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저널클럽 회식을 하던 중, 어떤 대학원생이 일본에는 동인지인지 팬픽인지가 많다면서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소녀인 작품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영화 <서울의 봄>도 주인공을 여성으로 했다면 남성 서사가 어쩌네 하는 평론이 안 나왔겠네’ 하고 생각했다.
그 대학원생에 따르면, 일본에는 박정희가 미소녀인 작품도 있다고 한다. 그 한 마디가 내 상상력에 방아쇠를 당겼다. 박정희가 미소녀이고, 차지철이 근육질의 마초이고, 김재규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해보자. 세 명의 삼각관계가 진행되다가 차지철이 선을 넘으니까 참지 못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다음 “갖지 못할 바에는 없애버리겠어!”라고 하면서 박정희를 쏜다고 한다면 어떨까? 한 마디를 듣자마자 내가 이런 발상을 하니, 주변 대학원생들이 순발력이 좋다,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대학원생이 박정희 미소녀물에서 그치지 않고 김무성-문재인 연애물도 있다고 말했다. 이 쯤 되니 정말로 그런 게 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러든 말든 이 또한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건 소설보다는 웹툰으로 그리는 게 좋을 것이다. 둘이 공항 게이트에서 다정하게 나오는데, 김무성이 상남자답게 “어흠-!” 하고 헛기침하면서 옆을 보지도 않고 여행가방을 수행원에게 패스하고 문재인은 특유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이 빛나며 김무성을 보며 미소를 짓는, 그런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시나 주변 대학원생들은 나보고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무성-문재인 연애물에서 나의 상상력이 멈추었다면 좋겠지만, 정신적인 것에도 관성 비슷한 게 있어서 일단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멈추려고 해도 제동에 약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윤석열과 한동훈을 주인공으로 하는 팬픽은 어떨까? 극우 노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이런 식이다.
“지검장님, 그건...”
윤석열이 술에 취한 듯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훈아, 우리끼리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불러.”
나는 이렇게 딱 세 줄만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밥을 넘기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미소녀물로 이야기를 꺼냈던 대학원생이 말했다.
“밥 먹는데 그런 이야기는 좀....”
“나는 딱 세 줄밖에 말 안 했는데...”
“그래도 좀 밥 먹을 때는 아닌 것 같아요.”
하여간 동료 대학원생들이 모두 나에게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안다. 알지만 아직 지도교수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나 또한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지도교수가 나를 버리고, 학계가 나를 버린다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세상을 약간 더럽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웬만하면 지도교수님께 학위를 받고 학계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