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0

대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정일 교수와 최재천 교수가 만나서 통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대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대학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판결을 내렸다. 최 교수는 “지금 대학이 직업훈련소가 됐다”며 “문제는 지금 대학이 직업훈련소로서의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지금 대학생들은 죽을 때까지 대여섯 차례 직업을 바꾸며 평생 일해야 하는데 지금의 대학은 기껏해야 첫 직장을 얻는 데 필요한 능력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도 교수는 “넓은 잔디밭에 큰 건물이 들어서 있는 전통적인 대학은 50년 안에 소멸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고 했다. “지식의 수명이 짧아져서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2~3년밖에 써먹을 수 없어요. 지식의 전파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외국어만 할 수 있으면 들을 수 있는 외국대학의 일급 강의가 널려 있습니다. 대학의 기능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대학은 대학이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고 설득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지식을 연결해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통섭이에요.”

MIT 등 외국 명문대학들이 우수한 강의를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서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듯이 전통적인 대학들이 50년 안에 없어질까?

구직자가 기업을 찾아와서 이렇게 주장한다고 하자. “저는 MIT의 공대 수업을 모두 완전히 소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웬만한 교양강의는 거의 다 습득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사장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면 회사 내 공대 출신들을 불러서 대충 몇 가지를 시험해보든지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작은 기업의 사장이 아니라 대기업 사장이고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몇 만 명씩 몰려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혼자서 책 읽거나 강의 듣고 무절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미친놈들도 많은데 그들을 어떻게 걸러내야 할까?

많은 나라에서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은 “대학교육이 노동생산성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기업에서 대졸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이 학생들에게 뭘 가르쳤길래 노동생산성을 높여줄까?

나는 취업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문과 출신) 직장인들에 따르면 대학에서 배운 것 중에 기업에서 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거나 지극히 미미하다고 한다. 이는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상경계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재무관리나 회계원리 같은 것이 직장생활에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지식을 얻기 위해서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 다니는 것보다는 학원비 내고 학원 다니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못된 습성을 알기 위해 굳이 등록금을 내고 조별과제를 할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한 대안적인 이론은 “대학 졸업장은 해당 노동자의 학습능력과 성실성 등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며 기업에서는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졸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준다”는 것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는 것은 해당 노동자가 일정 수준의 학습 능력과 성실성을 가질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즉, 대학 교육 자체가 노동 생산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그와 별개로 대학 교육을 무사히 마쳤다는 표지(졸업장)가 그 노동자가 향후에 노동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기업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학이 하는 주된 기능 중 하나는 후속 세대에게 기존의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제도가 그 이유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대학들은 50년 이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대학의 교육 기능 이외의 나머지 측면들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전통적인 대학이 없어지면 대학의 연구 기능은 어디에서 수행할 것인가?

도정일 교수와 최재천 교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야 한다면서 “전통적인 대학은 50년 안에 소멸할 것”이라는 어떤 미래학자의 근거 없는 주장을 근거로 하여 통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대담』에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 뿐 아니라 사회과학자도 참여했다면, 적어도 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쉽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링크: [경향신문] 도정일・최재천 교수, ‘대담’ 출간 9년 만에 다시 통섭을 말하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312127295 )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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