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6

[과학철학] Hanson (1958), Ch 4 “Theories” 요약 정리 (미완성)



[ Norwood Russell Hanson (1958), Patterns of Discovery: An Inquiry into the Conceptual Foundations of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70-92.

노우드 러셀 핸슨, 「4장. 이론」, 『과학적 발견의 패턴: 과학의 개념적 기초에 대한 탐구』, 송진웅・조숙경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7), 129-1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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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131

전형적인 물리 법칙이라고 하면 운동의 법칙, 중력의 법칙, 열역학 법칙, 전자기학 법칙, 고전 물리학과 양자물리학에서의 전하 보존의 법칙 등이 있다. 이러한 법칙들은 베이컨의 ‘모순된 예가 발견되지 않는 한에서 단순한 나열에 의한 귀납’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데도, 몇몇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이와 다르게 이러한 법칙들을 가설 연역 체계에서의 고도의 가설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이 관점은 열거를 통한 귀납이라는 전자의 설명보다 물리 법칙을 더 적절하게 기술한다. 왜냐하면 이 관점은 물리학자들의 이미 완결된 논의점 안에서 법칙이란 무엇이며, 그것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설명은 어떻게 법칙이 처음 얻어지게 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열거를 통한 귀납에서는 적어도 이 점은 시도되었다.

이 두 종류의 설명은 서로 대안적인 것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관계에 있다. 두 번째 설명을 수용한다고 해서 첫 번째 설명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하나의 법칙은 특별한 것들의 열거를 통해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런다음 그것은 가설 연역 체계의 고수준의 가정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귀납적 설명에 어떤 잘못이 있다 해도 가설 연역 설명은 그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지 못한다.

귀납적 설명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좀처럼 관찰된 것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함으로써 법칙을 얻지 않는다. 그러나 가설 연역 체계의 설명에도 무언가 잘못은 있다. 만약 이것이 실제 물리적 활동의 설명으로 확립된다면 이것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가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데이터로부터 출발한다. 하나의 법칙이 가설 연역 체계로 고정되면 창조로운 물리적 사고는 이미 끝나게 된다. 가설로부터 관찰 언명을 연역하는 단조로운 과정은 물리학자들이 그 가설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초기 데이터를 설명할 것이라고 여긴 다음에야 가능하다. 이러한 가설 연역 체계의 설명은 완성된 연구 보고서를 논의하는 데나, 실험자나 공학자가 어떻게 이론물리학자의 가설을 발전시키는가를 이해하는 데만 도움을 줄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분석은 종종 최초의 잠정적인 법칙을 제안하게 하는 추론은 논의하지 않은 채 남겨 두게 된다.

귀납적 관점은 중요한 추론이 관찰로부터 법칙으로, 특별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가설 연역적 설명이 분명히 무시하는 무언가 올바른 점이 있다. 그래서 뉴턴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연철학의 주요 임무는 현상으로부터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귀납적 관점은 뉴턴이 결코 무시하지 않았던 점을 무시하고 있다. 추론은 설명대상으로부터 설명자로 진행되기도 한다. 기울어진 거울이 태양 광선 속에 놓일 때 스펙트럼이 생기는 이유는 모든 경사진 거울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귀납적 설명에서는 후자의 일반화를 법칙으로 여길 수 있다. [...] 그러나 경사진 거울이 왜 태양 광선 아래에서 스펙트럼을 보이는가가 설명되었을 때만 우리는 뉴턴의 굴절 법칙과 같은 형태의 법칙을 얻을 수 있다. 귀납적 관점은 법칙이 데이터로부터 추론에 의해 얻어진다는 점은 올바르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관점에서 법칙이 데이터의 설명이 아니라 데이터들의 요약이라고 제시된 점은 잘못되었다.

가설-연역적 설명들은 모두 물리 법칙이 데이터를 설명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데이터와 법칙 사이의 최초의 연관은 모호하게 한다. 사실 가설-연역적 설명은 기본적인 추론은 고도의 가설로부터 관찰 언명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맨 처음에 가설을 제기하기 위한 방법 또는 제기한 가설에 대해 이유를 대는 방법이 아니라 가설이 얻어진 다음 가설을 수용하기 위한 방법 아니면 예측을 하기 위해 이유를 대는 방법일 수 있다. 하나의 가설을 처음으로 제안하는 것은 아주 이성적인 작업이다. 이러한 일은 전기 작가나 과학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직관이나 통찰, 예감, 또는 다른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의 영향을 자주 받지는 않는다. 가설-연역적 설명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종종 가설의 시작이 심리학적 관심일 뿐이라고 하거나 그것은 논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오로지 천재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가설의 확립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논리를 가진다면, 가설을 품는 것 또한 논리를 가져야 한다. 가속도나 만유인력이라는 생각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나 뉴턴에 뒤지지 않는 천재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생각들을 이끄는 사고 과정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여기에 그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는 물리적 설명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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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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