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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한국어로 대화하는 외국인 교환학생들

     

외국인들끼리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학교에서 가끔씩 본다. 무리에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고 출신 국가가 서로 다르면 공통 언어가 한국어가 된다.
  
학부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자주 가는 순대국밥집에 외국인 네 명이 앉아 있었다. 탁자에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음식점이니 교환학생들이었을 것이다.
  
남자 한 명은 평범하게 생긴 중국 남자였다. 동아시아 남자가 평범하게 생겼다는 것은 못 생겼다는 말이다. 그 옆에는 국적을 추정할 수 없는 백인 남자가 있었다. 혼자 앉아 있어도 잘 생겼는데 옆에 있는 남자 덕에 더 잘 생겨 보였다. 맞은 편에는 일본 여자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평범하게 생겼다.
  
외국인들은 말도 안 되는 한국어로 말도 안 되는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여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 여자들은 백인 남자에게만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을 계속 물었다. 중국 남자에게는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중국 남자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저것 묻던 일본 여자가 백인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똔 요-자 좋아해요?” 백인 남자를 보는 일본 여자의 눈은 꼭 새로 산 바둑돌처럼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백인 남자는 눈을 감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일단 너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표현을 가르쳐줄까 말까 고민했다. 백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얽-굴 쌍-관 없어욝.” 나쁜 놈이었다. 괜히 헛된 희망을 심어주다니.
  
백인 남자의 말을 들은 일본 여자는 밝은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아아, 요-자면 다 좋아요?” 백인 남자는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2018.11.29.)
     

2019/01/26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대학원 와서 학부 수업을 또 수강하고 있다. 원래 청강하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여 결국은 수강하게 되었다. 4학년 과목인데 조금 독특한 수업이라 조별과제까지 하게 되었다. 경제학과 학부 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스물네 살에 학부를 졸업하고 서른네 살에 다시 조별 과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선생님은 조를 꾸려서 기말 보고서를 쓰고 그 내용을 발표하되 주제는 자유롭게 선정하고 경제학과 관련이 없어도 된다고 하셨다.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에서 시작해서 동태적 일반 균형을 거쳐 경제성장 모형까지 다루는 수업인데, 보고서 주제와 발표 형식을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하자, 조별 과제에 특이점이 오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조원들에게 가능한 위험에 대해 말했다. 발표 전주 수업에서 선생님이 루카스 논문을 제목부터 읽으면서 논문 형식에 대해 꼼꼼히 설명했는데 갑자기 왜 그랬겠느냐, 이건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주제 자유 발표 형식 자유라고 해서 막 나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거다, 라고 나는 학부생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선생님에게서 <화폐금융론> 수업을 들은 학생이 당시 조별 발표의 경험에 근거하여 나의 위험 감지가 틀린 것 같다고 반박했다. 결국, 원래 계획대로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을 자유롭게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다행히 발표는 무사히 끝났으며 아무런 화도 입지 않았다. 나의 위험 감지는 틀린 것이었다.
  
학부생들이 그림을 구상할 때 나는 이미 작품을 완성한 상태였다. 학부생들이 나의 잠들어 있던 예술혼을 깨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구상하는 데 5분, 구글에서 그림과 사진을 검색하는 데 5분, 그림과 사진을 그림판으로 합성하는 데 20분, 그렇게 총 30분이 걸렸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서 그림판으로 합성했다.
 
 
 
 
작품명은 <이보시오, 내가 로빈슨 크루소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이다. 작품 설명을 보내 달라고 해서 A4용지 2쪽 반에 걸쳐서 작품을 설명했다. 물론 그 작품 설명이라는 것은 토씨 하나까지 전부 개소리인데 굳이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과학철학에서 경제학 방법론에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것과 별개로, 시중에서 떠도는 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부당한 개소리다. 경제 모형에는 피가 도는 사람이 안 들어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당당하게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공 상태의 완전 탄성체를 가정하는 물리학자들한테는 짹 소리도 못 하면서 경제학 가지고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얼굴이 심영의 얼굴인 것은, 자기가 경제 모형 속의 행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로빈슨 크루소 2기 모형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일 수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 모형이 실제 세계를 표상한다는 실재론적 견해가 깔려있다. 실재론적 견해를 심영을 통해 표현한 것은, <야인시대>가 방영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심영은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에서 개소리나 지껄이며 근본 없이 살다가 대학원에 와서 아카데미즘의 불벼락을 맞고 회개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사람이 되어 잘 살아보려고 하고 있었다. 아직은 딱히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새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학부생들이 근본 없이 막 살던 과거의 나를 일깨웠다. 정말이지, 잠들어 있던 내 예술혼을 깨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2018.11.26.)
    

2019/01/22

철학과 신앙의 괴리

     

교회를 다녀서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기독교와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비교적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도 “저도 교회를 다니지만 창조과학이 어떻게 과학입니까?”라고 말해도 별로 거리낄 것이 없고 듣는 사람들도 대체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비-신자였다면 내가 말하면서도 꺼리는 바가 있었을 것이고 듣는 사람들도 곱게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 어떤 할아버지가 나에게 철학과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아는 사람 중에 원래 신앙이 있었으나 과학을 접하고 신앙을 버린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 과학철학을 하면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철학도 모르고 과학도 모르는데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것을 묻는다.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그러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일단 철학을 잘한 다음에나 철학과 신앙의 관계를 고민을 하지, 철학도 쥐뿔 못하는 놈이 철학과 신앙의 괴리에서 고민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면 그걸로 됐지 내가 철학도 못해 죽겠는데 신학적인 고민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예쁘고 똑똑한 여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교회에서 내가 거의 유일한 청년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교회를 매주 꼬박꼬박 나간다. 내가 이 정도 하면 신도 나를 갸륵하게 봐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이 없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 할아버지는 나에게 철학과 과학과 신앙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할 것 같다고 답했다.
  
첫 번째는 어떻게든 그 세 가지를 맞추어보려는 태도다. 말을 지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맞는데 한 방에 다 창조한 것이 아니고 각 종으로 분화하게끔 창조를 하셨다고 할 수도 있고, 창세기 1장에 하루에 무슨 무슨 작업을 했다고 나오는데 그 하루가 꼭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를 가리킨다는 보장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신학자가 하면 되지 굳이 일반인들이 할 일은 아니다. 해봤자 피곤하고 성과도 없고 먹고 사는 데 도움도 안 되고 연구 실적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두 번째는 그냥 그러한 괴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한 건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최종적인 해결책이 나온 문제는 거의 없거나 매우 적다. 대충 어디까지는 맞는데 해결책이 안 나왔거나 해결책이 곧 나오는 줄 알았는데 어디서 다른 이론이 튀어나와서 그 판을 다시 어질러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마당에 철학과 과학과 신앙이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괴리가 있으면 ‘아, 혼란하다, 혼란해’ 하면서 그냥 그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세 번째는 학부 때 천주교 신자인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창조론이 옳은가, 진화론이 옳은가? 월화수목금토까지는 진화론이 옳고 일요일에는 창조론이 옳다는 것이다. 나는 세 번째 태도를 지지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일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창조론이 옳다는 수정된 버전을 지지한다. 오전 11시에 오전 예배가 시작되는데 예배 시작 30분 전부터 예배당에 앉아있으니까 오전 10시 30분부터 옳고, 내가 오전 예배를 보고 점심까지는 교회에서 먹는데 오후 예배는 안 보고 집에 오니까 오후 1시 30분까지 옳다. 그 선생님이 나처럼 시간까지 구분하지 않고 요일만 구분하는 것은 나보다 신앙심이 깊어서 일요일에는 안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18.11.22.)
    

2019/01/18

연구의 급

     

우석훈 박사는 자신을 C급 경제학자라고 소개한다. 왜 그렇게 소개하는지는 모르겠다.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급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김규항은 B급 좌파이고 우석훈은 C급 경제학자다. 누가 우석훈 박사를 A급 경제학자라고 불러서 그렇게 소개하는 건가?
  
우석훈 박사는 C급 경제학자라는 말을 쓰면서 A급 경제학자부터 C급 경제학자까지 정의내린 적이 있다. A급 학자는 경제학의 흐름을 바꾼 사람이다. 케인즈나 프리드먼이나 루카스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B급 학자는 A급 학자들이 만든 이론을 보완해주는 사람이다. A급 학자들이 이론의 큰 틀은 제시하더라도 세부사항까지 모두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B급 학자들이 A급 학자가 만든 이론의 빈틈을 채운다. C급 학자는 A급 학자가 만들고 B급 학자가 보완한 이론이 현실에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하는 사람이다. 외국 이론 가져와서 한국에 맞나 안 맞나 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가 C급 학자이고, 우석훈 자신이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유영제 교수의 『이공계 연구실 이야기』에 나온다. 이 책에서 유영제 교수는 연구라고 다 같은 연구가 아니고 연구마다 급이 있다고 말한다. 이공계에서 연구의 급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고 한다.
  
• A+급: 연구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고, 연구 결과의 파급 효과가 매우 큰 경우. 그래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거나 방법론의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 또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창출할만한 영향력이 기대되는 연구
  
• A급: 기존의 연구를 한 단계 레벨업 시킬 수 있는 연구 방법 제시 또는 연구 결과의 창출이 기대되는 연구
  
• B+급: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를 조사, 시험하여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최적화된 조건을 찾아내려고 하는 연구, 기존 연구의 개선, 개량 수준의 연구
  
• B급: 기존 보고된 연구와 비교할 때 연구 대상이나 재료를 바꾼 연구. 그래도 연구 결과로서 새로운 데이터의 제시 및 우리의 지식 창고를 풍부하게 한다는 면에서 가치가 있다.
  
이공계 기준에 따르면 우석훈 박사는 B급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 유영제, 『이공계 연구실 이야기』 (동아시아, 2009), 136쪽.
  
  
(2018.11.18.)
    

2019/01/15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

     

동료 대학원생들과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번역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 중에 토마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번역한 분이 있다. 출간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 400부 정도 팔렸다고 한다.
  
동료 대학원생 중 한 명은 어떤 어머니와 아들을 서점에 와서 『순수이성비판』이나 『논리철학논고』 같은 책을 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들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그런 아들보고 읽으라고 그런 책을 사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지성 같은 사람들에게 속아서 읽지도 못할 책을 샀던 모양이다. 이게 무슨 사회적인 낭비인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차피 호구들은 언제든지 돈을 갖다버릴 준비가 되어있고 어떻게든 갖다버리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 돈을 이지성 같은 사람들이 가져가기 전에 괜찮은 사람들이 가져가는 것이 사회정의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책을 사거나 읽어도 하나 도움 안 될 책을 살 것이다. 이왕이면 출판될 가치가 있는 책을 사게 만들어 출판될 가치가 없는 책을 덜 사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좋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코페르니쿠스 혁명』 같은 책을 사게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책 홍보부터 바꾸어야 한다. 책에 띠지를 둘러야 한다. 사람들은 토마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모르지만 『과학혁명의 구조』까지는 안다. 그러면 띠지에 이런 문구를 적어야 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가려진 또 하나의 역작”
  
이거 하나 가지고는 약하다. 최재천 교수를 엮어야 한다. 최재천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안다. 최재천 교수하면 떠오르는 것이 10년 전에는 개미였지만 지금은 통섭이다. 통섭과 토마스 쿤을 엮으면 가능성이 있다. 토마스 쿤은 물리학 박사이면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넘나든 사람이니까 최재천 교수 통섭 강연에 등장할 만한데,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토마스 쿤 이야기는 안 하고 엘 고어와 그의 룸메이트인 토미 리 존스 이야기만 한다. 최재천 교수 강연에 토마스 쿤의 일화가 등장하고 그에게 추천사 하나만 받는다면 판매 부수가 1만 권까지는 어렵지 않게 갈 수도 있다. 최재천 교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러든 말든 나는 추천사도 미리 정해놓았다. “토마스 쿤의 진면목을 만난다. - 최재천 교수”
  
이러한 홍보 문구가 다른 출판사들의 홍보 문구와 다른 결정적인 지점이 있다. 바로 단 한 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판사들은 어떻게든 책을 팔아먹으려고 거짓말과 허위사실로 뒤범벅된 홍보 문구를 쓰지만, 나의 홍보 문구는 한 마디도 거짓이 없다. 호구들이 흘리는 돈을 주워온다고 해도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켜야 하는 법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가려진 또 하나의 역작”이다. 역작인 것도 맞고 한국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도 맞다. “토마스 쿤의 진면목을 만난다”는 문구도 과장 광고가 아니다. 진면목을 만난다고 했지 알아볼 거라고는 안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 대학원생이 물었다. “그러면 라이헨바하는 어떻게 팔면 좋을까요?” 대학원 선배 중에는 라이헨바하 책을 번역한 분도 있다. 라이헨바하 번역서를 파는 것은 쿤 번역서 파는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다. 그런 어려운 일은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2018.11.15.)
     

2019/01/14

김난도 교수 같은 소리

     

점심을 먹으려고 학생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에 서 있던 학부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엄마하고 통화했는데 엄마가 나보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너는 어려서부터 지구과학 좋아했으니까 지구과학 연구하고 살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저 집 엄마는 속도 좋네. 김난도 교수 같은 소리나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정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나의 외할머니는 인생은 즐기기에는 짧고 고통 받기에는 길다고 말씀하셨다.
  
학부생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엄마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별로 만족하시는 것 같지 않았어.”
 
김난도 교수 같은 소리를 해도 되는 집이었다.
  
  
(2018.11.14.)
    

2019/01/12

우정교회 부흥회

    
주말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다. 초청 연사로 어느 유명한 목사님을 모셨다. 내가 그 목사님을 실제로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는데 무대 장악력이라든지 쇼맨십 등이 굉장했다. 괜히 그 교회에 신도들이 몰리는 것이 아니었다.
  
부흥회에서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그 목사님은 주례도 많이 보았는데 주례 볼 때마다 “하나님, 이 가정에 아들을 하나 주고 딸을 하나 주시되 반드시 딸을 먼저 주시고 아들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을 먼저 낳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 목사님에 따르면, 딸은 어느 정도 자라면 동생을 돌보기 때문에 부모의 육아 부담이 줄어들지만 아들은 어느 정도 커도 자기밖에 몰라서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기도를 하면 대부분 정말로 딸을 먼저 낳고 아들을 나중에 낳는데, 가끔씩 아들을 먼저 낳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가끔씩 그런 일이 있으면 그 목사님은 심란해진다고 한다. 간절히 기도하고 구했는데 이렇게 응답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목사님을 안 쓸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을 구했다. “하나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왜 그런 응답을 주십니까” 하면서. 어느 날 이런 응답이 왔다고 한다. “네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뱃속에 아들이 있었느니라.”
  
이 이야기에 부흥회에 온 아저씨・아주머니・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도 크게 웃어서 교회가 터지는 줄 알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뽀빠이 이상용 테이프의 교회 버전인가 싶었다.
   
   
(2018.11.12.)
     

2019/01/08

주책 맞은 사람들의 동물 기르기

     

천성이 주책 맞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책을 떤다. 교회를 다녀도 주책 떨고 공부를 해도 주책 떨고 자식을 키워도 주책 떤다. 그런 사람들이 동물을 키울 때라고 얌전할 리 없다.
  
그런 사람들은 고양이 똥을 보고서도 좋게 똥이라고 하지 않는다. “맛동산”이라고 부른다. 고양이 똥이 고양이 똥이지 무슨 놈의 맛동산인가. 자기가 싼 똥은 똥이고 고양이 똥은 맛동산인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맛동산을 못 먹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고양이를 키우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집사”라고 부른다. 고양이가 그 집 주인이고 자기가 고양이를 모신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그 집 주인이면 그 집 등기부등본에는 고양이가 소유주로 등록되어 있나? 아니다. 등기부등본에는 분명히 집사가 소유주로 되어있다. 그러면 고양이가 실소유주인가? 그 집 고양이한테 집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제가 이 집 주인이라는 거, 그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 아시죠?”라고 하나?
  
  
(2018.11.08.)
    

2019/01/06

외고 학생들의 황순원 문학 UCC 자문 요청

어느 외고 학생들에게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무슨 프로젝트에서 황순원을 연구하고 있는데 조언을 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황순원 『소나기』의 주요 장면을 UCC로 제작할 준비를 하며 황순원에 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다가 내가 블로그에 쓴 <황순원 문학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라는 글을 읽고 연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황순원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망상을 써놓은 수준의 글이 정식 학술 논문으로 나와서 미친놈들 다 죽어라 하는 취지로 글을 쓴 것일 뿐이다.


학생들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대학은 가야겠고, 헛짓거리 몇 개 한다고 대학을 가는 건 아니지만 남들만큼 헛짓거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 하니 황순원 문학 가지고 UCC를 만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UCC라니. 나는 노무현 정권 이후로 UCC라는 말을 못 들어본 것 같다. 분명히 나보다 나이 많은 교사나 업체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 학생들이 필요 이상으로 공부하는 것이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잘 쉬고 운동 좀 하고 고기 많이 먹고 미륵사지 같은 데 가서 석양 좀 보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미친놈들이 제도를 설계했는지 학생들에게 헛짓거리를 시켜서 학습 시간을 빼앗는 방식으로 학습 부담을 줄이고 있다. 그런데 이딴 식으로 헛짓거리를 시키면 학습 부담은 그대로이고 헛짓거리 부담만 늘어나는 건 아닌가? 이상한 입시제도 때문에 이래저래 학생들이 고생한다.



(2018.11.06.)


2019/01/05

화천이와 곶감



주말에 감을 땄다. 어머니는 감을 따려고 과일 따는 집게를 새로 사놓으셨다. 어머니는 2m 정도 되는 집게로 감을 집고 나는 4미터 정도 되는 가지 치는 도구로 감나무 가지를 잘랐다.

두 사람이 감을 따고 있을 때 화천이는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안 놀아줘서 그런지 화천이는 뒤뜰에서 이유 없이 달렸다. 체구가 작아서 그렇지 뛰는 폼이 꼭 한 마리 표범 같았다. 타닥타닥 하고 땅바닥에 발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전력질주로 몇 바퀴 돌더니 감나무 위로 올라가 웅크리고 앉았다. 내가 감나무 위쪽에 있는 감을 따려고 나무에 오르자 화천이가 발톱을 세우고 내가 낀 장갑을 뜯으려고 했다. 한참을 달래자 그제서야 화천이는 나무에서 내려갔다.

한참 뛰어서 힘들었는지 화천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줄에 곶감이 매달리든 말든 화천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2018.11.05.)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