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3

야간 경비 일을 하면서 느낀 점



나는 지난 석 달 간 공대 리모델링하는 곳에서 야간 경비를 보았다.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오밤중에 사무실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11월에 시작해서 1월 말까지 하루에 13시간(오후 6시-오전 7시), 일주일에 6일씩 경비를 했다.

석사학위논문을 작성하다보면 낮밤이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차피 낮밤이 바뀔 것이니 야간 경비를 보면 공부하면서 돈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틀린 생각이었다. 낮밤만 바뀌고 석사학위논문은 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낮밤이 바뀌면서 어머니가 기아자동차에서 격주로 야간 근무를 할 때 나타난다고 했던 증상이 내 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지금은 노조와 사측이 협상으로 주야간 3교대에서 주간 2교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선, 머리와 얼굴로 화기가 올라온다. 그냥 올라온다는 것보다는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건 그냥 혈압이 높아진다는 것과는 다르다. 소화도 잘 안 된다. 별 이유 없이 잇몸이 붓는다.

아침 먹고 바로 누워서 자면 위산이 역류하기 때문에 새벽에 간식을 먹고 아침에 빈속으로 잔다. 한참 자다 일어나면 점심시간 정도 된다. 더 잘 것인가 안자고 점심을 먹을 것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학생식당에서 나오는 점심이 맛있는 것이면 겨우겨우 일어나 밥을 먹고 메뉴가 그저 그러면 더 자고 나서 저녁을 먹는다. 보통은 하루에 두 끼를 먹게 되는데 식사량이 줄지만 체중은 늘어난다. 낮에 일어나면 머리가 멍하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 몸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뒤 문득 든 생각은, 노동자들이 박근혜를 찍는다고 욕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낮밤이 바뀌면서, 글자 읽는 게 싫어졌다. 다행히 밤에는 사무실에서 그나마 책을 읽었는데, 낮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토요일 아침에 퇴근해서 낮에 동네 도서관에 갔었는데 글자를 읽는 게 너무 싫어서 <시사인> 만화만 보고 나온 적도 있다.

나는 A급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는 대학원생이고, 홀짝 해서 입학한 것도 아니고 시험 보고 입학한 것인데(심지어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도 다수 있다), 그런데도 낮밤이 바뀌니 글자를 읽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이런데 격주로 야간근무 하는 노동자들이 여가 시간에 책을 읽지 않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 중 대부분은 학창시절에도 독서가 익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다.

20대 이전에 정치적 의식이 정립된 사람은 많지 않다.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번갈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계기로 정치적 의식이 정립될 것인가? 책은 고사하고 신문 읽는 것도 귀찮고 뉴스도 눈에 안 들어올 텐데 무슨 수로 대단한 정치적 각성이 일어날 것인가? 엄마 아빠가 새누리당 찍으면 본인도 새누리당을 찍는 거고, 그게 아니면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인 캠페인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일단 무언가 새로운 내용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 일상과 직접적 관련 없는 내용을 습득하라는 것도 무리다. 그건 그랬던 경험도 적고 그럴 여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사모 식의 정치 캠페인은 기존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더라도 외연을 확장하기는 힘들다.

노동자가 왜 새누리당을 찍느냐고 욕할 일이 아니다. 그건 매우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우선 그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고 노동조건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대중이 무지한지 몽매한지는 그 다음 문제다. 낮밤이 바뀌면 아무 생각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게 된다.

* 뱀발: 야간근무 하면서도 책 읽는 노동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그들이 대단한 것이지 다른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그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안 된다. 이는 이인제가 군대에서 고시에 붙었다는 것이 대다수의 군인들에게 무의미한 것과 비슷하다.

(201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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