고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는지를 쓴다. 2절과 3절에서는 기존 입장과 그에 대한 기존 비판을 정리하는데, 어느 지점에서 두 입장이 충돌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두 입장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등을 잘 정리해놓으면 4절에서 주장을 개진할 때 부담이 줄어든다.

3절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존 이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펼치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들이 기존 비판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주로 필요성을 모르거나, 필요성을 알지만 다른 과제도 많아서 금방 과제를 끝내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끌어오면 자기주장의 독창성이 희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절을 건너뛰면 글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남들이 논의하지 않은 것을 처음 논의한다면 보통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기발한 것이거나 논의할 필요도 없어서 논의하지 않은 것일 텐데, 보통은 후자이므로 기존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설사 글쓴이의 비판이 옳더라도 기존 비판을 검토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맞는 말이지만 이미 이전에 더 맞는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쓴 글이 맞는 내용이지만 쓸모없게 된다. 그래서 선행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이 정도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부분 “아, 글을 다시 써야겠네요”라고 먼저 말하거나, 글을 다시 써야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한다. 내가 글을 잘 썼는데 조교인 당신이 글을 볼 줄 몰라서 그런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글을 다시 쓰겠다는 다짐을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수업에서는 이대열 교수의 『지능의 탄생』을 읽고 논증 에세이의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그 책은 매끄럽게 쓴 교양서적이라 그 책만으로는 논쟁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 경우는 책만 읽어서는 안 되고 책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따로 찾아야 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 중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고 논쟁 중인 것이 있을 텐데, 논쟁 중인 것을 찾아서 그와 관련된 논증 에세이를 쓴다. 책과 관련된 책 이외의 내용을 찾고 분석하는 최소한의 과정이 필요하다. 교양 수업이니 굳이 논문까지 찾을 필요는 없고, 구글에서 한국어로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쓴다. 물론, 그대로 긁어서 붙이면 표절이 되기 때문에 자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공과 분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과제의 취지는 논증 에세이의 형식에 맞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로 논문을 쓰는 것은 아니므로 자료 찾는 데에 너무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글을 쓸 때 추가로 고려할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논쟁지점을 다룰 때 최대한 범위를 좁혀야 한다는 것, 정해진 기간에 글을 완성할 수 있는지 견적을 내면서 작업할 것, 어떤 자료를 찾을 때 어떤 자료가 나올지 예상하면서 찾을 것, 꼼꼼히 읽지 않고도 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쓸 것 등이다.

그런데 논증 에세이를 쓰기를 이런 방식으로 지도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논증 에세이는 어떤 주제나 문제에 대하여 논증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다루는 범위를 한정해야 하는지 말이다. 어떤 주제든 논증만 하면 논증 에세이인 것은 맞다. 맞는 말이지만 교육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학부생들한테 논증 에세이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결국 쓰나마나한 글이나 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것을 어떤 사람이 생각해낸 다음 “몰랐지, 요놈들아?” 하면서 기가 막힌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이에 대한 선행 연구도 없으니 기존 비판을 고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놀라고 그 에세이를 쓴 사람은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대가이므로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학 교재에도 나오고 모두가 맞다고 생각해서 고려할만한 기존 비판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그게 틀렸다고 하는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그 에세이의 내용이 정말 맞다면 그 에세이를 쓴 사람도 이미 대가이므로 역시나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대가가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대가가 아니므로 그에 맞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한다.

글쓰기 과제를 내주면서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논증을 하라고 하면, 억지 논증을 만드느라 망상 경연대회 같이 되거나, 분량을 억지로 늘리느라 채점 방해를 위한 필리버스터 같은 것이 되기 쉽다. 학부 글쓰기 수업 조교가 되어서야, 내가 학부 때 문과대를 다니면서 본 글이 죄다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상한 글을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공 수업 중 상당수는 중간고사도 건너뛰는 판이어서 글쓰기 과제 같은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19.12.14.)


2020/02/13

<박세일 법경제학 교과서 재개정판 출간기념> 연합학술대회를 보고



<박세일 법경제학 교과서 재개정판 출간기념> 연합학술대회에 가서 구경했다. 교과서 재개정판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학술대회 부제인 “한국법경제학의 회고와 전망”을 보고 간 것이었다. 법경제학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게 거의 없어서 그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기도 했고, 한국의 법경제학 성립사가 궁금하기도 했다.

학술대회장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박세일? 내가 뉴스에서 본 그 박세일은 아니겠지. 동명이인이겠지.’ 법경제학 교과서의 저자는 내가 뉴스에서 본 그 박세일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박세일 교수는 박근혜한테 미움받은 떨거지들 모아서 <국민생각>이라는 깜찍한 이름을 가진 정당을 만들었다가 정치적으로 홀랑 망한, 그냥 폴리페서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법경제학에서 박세일 교수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학술대회에서 사회자는 박세일 교수를 가리켜 “한국법경제학의 founding father”라고 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김일중 교수는, 한국에서 ‘법경제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지만 실질적으로 법경제학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라고 진단한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법경제학에 관한 종합소개서들의 출현”, “국내법제에 대한 법경제학적 분석 논문들의 출간”, “여러 대학에서 법경제학 과목들의 개설”, 이렇게 세 가지 현상이 1990년대 중반에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박세일 교수다. 박세일 교수는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법경제학> 과목을 한국에서 최초로 개설했고 몇 년 동안 강의하던 자료를 모아서 1994년 『법경제학』이라는 교과서를 출간했다.

박세일 교수의 기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학자들의 법경제학 연구는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는 법학과 경제학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접목하면 한국의 법경제학의 수준이 도약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세일 교수는 <법경제학연구회>를 만들어 매달 월례발표회를 열었다. 연구회는 2002년에는 <한국법경제학회>가 되었고 이때 박세일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창립 11년 뒤인 2013년에는 한국법경제학회 단독으로 국제학술대회도 열게 된다.

학술대회장에서 내가 받았던 놀라움은, 눈썹 이상하게 생기고 미신이나 믿는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가 사실은 『경제학원론』의 저자이자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였음을 알았을 때 느낀 놀라움과 비슷했다. 나는 박세일 교수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 줄 몰랐다. 박세일 교수를 회고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 같이 박세일 교수의 인품이 훌륭했음을 언급했다는 점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의 공과를 판단할 때는 한 측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이든 전문가가 해야 하는 것처럼 정치도 전문 정치인이 해야지, 교수나 학자 출신이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가 청와대 수석 비서관을 한다든지 어떤 기관의 자문을 맡는다든지 하는 현실 참여는 필요한 것이고 권장될 만한 것이겠지만, 학자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 법경제학의 founding father도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서 곤란한 일을 겪는 판이다. 역사나 문학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정당의 선대위원장을 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19.12.13.)


2020/02/12

“인공지ㄹ”이라는 신조어

   
지난 주말에 학술대회에 갔다. 쉬는 시간에 다른 학교 대학원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대학원생이 최근에 “인공지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마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다른 신조어 같으면 단어의 뜻과 유래를 물었을 텐데, 그 단어는 듣자마자 느낌이 와서 무릎을 치고 말았다. 아, 그걸 내가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 내가 그런 생각을 못 하다니.
  
“인공지ㄹ”이라는 말은 인공지능이 일으키는 일종의 오류나 오작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의 언어를 구현하게 하려고 기계 학습을 시켰더니 인간들이 쓰는 나쁜 말까지 배워서 인종 차별이나 소수자 혐오 표현까지 구사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문제들을 가리킨다. 물론, “인공지ㄹ”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인공지능이 일으키는 오류나 오작동이 떠오르기 전에 몇몇 유명인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지나갈지도 모른다. 저건 과학자야, 엔지니어야, 방송인이야, 사기꾼이야 싶은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러라고 만든 말이다.
  
인공지능하고 거의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인공지능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는 하는데 성과에 비해 너무 큰 뻥을 치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그냥 사기꾼이 “인공지ㄹ”이라는 말을 두고 항의하거나 시비 걸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하는 짓은 “인간지ㄹ” 또는 “자연지ㄹ”에 속하는 것이라서 “인공지ㄹ”과는 애초부터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2019.12.12.)
    

2020/02/11

인문대 글쓰기의 두 편향

   
학부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논증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학생들이 가져온 논증 에세이 기획서를 검토하면서 한 말이다.
  
논증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는 아마도 역설일 것이다. 역설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왜 그런가. 타당한 논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제가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 것 같고 결론도 전제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 같은데 결론이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결론을 내다버리고 싶지만 그 결론은 전제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전제들도 하나하나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무시할 수도 없다.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기 싫은데도 타당한 논증처럼 보여서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인문대 학부생들의 글쓰기에 나타난 두 편향도 결국은 논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십몇 년 전 내가 학부 다닐 때는 학교에 정상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수업이 거의 없었다. 학부생들의 필수교양 수업인 글쓰기 수업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전공 수업도 나을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글 쓴다고 뻐기는 사람들은, 특히나 문과대 학생들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을 매끄럽게만 쓰거나, 꼭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쓴 것처럼 이해할 수 없게 쓴 글을 썼다. 왜 그랬을까. 왜 이러한 양극단이 나타났을까. 
  
전자의 경우는, 논증적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상식에 어긋나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도록 적당히 뭉개느라 그런 글을 썼을 것이다. 제논의 역설을 예로 들자면, 전제들을 매끄럽게 정리해놓고는 “그렇지만 화살이 날아간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쓰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는 글의 생명력이 탄탄한 논증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모르고 미친 놈처럼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어떻게든 독특하게 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다른 스타일을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들이 글 쓰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글의 주제와 무관한 것을 계속 덧붙이고 남들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제논의 역설로 예를 들자면, 인류가 언제부터 활을 사용했는지, 언제부터 활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시간을 화살과 같다고 비유하는지, 우리에게 화살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지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길고 지루하게 쓴 다음, “제논의 화실이 활시위를 떠났지만 날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우리 곁에 남아있다”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문과대 글쓰기의 두 편향은 결국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9.12.11.)
    

전원주택을 처음 구입하는 사람들의 과욕

예전에 박재희 박사가 EBS에서 손자병법 강의할 때 한국인과 중국인이 처음 사업할 때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업 자금이 1억 원 있으면 중국인은 그 돈을 3등분하여 세 번 사업한다고 한다. 처음 사업하면 무조건 망하게 되어 있으니 사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