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4

[심리철학] Putnam (1979), “The Nature of Mental States” 요약 정리 (미완성)

   
[ Hilary Putnam (1979), Philosophical Papers, Vol. 2: Mind, Language and Re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429-440.
First published as “Psychological predicates”, in Capitan and Merrill (eds.) Art, Mind and Religion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967). ]
  
  
  I. Identity questions
  II. Is pain a brain state?
  III. Functional State versus brain state
  IV. Functional State versus behavior-disposition
  V. Methodological considerations
  
  
■ 이 논문의 주제 [p. 429]
- 심리철학의 전형적인 관심사
• (1)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2) 고통은 두뇌 상태(brain state)인가?
• (3) 고통 개념을 분석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이 논문은 (2)에 대해서 다룸.
  
  
  I. Identity questions
  
429-30]
- “고통은 두뇌 상태인가?”(또는 “시점 t에 고통을 가지는 속성으로 두뇌 상태인가?”)
- 이 문제를 논의하려면 분석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성장은 이상한 규칙이 필요함.
• 이 암묵적인 규칙들은
(1) ‘A인 것은 B인 것이다’(being A is being B)라는 형식의 진술은, 용어 A와 B의 의미를 따를 때만 옳을 수 있다.
(2) ‘A인 것은 B인 것이다’라는 형식의 진술은, 환원적일 때만 철학적으로 정보적일 수 있다.
- 이 논문에서 퍼트남은 ‘속성’(property)’이라는 용어를 blanket term으로 사용함.
• 1항 술어나 다항 술어 또는 함수(functors)로 표상할 수 있는 어떤 것.
- ‘개념(concept)’이라는 용어는 표현들의 동의어 집합(synonymy-class)과 동등한 것으로 사용함.
• 예) 온도라는 개념은 ‘온도’라는 단어의 동의어 집합과 동등할 수 있음.
  
(1) 온도 개념은 온도라는 단어의 동의어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열이 온도와 동의어라고 가정한다면, “온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온도는 열이다” 또는 “온도 개념은 열의 개념과 같은 개념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만약 이 질문을 “‘온도 개념’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해결될 수 없다.
(2) 온도의 속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개념의 경우와 동일하게 답하는 경우가 있다. ‘속성 P₁이 속성 P₂와 동일하다’라는 진술은 P₁과 P₂가 동의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이는 속성과 개념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Carnap의 주장)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예) “온도는 평균 분자운동에너지를 의미한다”는 속성의 동일성에 대하여 참인 진술이지만, “온도의 개념은 평균 분자운동에너지의 개념과 같다”는 거짓인 진술이다.
  
- 반론 (1): “고통은 두뇌 상태다(Pain is a brain state)”라는 진술이 영어의 규칙을 위반한다. 내가 두뇌상태 S라는 것을 모르면서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이 두뇌상태 S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 답변 (1): 열은 분자의 운동에너지다. 내가 난로의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가 높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난로가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라는 것이 거짓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온도 개념은 평균 분자운동에너지의 개념과 같지 않지만 온도는 평균 분자운동에너지이다.
  
- 반론 (2): “고통은 두뇌 상태다”나 “고통상태는 두뇌 상태다”는 이해가능하지 않다.
- 답변 (2): 과학적 방법론의 모호함에 대한 고찰은 이 문제를 “물은 H₂0다”, “빛은 전자기적 복사다”, “열은 평균 분자운동에너지다” 같은 경험적 환원으로 이끈다.
  
- 반론 (3) ‘P₁은 P₂이다(P₁ is P₂)’에서, ‘is’가 경험적 환원을 포함하고, 속성 P₁, P₂가 (a) 시공간적 영역spatio-temporal region으로 관련되고 (b) 이 영역이 하나이며 같을 때, ‘‘P₁은 P₂이다’는 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온도가 평균 분자운동에너지다”는 이것이 같은 물리적 공간에 속하는 속성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적인 환원이고, “고통은 두뇌상태다”라는 것이 이 둘이 같은 공간적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적인 환원이 아니다.
- 답변(3): 거울에 비친 상은 어떤 대상에서 거울로 반사된 빛이고 그 대상은 거울 표면에서 3피트 떨어져 있다는 진술이 가능하다.
  
- 반론 (4) “고통상태들은 이러저러한 두뇌상태들이다”와 같은 진술과 결합하는 신경생리학적 법칙들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모든 술어들은, “아파함은 이러저러한 두뇌상태들과 관련이 있다”와 결합하는 같은 신경생리학적인 법칙들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이 두뇌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진술과 반대되는 입장인 ‘고통은 두뇌상태다’라는 진술은 방법론적 근거가 없다.
- 답변 (4): 양자에서 예측되는 것이 같다고 해도, 두 경우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구분된다. “빛은 전자기적 복사다”와 “빛이 전자기적 복사와 관련이 있다”라는 진술이 있을 때, 후자에는 “빛이 항상 전자기적 복사와 관련되는가?” 또는 “빛이 전자기적 복사와 동반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전자는 후자에 동반되는 불필요한 질문들을 제거한다.
  
- 반대되는 모든 논증들이 설득력 없다면 우리는 고통이 두뇌상태라는 진술과 고통상태가 두뇌상태라는 진술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다음 두 가지 진술이 가능하다.
(1) “Pains are brain state”는 “영어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며 “사용의 범위”와 관련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게 유의미하다.
(2) 'Pains are brain state'는 “의미의 변화”나 “사용의 범위”와 관련하여 무의미하다.
  
- 퍼트남의 입장은 (1)과 (2) 모두 아니다. “의미의 변화”나 “사용의 범위”의 정의가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과 (2)를 주장하지 않고 “의미의 변화”를 사이비 쟁점으로 다룬다면, 어떻게 이 질문을 논의할 수 있는가? 퍼트남은 “고통은 A이다(pain is A)”라는 형태의 진술에서 ‘고통’과 ‘A’는 의미상의 동의어가 아니며 A를 경험적이고 종적인 근거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II. Is pain a brain state?
  
- 퍼트남의 전략은 고통이 두뇌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선험적인 근거가 아니라 다른 근거를 통해 논증하는 것이다. 즉, 고통이나 고통 상태는 두뇌의 물리-화학적 상태가 아니라 유기체 전체의 기능적인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개념이 필요하다.
  
(1) 확률적 자동기계(Probabilistic Automaton): 다양한 출력값을 갖는 튜링기계. 이것은 주어진 감각 입력값(Sensory input)에 대해서 운동 출력값(Motor output)을 산출하는 기계다. 이 기계는 튜링기계와 비슷하지만 결정론적이지 않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2) 어떤 체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 of a system): 경험적으로 주어진 한 체계는 여러 다른 확률적 자동기계의 ‘물리적 실현’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체계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 주어진 체계 S에 대한 기술은, S가 주어진 기계표의 이행 가능성에 따라 각각 감각 입력값과 운동 산출값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고 구분된 S₁, S₂, S₃ ... Sn 상태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술에서, 기계값은 기술과 관련된 S의 기능구조(functional organization)가 되고, 주어진 체계 S가 시점 t에 상태 Si에 있을 때 Si는 주어진 S에 대한 기술의 전체상태(Total State)가 된다. 이 기술과 관련된 S의 전체 상태를 아는 것은 주어진 Si에서 이 체계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아는 것을 포함하지만, 이 Si의 물리적 실현이 무엇인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Si는 기술에 의해서만 ‘암묵적으로’ 주어진다.
  
- “고통을 느끼는 것은 유기체의 기능적인 상태이다”라는 가설은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1)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유기체는 확률적 자동기계다.
(2)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유기체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특정 종류의 기술을 갖는다.(즉,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은 적절한 종류의 기능조직을 가지는 것과 같다.)
(3)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유기체도 (2)에서 언급한 기술을 갖는 부분들로 나뉘지 않는다.
(4) (2)에서 언급한 종류의 모든 기술에 대하여, 그 유기체가 고통을 느끼는 상태에 있다는 기술을 만족하는 감각 투입값의 부분집합이 존재하고, 오직 그 경우에만 그 유기체는 고통을 느낀다.
  
이 가설은 두뇌상태 가설보다는 덜 모호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1) 유기체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능조직에 종류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2) (4)에서 언급한 감각 투입값의 부분집합에 대한 분류에 대해 더 궁금해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논의할 수 있다.
  
(1)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a) 기능조직은 선호함수(preference function)를 갖거나 선호에 관하여 부분적으로 순서매기기(partial ordering)를 해야 한다.
b) 귀납 논리가 있어야 한다.(즉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c) (4)에서 언급된 감각 투입값의 특정한 부분집합들을 전달하는 “고통 센서(pain sensors)”가 있어야 한다. 즉 기계가 해를 입고 있다는 신호를 감각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필요하다.
  
(2)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 구분되는 부분집합 안에 있는 투입값은, 그 기계의 선호함수나 순서에 대하여 높은 부정적 값을 가진다.
  
- 이러한 가설은 모호하기는 하지만 오늘날 “물리-화학적 상태” 가설보다는 덜 모호하며, 수학적이고 경험적인 종류의 연구를 하는데 받아들여질 수 있다.
  
  
  III. Functional State versus brain state
  
- 두뇌상태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a) 두뇌상태는 두뇌의 물리-화학적 상태일 뿐이다.
(b) 그들의 주장은 이원론이나 심리주의(mentalism)와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능주의 는 이원론과 양립가능하다. 몸과 “영혼”이 구성하는 체계는 완벽하게 확률적 자동기계가 될 수 있다.
(c) 스마트는 두뇌상태 이론은 물리적 속성만을 고려하며 “비물리적 속성”이 이해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에서 정의한 전체 상태와 “투입값(inputs)”은 그 자체로 정신적이지도 않고 물리적이지도 않다.
(d) 두뇌상태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뇌의 상태가 물리-화학적 상태가 아니라면, 이 이론은 공허하다.
  
- 두뇌상태 이론가들은 어떠한 유기체든 고통을 느끼는 것은, (a) 그 유기체가 적합한 물리-화학적 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b) 그 뇌 구조가 그러한 물리-화학적 상태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이 주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1) 이는 논의가 되는 물리-화학적 상태는 포유류의 뇌, 파충류의 뇌, 연체동물의 뇌 등에서 가능한 상태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동시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물은 뇌 구조를 갖지 않거나 이 특정한 물리-화학적 상태를 갖지 않아야 한다.
(3) 그러한 물리-화학적 상태가 밝혀지더라도, 이 뇌 상태는 고통을 느끼는 외계 생명체에서도 발견되어야만 방법론적으로 확실하다.
  
- 이러한 상태가 발견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눈과 문어의 눈처럼 다른 세포가 진화했으나 비슷한 구조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평행적인 진화는 ‘하나이고 동일한’ 고통에 대한 “상관물(correlate)”으로 이끌 수 있다.
- 두뇌상태 이론가들은 고통만 두뇌상태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심리 상태가 특정한 두뇌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과 문어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적 술어가 있지만 두 경우 그들의 물리-화학적 “상관물”이 다르다면, 두뇌상태 이론은 붕괴한다.
  
- 우리는 유기체의 ‘행동’을 바탕으로 그들이 아프거나 배고프거나 하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두 체계의 행동의 유사성이 기능구조의 유사성의 근거가 되고, 세부적인 물리적 상태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보다 약한 근거가 된다. 게다가 우리는 각각의 비슷한 이행가능성과 종들 사이의 비슷한 행위를 가지는 심리적 상태를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동물의 불만족스러운 행동이 물을 마시는 것으로 이행되지 않거나 그 이후에 물에 대한 포만이 이어지지 않을 때, 그 동물이 목마르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즉, 어떤 동물이 특정 상태에 있다는 근거는 그 동물이 특정한 종류의 기능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른 종들에 대한 심리학적 법칙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이론은 주어진 심리학적 상태에 대하여 필요충분적인 기능적 구조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두뇌상태 이론가들은 뇌에 대한 종 독립적인 신경-생리학적 연구를 기대해야만 하며, 이는 심리학에 대한 종 독립적 연구보다 훨씬 전망이 어둡다.
  
  
  IV. Functional State versus behavior-disposition
  
-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행동 성향이라는 이론은, 어떤 유기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우리는 두뇌상태나 기능구조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하지만 이는 이점이 아니다. x가 A라는 것을 검증하는 방법에 관한 진술은 A의 개념을 다룰 수는 있어도 A의 속성은 거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것이 뜨겁고 차갑다고 할 때 그것의 평균 분자운동에너지를 생각하지 않으므로 열은 평균 분자운동에너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필요한 것은, 그들이 열의 표지들(indications)로 가지는 언급들이 평균 분자운동에너지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에 해당하는 행동적 표지들은 적절한 종류의 ‘기능적 상태를 가짐’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 “x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성향”을 제외한다면, 요구된 행동성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반대로, 기능적인 상태는 고통이라는 관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다. 즉, 기능적인 상태는 유기체의 기능기관(Functional Organization)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각 투입값을 받아들이는 상태다. 
- 기능적 상태는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기능적 상태는 기능적 구조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감각적 입력값들을 수용하는 상태로 상세화 된다. 이 역할은 (1) 입력값에 반응하는 감각기관들은 신체의 위험요소를 감지하는 기능과 (2) 이 입력값은 그것의 실현자가 어떤 물리적 상태이건 상관없이 해당 유기체가 매우 회피하고자하는 조건을 나타낸다. 
- 이 회피(avoiding)라는 출력값이 항상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유기체가 다른 보다 상위의 목적의 달성을 위해 회피하지 않는 경우가 아닌 한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계는 감각 투입값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상태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 언급된 “행위”가 말초적 행위(peripheral behavior)이고 자극이 말초적 자극(peripheral stimuli)이라면 이 이론은 명백하게 거짓이다.
(1) 운동신경을 절단한 A와 B는 행위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다.
(2) A의 신경을 그대로 두고 B의 신경을 절단한 경우 A는 고통을 느낄 것이고 B는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3) A는 신경을 절단하고 B는 신경은 그대로지만 고통행동을 참는다면, A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B는 고통을 느끼지만 A와 B의 행동은 차이가 없다.
  
  
  V. Methodological considerations
  
- 고통을 느끼는 것이 기능적인 상태라는 것에 대한 경험적 근거들을 탐구했다. 이 과정에서 기능적 상태가 고통과 종 독립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고, 그 결과 기능적인 상태는 동일성의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기능적인 상태가 고통과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고려가 필요하며 이 과정은 환원적 과정이다.
  
(1) 심리적 상태와 기능적 상태의 동일성: 심리 법칙들이 동일성 문장과 “어떤 유기체가 어떤 기술을 가진다”는 진술에서 따라 나온다.
(2) 기능적인 상태는 단지 유기체의 고통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통을 설명한다.
(3) 이 동일성은 다른 무용한 문제들을 제거할 수 있어야한다.
    
  
(2017.02.15.)
    

한국은 이상한 수포자(수학포기자)의 나라인가



홈쇼핑에는 쉽고 힘 안 들이고 재미있게 살을 뺄 수 있다는 운동기구가 종종 나온다. 정말 그런 기구가 있다면 코카콜라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잘 팔릴 것이며 헬스클럽은 죄다 망할 것인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매번 새 기계가 나오고 예전 상품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몸이 좋은 사람들은 절제와 인내를 강조한다. 닭가슴살이나 사료 같은 것을 먹으며 쇳덩이를 들고 기계 위에서 뛰라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홈쇼핑 광고에서처럼 쉽고 재미있게 몸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세상 일이 거의 다 그렇다. 웬만큼 재미있고 중독성 있는 일은 나쁜 일 아니면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운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무언가를 배우거나 성취하는 일은 대부분 일정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거의 재미없다. 그리고 그렇게 참고 배운다고 해서 잘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가끔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겁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일을 잘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못하는 주제에 자기가 잘한다고 착각까지 해서 더더욱 실력이 안 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그런 변태적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파인만이 “물리학은 재미있다”고 했다지만, 그건 파인만이니까 물리학이 재미있는 거지 물리학이 재미있어서 파인만이 된 것이 아니다.

세상 일이 다 그러한데 왜 공부만은 쉽고 재미있어야 할까? 피아노를 배울 때도 왼손 따로 오른손 따로 치며 지루함을 참고, 수영 배울 때도 물 먹어가며 참는데, 왜 공부는 즐기면서 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면 한국이 1위, 핀란드가 2위를 한다고 한다. 한국 학생의 절반이 수학을 포기하는 데도 한국이 1위를 한다는 건, 다른 나라도 한국보다 사정이 낫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국처럼 쥐어 짜내든 핀란드처럼 살살 달래가며 하든 절반 이상은 수학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수학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도는 32개국 중 한국이 28위, 핀란드가 29위다. 이는 수학교과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부분의 지적 능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개념을 이해하면 수학을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학적인 개념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념을 이해하도록 하지 않고 문제부터 풀게 하는 게 문제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문제부터 풀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미지로 배우는 수학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지가 안 떠오르는 애들에게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중고등학교 때를 떠올려 보면 같은 선생님한테 배워도 잘하는 애들은 잘 이해했고 못하는 애들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한겨레>는 미국 뉴욕주에서 사용하는 수학교과서를 소개한다. 그 교과서는 소인수분해 단원을 ‘약수 찾기’ 게임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중1 수준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편미분이나 벡터 같은 건 어떻게 하나? 나도 그게 궁금하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같은 시민단체에서는 교과서의 범위와 수능의 범위를 지금보다 20-30%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수학을 포기할 것이며 상위권 학생들은 배울 것도 못 배우게 된다. 실제로 7차 교육과정에서 문과생한테 미적분을 안 가르쳤는데, 그때도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은 줄지 않았고 신입생들한테 미적분 가르치느라 괜히 대학만 고생했다.

수학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학을 포기해서 대학을 못 가면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는 것이 문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수학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이 수학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건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하는 소리다. 머리 좋고 마음 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머리 좋은 줄 안다. 그건 학생들을 괴롭히자는 것밖에 안 된다. 그들은 TKO패 당할 선수한테 조금 더 노력하라는 건 그냥 맞아죽으라는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들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현실적이다.

* 링크(1): [한겨레] 재미없고, 범위는 넓고, 이상한 ‘수포자’들의 나라

( 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83286.html )

* 링크(2): [한겨레] ‘수포자’의 나라는 어디인가? / 김민형

( 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85033.html )

(2015.04.06.)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