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3

<쓰리랑 부부>를 모르는 후배들

     

노회찬과 심상정이 정치적 동반자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술자리에서 어떤 정당인이 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정의당 사정은 잘 모르지만 옆에서 이런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니까 노회찬-심상정은 김한국-김미화 같은 사이라는 거지. 심상정이 ‘음메 기 살어’ 이러면 옆에서 노회찬은 ‘음메 기 죽어’ 이런다는 거지.”
  
이 말에 198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웃었는데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만 있었다. 그들은 <쓰리랑 부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김한국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김한국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 이렇게 나이 들고 늙고 그러다 아재가 되나 보다’ 하고 탄식을 하고는 술을 퍼마셨다. 그런데 사실, 꼭 그 이유 때문에 술을 퍼마신 것은 아니었다.
  
  
* 오늘의 한 마디: “괴물이 될지언정 아재는 되지 맙시다.”
  
  
(2016.12.03.)
    

2017/02/02

[과학사] Richmond (1997), “A Lab of One’s Own: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 for Women at Cambridge University, 1884-1914” 요약 정리 (미완성)

     

[ Marsha L. Richmond (1997), “A Lab of One’s Own: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 for Women at Cambridge University, 1884-1914”, Isis, 88(3): 422-455. ]
  
  
- 이 논문은 1884년에 설립된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를 다룸
-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Natural Sciences Tripos 경연대회를 대비하여 Newnham and Girton College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과학을 교육할 목적으로 만든 것임.
- Tripos는 캠브리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일종의 경시대회. 이 대회가 1881년에 최초로 여성들에게 개방되었으며, 그에 기인하여 여성들을 위한 과학교육 기관으로서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가 설립됨.

- 1870년 이후 여성들에게 과학 분야의 고등교육이 개방되었으며, 이는 과학에서의 여성들 의 역사에 한 분기점이 됨.
- The Balfour Biological Laboratory도 이러한 경향의 산물로서, 여성과학도들이 생명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hands-on experience)을 하고 새로운 실험생물학의 실용적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됨.

- Cambridge에서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경험했던 장벽과 그를 극복하는 문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과학 분야에 일반화되어 있던 여성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임. (p. 454)
- Cambridge에서 여성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 이후 30년 간 많은 우수한 여성 과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적지 않은 경우에 “꽤 쓸 만한 연구 결과”(p. 455)가 나오기도 했고, 때로 “천재”라는 칭호가 주어지기도 함.
- 그러나 더 넓은 영역에서 과학 커뮤니티에 귀속되어 완전한 참여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학에서 그들 여성 과학자들만의 하위 문화를 형성함.
  
  
(2018.10.27.)
     

2017/02/01

능력자 열전 - 김영식 선생님 편

  

   

세상에는 여러 능력자들이 있고, 그러한 능력자 중에는 공부 능력자도 포함될 것이다. 공부 능력자라고 하면 고시 3관왕 고승덕 변호사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 중에서는 아마도 김영식 선생님이 대표적인 공부 능력자로 손꼽힐 것이다. ‘김영식’이라는 이름이 이전 세대에서는 흔한 이름이라 선생님들 중에 여러 분 계시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김영식 선생님은 동양사학자인 김영식 선생님이다.

김영식 선생님은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물리로 박사 학위를 받고(1973년) 서울대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1977년). 일단 이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김영식 선생님은 서울대 화학과 교수가 되고 나서 3년 뒤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80년). 그러니까 김영식 선생님은 전혀 다른 분야에 걸쳐서 박사학위가 두 개이며 모두 세계 최상위권 대학에서 받은 것이다. 김영식 선생님은 박사학위만 두 개인 것이 아니라 교수도 두 학과에서 했다. 화학과 교수를 그만 둔 김영식 선생님은 곧바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2001년).

김영식 선생님은 1984년에 서울대에서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을 창설했다. 어느 학기에는 과학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는 기계공학과 학부생이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 면접을 보았다. 면접장에서 김영식 선생님은 성적표를 보고 그 학생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계절 학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성적이 안 좋은가?” 성적이 안 좋으니까 계절 학기를 듣는 것인데, 김영식 선생님은 공부 능력자라서 계절 학기까지 했는데도 성적이 안 좋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계공학과 학생은 그러한 질문을 받고 자기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은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흔히 물어보는 것이다. 그 학생은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나중에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가 되었다.

* 출처: 장〇〇 선생님 (<제5회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강좌>)

(2016.12.01.)

2017/01/29

독일 책은 왜 글자가 작은가



독일에서 나오는 책은 부피가 작은 대신 글씨도 8포인트 정도로 매우 작아 읽기 불편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별도의 조치 없이 그냥 근성 있게 맨눈으로 독일 책을 읽는 것이다. 헤겔 전공자인 강유원 박사는 독일 책 때문에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원서를 확대 출력해서 보는 것이다. 아는 현상학 전공자에 따르면 독일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한다고 한다.

예전에 동료 대학원생 중에 독일 사람이 있어서 독일에서는 왜 그렇게 책을 만드냐고 물었는데, 그 분도 자기네 나라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분은 종이에 손으로 메모할 때 글자를 8포인트 크기 정도로 깨알만 하게 적었다.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기보다는 독일 사람들이 이전부터 해오던 대로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살던 19세기 중반에도 독일 사람들은 읽기 불편할 정도로 책을 작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세상 모든 일에 불만이 가득한 쇼펜하우어는 독일의 출판 문화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국민의 건강관리를 담당하는 정부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출판업자들을 관리해야 한다. 활자의 작은 글씨에 일정한 한도를 책정하고, 위반자를 처벌해야 한다. (197쪽)



* 참고 문헌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문장론』, 김욱 편역 (지훈, 2005).

(2016.11.29.)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