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6

감나무에 올라간 눈노란놈

   

  

화천이의 새끼 중 한 마리는 화천이처럼 눈이 파랗고 다른 한 마리는 눈이 노랗다. 두 고양이의 이름은 각각 ‘눈파란놈’과 ‘눈노란놈’이다.

내가 감을 따려고 뒤뜰에 가니 눈노란놈이 나를 뒤따라왔다. 눈노란놈은 감나무 줄기를 발톱으로 몇 번 긁더니 잽싸게 감나무에 올라갔다.

눈노란놈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나무를 잘 탄다. 화천이도 어렸을 때 나무를 잘 탔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귀찮아서 그런지 예전만큼 나무를 타지 않는다.






(2016.11.06.)


2017/01/05

나는 왜 창의적이어야 하는가?



사람은 왜 창의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살던 대로 사는 건 쉽고 창의적으로 사는 건 어려운데 왜 굳이 창의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어제 먹던 밥에 그저께 먹던 반찬 먹으면서 적당히 살면 안 되나? 왜 세상에 없던 것,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혜정 박사는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서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일약 10위권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는 전교 꼴찌가 어느 날 갑자기 전교 10위권으로 진입한 사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교 꼴찌가 전교 10위권이 되려면 암기과목만 죽어라 공부해서 가능할지 모르나, 전교 10위가 전교 1등으로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암기과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을 넘어 1위권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교육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25쪽)


한국 언론에서 논의되는 창의성 교육의 당위성은 딱 이 정도 수준이다. 개인이 창의성을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는 1) 개인이 성공하기 위해서 2)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3) 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다. 창의성이 잘 먹고 잘 사는 수단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창의성이 그러한 수단이고 그 이외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면, 창의성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능할 경우 창의성 교육 같은 것은 필요 없어질 것이다.

세계의 두뇌가 한국에 모이고 한국이 부자 나라가 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히틀러가 유럽을 휩쓸자 유럽의 고급 인력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 같은 상황이나 한국이 선진국이라서 변방의 인재들이 알아서 몰려오는 상황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 한국 본토에 사는 사람들은 별다른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아도 돈도 많이 벌고 복지 혜택도 잘 받을 수 있다. 창의성 있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창의성을 발휘하면 한국 본토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아도 나라는 점점 발전한다. 2016년 노벨상 수상자 중 미국인은 여섯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민자 출신이다. 한국이 미국 같은 상황이라면 굳이 창의성 교육 같은 것을 안 하더라도 그렇게 염원하던 노벨상을 손쉽게 받을 수 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어마어마한 셰일가스층이 있다면 또 어떨까. 이런 경우에도 창의성 교육은 필요한가?

창의성이 꼭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연구 개발에는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고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결과물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괜히 새 상품을 내놨다가 시장 점유율이 줄어드는 기업도 있고, 새로운 사업 벌였다가 통째로 망하는 기업도 있다. 1등을 그대로 따라가는 2등 전략만 잘 펴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오히려 망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사는 데는 2등 전략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선진국 비슷한 나라에 사는 국민은 선진국 국민만큼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선진국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것을 잘 베껴오기만 해도 번영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한국은 왜 1등 국가가 되어야 하며, 한국인들은 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가?

한국 사람들은 교육열이 높다고 하는데 언론에 나오는 교육 논의를 들여다보면 정작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중등교육에서는 입시 이야기뿐이고, 고등교육에서는 노벨상 이야기뿐이다. 교육의 목적 중 하나가 생존과 변영이라는 것은 개도 알고 소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런데 그것뿐인가? 창의성이 왜 중요한지 갖다 붙일 말이 그렇게도 없나?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욕구가 있고, 그러한 욕구는 다른 짐승이나 기계와는 다른 인간 고유의 본능 같은 것이고,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고 그래서 창의성 교육이 중요하다, 이 정도 말을 갖다 붙이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같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박사나 교수라면서 창작의 즐거움 같은 것을 몰라서 그러는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어서 그런 말을 갖다 붙이면 남사스러워서 그러는가?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달러 가까이 되어도 언론만 놓고 보면 박정희 시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논의 수준이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선진국처럼 잘 살아보세’ 딱 이 정도다. 이런 나라에서는 1인당 국민 소득이 4만 달러가 되어도 싱가폴처럼 5만 달러가 되어야 한다면서 사람들을 쥐어짤 것이고, 국민 소득이 5만 달러가 되면 스위스처럼 8만 달러가 되어야 한다면서 또 쥐어짤 것이다. 교수・박사라는 사람들이 방송이나 신문에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 새마을노래인가?

(2016.11.05.)


2017/01/04

인문학과 자아 성찰



유명 입시 강사들이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방송에서 하다가 물의를 빚자, 이와 관련하여 MBC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을 통한 자아 성찰이라는 겁니다. [...] 두꺼운 책 말고도 영화, 드라마, 음악 같은 모든 콘텐츠 형식으로도 인문학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에 대한 긴 호흡의 학문인 인문학이 요즘엔 아쉽게도 스펙 쌓기 용의 토익이나 토플처럼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MBC 뉴스, 2016년 7월 4일)


인문학의 본질이 자아 성찰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언어철학에서 명제 태도를 연구하는 것은 자아 성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과학철학에서 모형이 실제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구하는 것은 자아 성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수의 본성을 묻는 수리철학은 자아 성찰에 어떤 도움을 줄까? 19세기 조선-청 외교 관계를 연구하는 동양사 전공자는 어떤 자아 성찰을 할까? 경제사 전공자는 통계 자료를 붙들고 어떤 자아 성찰을 할까?

인문학의 본질이 자아 성찰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어떤 학자가 그런 말을 했는지, 했다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져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아 성찰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그것과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

기자들 중에 인문대 출신들도 꽤 있을 텐데 지상파 뉴스에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기자들이 학부 때 잘못 배운 것이 뉴스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내가 유학동양학부에서 전공 수업 들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교수와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마치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이상한 소리를 해서 깜짝 놀란 적이 가끔씩 있었다. 어떤 학부생들이 “모든 학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해서, 나는 ‘아니, 저게 무슨 격물치지 성의정심 하는 소리야?’ 하고 의아해했는데, 다른 학생들도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해서 더 놀랐던 적이 있다.

어쩌면 인문학과 자아 성찰을 동일시하는 것은 성리학의 잔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아 성찰 같은 소리 하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동양철학에 대해 웬만큼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의문이다.

* 링크: [MBC] 요점정리식 ‘인문학 강의’ 성행에 득실 논란

( http://imnews.imbc.com/replay/2016/nwdesk/article/4017968_19842.html )

(2016.11.04.)


2017/01/03

이말년의 본명

대학원 선배가 최근에 <이말년 서유기>를 절반 정도 보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말년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구성도 좋은 것 같지도 않다고 하길래, 나는 이말년 만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정신을 살짝 놓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배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이말년’이라는 이름이 본명인가?” 이말년의 본명은 이병건인데 순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본명이 뭔지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본명은 아니에요. 말년 병장처럼 살고 싶다고 이말년이라고 필명을 지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누가 애 이름을 ‘말년’이라고 짓겠어요?” 내 말에 선배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쎄, ‘말년’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자기 아들 이름을 ‘백수’라고 짓는 사람도 있어.”

그 선배의 사촌 형이 만화가 곽백수다. ‘곽백수’라는 이름은 본명이라고 한다.

(2016.11.03.)

2016/12/31

『대통령의 글쓰기』의 인세



글쓰기 책 중에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이 있다. 실용적인 글쓰기나 말하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인 것 같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은 김대중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실 행정관으로 3년 일하고 노무현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5년 일했다. 강원국은 8년 간 청와대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두 대통령에게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서 『대통령의 글쓰기』의 인세를 모두 노무현 재단과 김대중 도서관에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 책(『대통령의 글쓰기』)을 쓸 때요, 저는 2천 부 팔릴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노무현 재단하고 김대중 도서관에 당당하게 가서 모든 인세를 절반씩 드리겠다고, 천 원 한 장 안 가져가겠다고 하면서 계약금 받은 것을 드렸어요. 그런데 책이 막 팔리는 거예요. 한 3만 권 넘어가니까 가슴이 막 떨리는 거예요. 인세를 받지 않았는데 (인세가) 억 단위로 가니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권 여사님이 보고를 받으시고 노무현 재단 사무총장한테 ‘그 친구 밥벌이가 그 건데 왜 그런 걸 냉큼 받냐, 받은 것도 돌려주라’고 하셨대요. 사무총장이 저를 불러서 받은 건 돌려줄 수 없고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라구요.”

『대통령의 글쓰기』는 10만 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 링크: [김어준의 파파이스] #118 - 최순실 특집+1 [2016.10.28.]

( www.youtube.com/watch?v=7tQb4Xjswxo )

(2016.10.31.)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