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박사과정생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철학의 쓸모 같은 것을 묻기도 한다. 공격적으로 묻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는 미국 어느 주립대학 공대를 다니는 박사과정생이 이렇게 묻기도 했다. “과학철학이요? 과학은 딱 떨어지는 답이 있는데 철학은 그런 것이 없지 않나요? 그런데 과학철학이라면 어떤 연구를 하는 거죠?” 과학철학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나름대로 간단한 설명을 해서 그 사람에게서 “아, 과학철학이 중요한 거네요”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였다.
첫 반응만 놓고 보면, 이공계 계통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비교적 냉소적이거나 공격적인데, 입장이 선회하는 데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쪽도 이공계 계통 사람들이다. 경상 계열은 이공계에 비하면 온건한 축에 속한다. 처음에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식의 무관심에서 “아, 그럴 수도 있네요” 하며 돌아선다. 최악은 인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우기기는 더럽게 우긴다. 자기도 인문대 졸업했다 이건데, 그런 사람한테는 딱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다. 인문대를 졸업했다는 말에 “아, 그러십니까? 유감이네요”라고 한다면 나는 무례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대중과 유리된 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라는 식의 이상한 주장을 설파하다가 “이것이 주류 학계의 문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학계를 알 방법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주류 학계 같은 소리를 한다. 주류 학계라니, <한국소주학회>나 <한국맥주학회> 같은 데서 학회원 활동이라도 한 것인가?
대중 매체에서 어쩌다 ‘인문학의 위기’ 같은 것을 다루면 꼭 정체불명의 자칭 전문가가 나와서 대중과 유리된 인문학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한다. 인문대 출신의 백수가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꼭 교수들 중에도 그런 헛소리에 편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학의 대중화 같은 소리 하기 전에 학부생이나 똑바로 가르쳐놓고 대중화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좋은 인문학 상품이 나온다고 한들, 교육 기능이 망한 인문대에서 이상한 물이나 든 졸업생들이 그런 걸 사겠는가? 인문대학들의 부실한 교육이 인문교양 시장을 왜곡하는 주요 요소는 아닌지 의심해볼 만하다.
(2017.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