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0

[형이상학] Gilson (1949), Ch 4 “Existence versus Being” 요약 정리 (미완성)

     

[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108-153.
  E. 질송 지음, 「제4장. 실존 대 존재」,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195-266쪽. ]
  
   
 
데카르트에 미친 수아레즈의 영향

195-
오늘날, 근대철학은 스콜라적 심성으로부터의 결정적 이탈이라고 기술된다. 그래서 스콜라 철학은 사장된다. 그러나 이 스콜라 철학의 사장은 그들의 자연 '철학'을 그들의 적대자들이 자연'과학'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질송은 말한다.
 
후설에 따르면, 근대자연과학은 수학, 특히 기하학의 이념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함.
근대자연과학은 기하학적 공간을 상정시켜 놓고, 그 기하학적 개념들을 우리 일상 현실에 침투시킨다. 그 가장 용이한 방법이 바로 질송이 책에서 서술한 것처럼 질료를 양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기하학의 가장 큰 전제 중 하나가 기본 도형의 확정짓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자연과학은 그 기본 도형과 비슷한 것들을 현실에서 찾아내 그것에 수학을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철학'의 눈이 아닌 '과학'의 눈을 빌어서 보자면, 눈앞에 있는 사물에게 중요한 점은 실존·존재·양 등의 층위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물리학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들, 즉 사물의 형태적 측면이 중요해지는 것이다(질송은 '양'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러한 면은 데카르트에게서도 보이는 듯 싶다. 질송이 '근대 철학자들은 물리적 우주는 사실상 순수 연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라고 서술할 때, '순수 연장'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의 res extensa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수학이(혹은 고전 물리학, 근대자연과학이) 일상에 쉽게 침투할 수 있도록 기하학을 대수화한 인물임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다.
 
질송은 그러나 새로운 우주관에서의 신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에 있어서는 근대철학이 스콜라철학을 그대로 이어간다고 생각한다. 그 맥이 확실히 끊기는 곳은 흄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데카르트는 근대자연과학의 시각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질송은 이것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실존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이런 견해를 내비친다. 즉,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우선하는 시각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아레즈의 충실한 후계자였고, 그래서 존재와 실존의 문제를 쉽게 지나친다. 질송은 이러한 간과를 “자명했던 것을 모호하게 하는 그런 잘못된 습관”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는 데카르트의 행동으로 잘 표현한다. 즉, 데카르트에 있어서 존재와 실존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은 “자명한 것을 모호하게 만드는 잘못된 습관”인 것이다.
 
모든 유한한 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권리로 실존하지 못하고, 실존을 수용해야한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한 피조물이 실존을 받았을 때 ‘실존이 현실적으로 그 본질에서 구분되는가?'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본질과 실존이 구분되 지 않는다고 보았는가?
 
질송이 말하는 데카르트의 논증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실존을 배제한 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과 사물을 실존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서로 다른 방식이다.
  2. 사물 자체는 자신의 실존 없이는 우리의 사유 외부에 있을 수 없다.
  결론: 본질과 실존 사이에는 실재적으로는 어떤 구분도 없다. 단지 이성에 의한 양상적 구 분이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왜 2와 같은 방식으로 사유했는가? 그것은 데카르트가 이미 ‘명석 판명한 것은 진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은 그 명확한 개념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존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

199-
스피노자는 '모든 관념들을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질'과 '실존'의 관념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이 창조하는 것은 본질이요, 피조된 후 사물이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 는 것이 실존이다. 신은 단지 본질을 만들고, 사물은 그 본질을 부여받으면서 ‘그 자체로서 실존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신의 입장에선 '본질'이요, 사물 입장에선 ‘실존을 포함 한 본질이다.
 
이러한 주장에 스피노자는 두 가지 유보사항을 둔다. 
첫째로, 본질이 무엇이고 실존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질송은 조각가가 만드는 조각을 예로 들어 '본질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실존을 가지게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둘째로, 이러한 구분이 단순히 어떤 유한한 존재에 있어서 그 실존의 원인이 그의 본질 밖에 놓여 있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유한한 존재가 '피조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구분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본질에 의해 실존하는 신

200-
이 장은 마지막 문장에서 간단히 요약되듯이 '실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어떤 체계적인 학문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은 것을 보여준다. 간단히 요약해 보도록 하자.
 
데카르트 - '신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수반한다’ ‘신은 “그 자신의 원인” '신의 본질 은 자신의 현실적 실존을 수반한다
 
라이프니츠 - 필연적 존재에 있어서는 “본질이 실존을 포함” 하고 그 결과 신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이기 위해 가능적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필연적 존재는 그 자체 속에 그 자신 의 실존의 이유를 갖는다’
  
스피노자 - ‘자기 원인이라는 말에 의해, 나는 자신의 본질이 자신의 실존을 포함하는 어 떤 것을 이해한다’
 
질송은 '실존하는 신'을 놓쳤으므로 유한한 사물들 자체가 있다는 사실 또한 놓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볼프 존재론의 스콜라적 의의

201-
이 장에서는 특별한 철학적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단지 데카르트 이후로 소멸되다시피 한 형이상학을 되살리려는 볼프의 노력이 나타날 뿐이다. 볼프의 철학적 논의는 다음 장에 이어질 것이다.
 
볼프가 형이상학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사유 방식'을 부활시키려고 했다고 볼 때, 그 징후는 수아레즈에게서 가장 명확히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볼프가 말하는 ‘프로페셔널한 사유 방식'이란 곧 ‘스콜라적인 치밀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징후는 수아레즈 이후 클라우 버그에게서도 잠시 엿볼 수 있다.
 
질송이 언급하는 클라우버그는 형이상학의 위치를 되잡아주고 방향 설정을 다시 하는 인물인 듯 싶다. 클라우버그는 존재론을 ‘특별한 이름이나 속성들의 덕으로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이러저러한 존재를 다루지 않고, 존재 일반을 다루는 학’, 또는 '존재를 존재인 한에서, 다시 말해 존재가 있음의 정도(degree)나 어떤 공통된 본성을 갖는다고 이해되는 한에서 검토하는 어떤 학문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 이후 등장한 볼프는 데카르트 이후로 하나의 독특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단적으로 소멸하였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 스콜라 학자들의 작업을 계속 진행시키게 된다. 스콜라 학자들의 작업을 계속 진행시킨다는 것은 그들의 주 제를 그대로 옮겨 놓는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스콜라 철학의 방향을 가지고 스콜라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훌륭한 정의들과 더욱 엄밀하게 규정되는 명제들을 세우는 것이다.
 

속성의 현실적 현존과 양상의 가능적 현존의 충분 이유인 본질

204-
볼프는 '존재'라는 용어를 다루며 이러한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그는 '존재'를 가능성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즉, 현실적으로 실존하건 그렇지 않건 ‘가능적으로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질송은 존재에 관한 인식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 그러기 위해 존재의 가능성의 원인들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존재이기 위한 조건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존재를 정립하기 위해선 그 관념의 구성요소들이 내부적으로 모순적이지 않고, 병렬적이고 일차적이어야 한다. 만약 어떤 존재에 대해 가정상 낯선 한 요소가 그 존재의 구성에 끼어드는 여러 요소들 중의 어떤 하나를 규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이 존재에 낯설지 않다. 또한 만약 한 존재의 관념 아래의 몇몇 구성 요소들이 서로를 규정한다면, 우리는 그 규정하는 요소들만을 그 존재의 구성 부분들로 보유해야 한다. 이렇게 병렬적이고 일차적인 구성 요소들이 그 존재의 본질을 구성한다(혹은 그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질이 곧 존재이고, 본질의 구성 요소가 바뀌면 곧 존재도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것들은 그들과 불가분한 특성들을 수반한다. 또한 하나의 사물은 자신의 '본질적인 것들’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 특성들은 사물과도 불가분적이다. 이러한 특성이 존재의 속성들'이다. 그리고 ‘본질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고 본질에 모순적이지도 않는 그러한 이면의 규정들이 바로 존재의 '양태들’, 스콜라의 용어로 '우연자들이다.
 
결국 어떤 한 관념이 여러 관념적 구성 요소를 지니고 그것들이 무모순적이면서도 본질적이라면, 그 관념은 존재의 가능성으로서의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어떤 한 존재가 어떠한 속성이나 양상을 가질 수도 있다”고 설명할 순 있지만, 실제로 그 존재가 어떤 속성이나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확정지을 순 없다. 한 존재의 속성이나 양상의 현실적 실존은 그 존재 밖에서 구해져야만 한다. 그러한 속성이나 양상의 ‘현실적 실존'에 대한 이유를 구성해주는 존재를 '외적인 존재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프 는 본질과 실존을 구분시키는 듯 하다.


수아레즈의 존재 : 실재적 본질

207-
본질이 우리가 존재에 관해서 파악하는 최초의 것이며, 존재 안에 현존하거나 현존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볼프의 관념은 다른 철학자들의 본질에 대한 관념과 일치한다.
 
또한 앞서 논의했던 볼프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수아레즈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질송이 지적한 수아레즈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세 가지 논의는 이미 우리가 볼프에게서 본 것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이 장은 수아레즈가 볼프에게 미친 큰 영향 정도로 읽으면 될 것이다.


우연자, 양상, 보완자로서의 실존
 
210-
그러나 볼프는 수아레즈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본질과 실존이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본질은 철저히 '가능성으로서의’ 본질이었고,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있게 하는 어떤 요소를 본질 내에선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볼프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실존이 ‘가능성의 보완자'라고 정의내리게 된다. 그런데 실존은 존재의 본질적인 것들로부터 필연적이지 않다, 즉 그 존재 자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존은 존재와는 다르고 또한 존재에게 전적으로 낯설다.
 
이것은 실존이 '존재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존재론에서 멀어지게 되는 이유이다. 볼프의 존재에 대한 엄격한 정의, 그리고 그 정의에 부합하는 존재 혹은 존재의 요소들만을 연구하는 존재론에서 실존이 설 자리는 없다.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은 존재론이지만, 실존을 연구하는 학문은 다른 학문이어야 한다. 곧, 볼프의 형이상학은 실존이 없는 형이상학이다.


볼프와 흄이 칸트에게 미친 영향

212-
볼프의 이러한 형이상학은 동시대의 거의 모든 철학자, 특히 칸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칸트의 한 전기 작가가 '비판 정신의 결여'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칸트는 볼프를 충실히 믿는다. 그러나 질송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독단적 형이상학이 자신의 본래적 권리로 존재론적'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태도를 이렇게 극적으로 바꾼 요인은 무엇인가?
 
독단적 형이상학의 문제는 존재가 그의 본질의 순수한 가능성과 동일화되는 곳에서는, ‘그 자체로 취해진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현실적 실존에 낯선 세계 속에서 그 실존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해야 하는 불가능한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단적 형이상학에서는 어떠한 증명이라도 그것이 그 자신의 가능성의 실존적 보완자를 실존적으로 중립적인 본질에서 찾을 때는 언제나 '존재론적'이다.
 
그러나 이것에 흙이 실존적 반동을 일으킨다. 그에 따르면 구체적 실재에는 어떠한 분석적 추론 방법에 의해서도 도무지 선험적으로 연역할 수 없는 요소들이 실존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능동 인과성의 경우이다. 현실적 실존을 포함하지 않는 추상적 인과성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적 인과성은 그렇지 않다.
 
칸트는 인과성에 대한 흄의 분석에서 ‘현실적으로 주어진 인과적 관계들을 추상적 본질들의 분석적 특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한다. 즉, 실존의 철저한 소여성(실존이 주어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흄이 말하는 그의 주요한 두 원리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판명한 지각들은 판명한 실존이라는 점과 마음은 판명한 실존들 중에서 어떠한 실재적 연관도 결코 지각하지 못한다. 는 것이다. 여기에서 칸트의 물음이 나타난다. 즉, 우리의 모든 지각들이 판명한 실존들이라면, 그리고 마음은 결코 이들 사이의 어떠한 실재적 연관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존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칸트의 결론은 '마음은 그러한 연관들을 “지각하지” 않으며 그들을 “지정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 대한 논의는 차후에 계속 진행시켜 나가도록 하자.
 
우선 그러한 궁극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선 칸트는 흄의 구분을 더 엄밀히 한다. 즉, 궁극적으로 동일률 속에 놓여 있는 '논리적 근거와 그와 관해 그가 '비록 그러한 관계가 나의 참된 개념들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본성 자체는 그것을 어떤 종류의 판단에로도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하는 그런 '실재적 근거'를 구분하는 것이다.
 
아직 질문이 더 남아 있다.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인과율적)라이프니츠나 볼프는 그들의 추상적 본질들의 계열 속에서 실존의 이유를 밝히려 했으므로 이것에 대답하는 것에 실패한다.(실존을 설명하지 못 하는 듯) 그러나 시각을 바꿔 신의 개념을 개입시킨다고 하더라도 신이 왜 어떤 세계든 창조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실존에 대한 근거는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세계의 실존에 신의 의지와 같은 어떤 실재적인 것을 적용하더라도 다시 흄이 지적하는 문제가 드러난다. 즉, 신의 의지는 실존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에도 불구, 후자는 전자에 의해 정립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파악될 수 없다.
 
또한 신의 실존과 그 자신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도 볼프와 흄은 대립된다. 볼프에 의하면 신은 자신의 본질 속에 실존의 이유를 가진다, 즉 자신에 의해 있다. 그러나 흄은 실존의 계열과 본질의 계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어떠한 본질도 자신의 실존을 수반할 수 없다고 한다.


정립으로서의 칸트의 실존

218-
이제 칸트의 논의는 실존으로 본격적으로 넘어간다. 칸트의 물음은 이러한 것이다. 즉, 우리에게 실존(현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는 우선 실존이 주어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규정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나의 가능적 본질은 그것의 완전한 규정을 위해서 요구되는 모든 규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관념은 실존을 포함하지 않고서도 완전하게 규정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실존은 하나의 (규정하는) 술어가 아니다. '있(이)다'가 실존을 의미하는 곳에서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고 한 가능적 본질에 대해 그의 모든 규정들을 포함하여 절대적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결국 본질로서 정립하는 것과 실존으로서 정립하는 것은 방법적 차이만이 있을 따름이다. 실존으로 인해 본질에 부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더욱더 정립될 뿐이다.


소여로서의 실존

221-
칸트의 논의의 전개 순서를 다시 한 번 추적해보자. 흄의 “어떠한 실존도 어떤 본질로부터 결코 연역될 수 없다”는 문제는 칸트가 “실존을 본질에 귀속시키면 본질에 무엇이 발생하는 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대답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실존하는 본질을 정립함으로써 본질만 정립하는 것보다 더욱 더’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킨 실존은 무엇인가?
 
질송은 여기에서 볼프, 바움가르트, 크루시우스의 논의를 늘어놓아 칸트의 철학적으로 고립적인 상황을 알리고자 하는 듯 싶다. 볼프는 '가능성의 보완자’ 개념으로 실존을 설명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먼저 사물의 가능성 이상으로 사물에 귀속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보완자'라고 부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한다. (즉,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지, 그냥 차이에 이름만 붙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바움가르트는 '대상의 완전한 규정'으로서의 실존을 말한다. 그러나 앞서 했던 논의에서 이미 ‘각각의 대상은 그것의 술어들에 의해 완전하게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실존을 하나의 보완적 규정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크루시우스의 '시간과 공간이 실존의 징표가 된다'는 논의는 앞에서 가능적 본질을 규정할 때 이미 그 규정은 시공의 규정까지도 포함한다고 했으므로 옳지 않다. '이 논의들 모두가 환원할 수 없는 실존의 소여성을 정당히 취급하지 않는다'라고 질송은 말한다.
 
사실상 칸트는 결코 실존 자체를 사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칸트는 흄이 강조한 실존의 현실적 소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에 의해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라고 했을 때, 칸트는 실존의 소여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볼프의 본질주의와 다른 길을 걷는다. 또한 그의 철학은 데카르트와도 길을 달리하는데, 그것은 그가 질료적 현상의 실재성이 사유 주관의 정신적 실재성만큼이나 명증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지수 X로서의 실존

224
칸트는 여기에서, 질송의 말을 빌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게 된다. 즉, 가지성이 단 지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의해 그들 속에 투입되어야만 한다는 것 을 증명하는 것이다.
  
실존은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에게 인식되는가? 우리가 실존을 그 자체로 인식하기 위해 '실재로부터 실재가 지성 범주와 감성 형식에서 얻어 온 바를 벗겨보면 남는 것은 아주 애매모호한, '알 수도 지각할 수도 없는 알지 못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시간·공간으로도 인식되지 않는, 그야말로 미지수 X이다.
 
질송은 우리가 그런 실존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느끼거나 긍정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칸트가 제시한 지성의 판단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 우리가 실존을 인식할 수 있는 실마리가 하나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양상'의 기능으로, 그것은 어떤 대상의 판단의 내용에는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는 특성을 제시한다. 실존의 속성과 닮은 것이다. 이러한 양상에는 세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가능성 · 실재성 · 필연성이다. 그리고 실존에 응답하는 범주는 실재성으로, 그것의 고유한 기능은 실재성을 단언하는 것이다.


판단의 양상으로서의 실존

226-
실재성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실재성은 감성적 직관 속에 주어지면서 지성에 의해 알려져야만 한다. 즉, 감성과 지성의 범주 둘 중 어느 하나를 결여하더라도 실재성은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존은 단언적 판단이 감성적 직관(='소여'에 상응하는 사유의 대상)을 실재적으로 정립하는 곳에서 우연히 발생한다.

실존에는 3가지 정도의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1)실존은 내가 정립하는 바의 무엇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정립하는 방식이다.
(2)실존은 본질은 바의 무엇을 변경시키지 않은 채 본질에 관계하는 그러한 어떤 것(즉, 양 상적인 것)이다. 
(3)실존은 마음의 작품인 실재 내에서만 파악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본질 자체의 양상이 아닌 판단의 양상일 뿐이다.
라는 것들이다.

칸트 자신은 자신의 실존에 관한 교설을 세 가지 공리로 요약하였다.
(1) 경험의 형식적 조건(직관과 개념)에 일치하는 것은 가능적이다.
(2) 경험의 질료적 조건(감각)과 일치하는 것은 실재적이다.
(3) 실재적인 것과 자신과의 일치가 경험의 보편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그러한 것은 필연적이다(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칸트의 실존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게 된다. 그는 실존을 '사물 자체’라는 불가지 영역에 배정함으로써 이것을 실재적 인식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을 그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려지거나 알려질 수 없는 그러한 기본적인 인식 조건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사물이 알려지지 않는 한에서의, 사물의 무엇에 관한 인식은 칸트의 교설 내에서는 단연코 모순이다. 질송은 칸트가 최초의 발언처럼 '지성이 실존을 지정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의 교설이 관념론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
 
칸트가 남겨 놓은 이러한 여운은 뒤에 현상론과 철저한 관념론을 낳았다. 그러나 그 두 경 우 모두 중요성에 있어서는 헤겔과 비교될 수 없다.

     
실존의 선험적 연역: 헤겔
 
230-
세계가 전체적으로 가지적이기 때문에 그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철저히 정당화될 수 있다.

1. it is just what it should be (실재란 자신이 그러한 것이어야만 하는 그런 무엇) 
=> 그런 모든 것들이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이성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
 2. 각각의 것들이 다른 어떤 것의 관점에서 검토될 때는 그들이 그러한 것이어야만 할 그런 어떤 것들이 아니다. 
=> 추상적 사유의 질서 속에서 당신은 다른 어떤 것을 동시에 부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을 긍정할 수 없다. 
=> 철학자들의 이성적 인식이라는 개념은 그 교설 내에서 실재에 관한 파악 가능한 요소들을 수용할 때 언제나 다른 한 요소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

독단론 
칸트 이전의 철학. 이성의 인식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 
절대자의 인식은 술어의 속성을 통해서 절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닌 술어를 절대자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 달려 있다. 
절대적 실재 : 개념들을 수단으로 하여 절대적 실재가 그 자체로 있음

but 헤겔의 정의에 따라 “개념 = 마음에 단순히 현전하는 본질”이라고 할 때
 그 개념은 무규정적 본질. 순수한 실재성. 공허한 추상성. 
따라서 독단론자들은 이것들이 어떤 존재에 대해 술어가 될 수 있는지 찾지 못함. 
=> 이것은 추상적 규정들에 관한 학문. 논리학에 불과

흄 (원초적 경험론)
=> 어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명제를 수립하는 것은 경험만의 근거 위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 참된 일반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문제

칸트 (소여를 요구하는 경험론) 
소여 = 모든 실재적 인식의 근원 
=> 모든 인식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소여는 인식에 해당될 수 없기 때문에 소여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질 수가 없다. 
=> 존재는 피-지각이라고 이해되는 버클리의 관념론 내의 존재와 같음

헤겔 
본질과 개념은 절대적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매체 즉, 구체적 개념들을 통해 적절하게 파악되는 구체적 본질들인 “구체적 보편자들.


절대적 실재의 매체: 구체적 본질
 
234-
* 볼프 : 실존은 신의 개념의 술어

* 칸트 : 어떠한 본질로 부터도 어떠한 관념으로 부터도 신의 실존은 타당하게 연역될 수 없다.
=> 질송의 비판 : 신의 본질은 모든 본질들 중 가장 구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바로 실재의 충실
 “신의 본질의 덕은 실존이다 하는 식으로 실존을 술어화하는 것은 모든 존재를 술어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모든 관념들 중 가장 빈약하고 추상적인 것이 된다.
=> 헤겔의 비판 : 실존을 신의 본질의 덕으로 돌려야 하는가 하는 고민은 쓸데없는 것(신은 실존을 갖는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 본질이 다른 규정들 가운데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실존을 그러한 본질에서 배제할 수 있는가 이다.

* 헤겔 : 어떤 유한한 존재의 실존이 그 개념과 구분된다고 할지라도 신의 개념은 자체 내에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다(존재와 개념의 동일성). 신은 실존하는 것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감각적 실존 : 존재보다 빈약한 것. 존재로 잘못 간주됨. 따라서 존재의 추상성은 본질적 고귀성과 같다. 
존재 : 본질이던 모든 것이 본질의 구체성으로부터 제거된 후 남겨진 것. 
반대로 신의 본질은 가장 구체적이고 충만한 것(통일성). 신의 실존문제는 결국 작은 중요성만 갖게 된다.

* 둔스 스코투스와 헤겔의 주장 비교 
공통점 : 본질주의 
차이점 : 헤겔은 존재를 마지막에 남겨지는 것으로 여김


무로서의 존재

237-
 
* 존재의 특성 
추상적 (감각에 의해 파악 불가능) 
내용 결여(지적 직관의 대상이 아님) => 따라서 존재는 사유와 동일하다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존재의 다수의 부가적 규정을 수반)

* 파르메니데스 : 절대적 실재 = 순수사유
 존재는 규정을 결여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공허 = 무
 존재인 바의 무가 있는 까닭에 존재가 무가 되는 것
 존재는 비존재. 비존재는 존재라는 이행운동이 “생성”
 
 
생성으로부터의 소여. 질. 관계. 본질의 연역

238-
논리학 : 자기자신이면서 자기자신이 아닌 것은 False ex) A∧A 
실재 : 항상 자신이며 동시에 그 자신의 반대

구체적 보편자 : 변증법적 생성을 포함. 모순적 구성요소. 상호간의 이행을 3자에게로 통일 
모순 : 변증법의 추동력. 실재
 생성(주어진 것. 거기 있음) : 불안정성. 사유는 생성으로 파악된 생성에서 안정. 생성으로서 생성 자체가 비로소 생성. 생성은 자기 모순 때문에 통일성에 의해 삼켜지고 소여를 결과로 낳음
 소여 : 존재의 다른 규정들에 선행하는 존재의 규정. 거기 있음.
 규정된 무: 자신의 내용을 갖음. (이는 소여가 내적 모순을 극복하는 이유가 됨)
 질 : 최초의 직접적 규정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구체적 관념 “주어진 것”이 자체적으로 가지는 규정
 실재 : 질이 부여된 하나의 주어진 것이 있는 곳에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가능성
 관계 : 주어진 어떤 실재에 있어서나 그 자신인 바의 어떤 것으로 되는 것
 본질 : 실재는 하나의 자기 자신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존재 : 본질에 있어서 현상 하는 것 본질에 있어서 존재는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현상.
 현상 : 한갓된 현상으로서는 비본질적인 것
 
=> 비-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본질을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역도 성립.
=> 본질은 실존을 위한 가장 ㄱㅅ한 근거 



실존의 선험적 연역 : 헤겔

230-
감성과 지성의 형식이 실존을 어떤 방식으로 인지하는가. 헤겔은 세계가 전체적으로 가지적이기 때문에 그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철저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명제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결론을 수반하는데 그 첫째는 실재한 자신이 그러한 것이어야만 하는 그런 무엇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실재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했을 때 술어 "이다"가 이미 되어야 한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들은 이성적으로 정당화고, 따라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각각의 것들 이 다른 어떤 것의 관점에서 검토될 때 그들이 그러한 것이어야만 할 그런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실재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뜻으로, 추상적 사유의 질서 속에서 당신은 다른 어떤 것을 동시에 부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을 긍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존을 인지하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칸트 이전의 철학인 독단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성의 인식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절대자의 인식은 술어의 속성을 통해서 절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닌 술어를 절대자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개념을 수단으로 하여 절대적 실재가 그 자체로 있다고 한 점에서는 헤겔과 일치하였으나 헤겔의 정의에 따라 개념을 마음에 단순히 현전하는 본질이라고 할 때 그 개념자체는 무규정적 본질이자 순수한 실재성, 공허한 추상성이므로,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술어화 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추상적인 규정들의 관한 학문, 혹은 모순이 없으면 참 있으면 거짓 이라는 논리학적 차원에 불과한 것이다. 흄은 관념들의 연합법칙에 의해 인식이 성립되지만, 관념들만의 인과성을 인식하는 것이지 실존적인 인과성은 인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원초적 경험론이 참된 일반성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또한 그는 어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명제를 수립하는 것은 경험만의 근거 위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였다. 칸트는 소여는 모든 실재적 인식의 근원이라고 정립함으로써 소여를 요구하는 경험론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소여가 인식에 해당될 수 없기 때문에, 소여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질 수 없는 절대적 추상의 행위라는 점에서 “존재는 지각되어 있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관념론적 차원에서 머무는데 그쳤다. 한편 헤겔은 홈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일반성을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본질과 개념은 절대적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매체이자 구체적 개념을 통해 적절하게 파악되는 구체적 본질들인 "구체적 보편자들"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실재와 사물들의 자기 존재과정이 통일성을 가진 구체적인 세계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


절대적 실체의 매체

그렇다면 헤겔이 제시한 구체적 본질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볼프는 실존은 신의 개념의 술어이며 가능성의 보완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실존에 맞는 추상적 술어는 있을 수 없다. 칸트는 이런 볼프를 비판하며 실존은 그것을 정립하는 방식이고 본질의 양상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어떤 본질로 부터도, 어떠한 관념으로부터도 신의 실존은 타당하게 연역 될 수 없다. 하지만 칸트는 신의 본질은 모든 본질들 중 가장 구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바로 실재의 충실이라는 점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신의 본질의 덕은 실존이다” 하는 식으로 실존을 술어화하는 것은 실존을 경시하는 것이고, 모든 존재를 술어화 하는 것이며 존재를 모든 관념들 중 가장 빈약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헤겔은 실존을 신의 본질의 덕으로 돌려야 하는가 하는 고민 자체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신은 실존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고민보다는, 그의 본질이 다른 규정들 가운데 포함하고 있는 그러한 하나의 실존을 본질에서 배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한다. 또한 어떤 유한한 존재의 실존이 그 개념과 구분된다고 할지라도 신의 개념은 자체 내에 자신의 존재를 동일성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신은 실존하는 것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단순한 외적, 감각적 실존은 존재 보다 더욱 빈약하며, 존재로 잘못 간주되는 것일 뿐이다. 존재의 추상성은 본질의 고귀성과 같이 필연적 이다. 존재는 본질이던 모든 것이 본질의 구체성으로부터 제거된 후 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의 본질은 가장 구체적이고 충만한 통일성이다. 이런 헤겔의 주장은 본질주의적 측면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교설과 일치한다. 스코투스는 본질은 항상 있는 것이고, 실존은 본질의 특정한 양상이기 때문에 본질 자체가 실존을 가지며, 신은 혼자서 창조할 수는 있지만 혼자서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스코투스가 존재를 본질 내의 실재성, 본질과 실존을 모두 가지며 다수의 형상적으로 구분된 본질로 정의하는 반면에 헤겔은 존재를 마지막에 남겨지는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헤겔에게 있어 존재는 사유에 의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모든 규정들에 선행하는 무규정이 된다.


무로서의 존재

존재는 감각에 의해 파악 불가능 하다는 점에서 추상적이고, 지적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용을 결여했다. 게다가 본질은 존재의 다수의 부가적 규정을 수반하는 것인데 존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존재는 본질도 아니다. 이렇듯 지각되지도 표상되지도 직관되지도 않지만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존재는 사유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 역시 존재에 관한 순수사유를 절대적 실재로 여겼다. 논의를 더 진전시켜서 존재는 규정을 결여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공허, 즉 무가 된다. 존재인 바의 무는 그 자체로 존재를 무화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관계적 부정이 아닌 어떠한 부정에도 선행하는 부정인 것이다. 때문에 존재는 비존재이고 비존재는 존재라는 하나의 통일성을 향한 이 행운동이 생겨난다. 헤겔은 이것을 “생성”이라 칭했다.


생성으로부터의 소여, 질. 관계, 본질의 연역

논리학적 차원에서 자기자신이면서 자기자신이 아닌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하지만 헤겔의 실재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자신이며 동시에 그 자신의 반대가 된다. 이러한 모순은 헤겔 변증법의 추동력이 된다. 변증법적 생성의 절대적인 실재의 매체로서 모순적 구성요소 상호간의 이행작용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자이다. 여기에 변증법적 추동력인 모순 작용을 통해, 생성(주어진 것, 거기 있음)이라는 불안정성이 연역된다. 사유는 생성으로 파악된 생성에서 안정적이며 생성으로서 생성자체가 비로소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생성은 자기 모순 때문에 통일성에 의해 삼켜지고 소여를 결과로 낳게 된다. 존재의 다른 규정들에 선행하는 존재의 규정인 소여는 거기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내용을 가짐으로써 소여가 내적 모순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규정된 무의 역할이다. 한편 최초의 직접적 규정으로부터는 최초의 구체적 관념인 “주어진 것”이 자체적으로 가지는 규정인 “질”이 연역될 수 있다. 우리는 질이 부여된 하나의 주어진 것이 있는 곳에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가능성을 “실재”라고 하고, 주어진 어떤 실재에 있어서나 그 자신인 바의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을 관계라고 한다. 본질은 하나의 자기 자신이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실재로부터 연역 된다. 현상은 한갓된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비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본질을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모순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현상적 실재의 본질은 실존을 위한 가장 근사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존의 근거로서의 본질

242-
추상적 형이상학에서 본질의 자기 동일성은 주어로서의 존재와 술어로서의 존재의 형식적 동일성이지만 실재적 본질에서의 본질은 존재로서의 존재와 자신에 대한 존재 자신의 현상과의 동일성이다. 본질은 상호반영이며 일방의 타방으로의 이행이다. 따라서 본질로서 그것은 다른 어떤 것 속에 자신의 존재를 두는 바의 것이며, 이러한 상호관계가 본질이기 때문에 본질은 실존에 가장 가까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실존이 나오는 근원적 근거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실존(혹은 탈존. existenz)”이라 부르는 데서부터 명시된 사실이다. 한편 사물은 변증법적 과정이 본질과 그의 실존 사이에 있는 현실적 대립을 극복하는데 성공한 것들의 통일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 본질과 실존간의 대립을 극복한 것 즉 하나의 사물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칸트의 물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존재가 무규정성 자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사물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바로 사물의 사물임일 뿐이며, 완전하고도 전체적인 무규정의 사물 상태, 모든 배후의 규정들에 대한 무책임의 사물 상태일 뿐이었다. 따라서 사물 자체는 아직까지는 단지 “사물”일 뿐인 “결여된 상태다.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이용해 추상적 개념들의 논리학인 볼프의 교설을 전복시키고 자신에게 있어 논리학을 정립시킨다. 헤겔에게서 논리학은 존재의 구체적 변증법이다. 그 속에서 존재는 그 자체에 속하는 모든 규정들을 점차적으로 정복해 간다. 따라서 현실적 실재 자체는 본질과 실존의 현실화된 통일로서의 사물일 뿐이다. 또한 여기서 존재는 이데아와 같은데 따라서 이러한 실재 내에서 존재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래서 "다르게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정립할 소지가 있다는 논리학의 한계에 대해 그 순간의 존재를 "자연"이라고 정립함으로써 무마시킨다. 덕분에 여기서 헤겔의 논리학은 끝나고 절대적 관념론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자연철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논리학은 본질로서 실존을 아프리오리하게 설명해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본질주의에 대한 종교적 반론 : 키에르케고르

245-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에 대한 반박은 종교로부터 나왔다. 이런 일은 이미 여러 차례 발생하였는데 베르나르와 아벨라르의 경우만 봐도, 베르나르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벨라르가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미스테리들을 교묘히 설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각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아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헤겔을 비판한다. 
그의 초기 저작은 기독교의 본성과 전 기독교도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헤겔적인 혼돈의 핵심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를 아는 것이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그것을 통해 가능한 하나의 체계나 사변, 곧 하나의 반영적인 지식이 있다고 믿는데 놓여 있었다. 
따라서 종교가 추상적 사유로 타락하는 이유를 “지속적인 철학의 목표들 중 하나가 실존을 배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바로 당대 실존주의 철학의 기원이 된다.


주관적 인식으로의 실존

247-
그의 논거 전체는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 인식이라는 두 가지 인식 유형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에 의존한다. 객관적 인식이란 일단 획득되면, 인식 주관에게 전용을 위한 아무런 특별한 시도도 요구하지 않는 인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객관들을 비추기 때문에 “반영적”이다. 
또한 지식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지식이 거기에 있는 한 그것은 인식되며, 그 지식에 대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은 그것을 아는 일뿐이라는 데서 객관적 진리의 인식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관적 인식은 그것의 획득이 그것의 주관에 의한 능동적 전용이 되는 그러한 인식이다. 기독교에 대한 주관적 인식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며 철학자에 대한 주관적 인식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관한 인식과 지혜를 사랑하고 있음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이 행해지는 이유는 가지적 실재의 바로 그 본성이 구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학적 진리 나 물리학적 진리는 나 자신의 자아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그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 몰두하지 않고도 그러한 지식을 성취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수학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를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나 철학은 그것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그대로의 종교나 철학을 아는 일이 되지 못한다. 종교를 아는 것이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이며, 단지 종교적인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보이는 바대로 아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의하면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항상 어떤 것(the thing)을 말하는 것이지만 주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주관과 주관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여기서는 바로 주관성이 그 어떤 것이게 된다. 주관적 인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생각해보면, 인간이 기독교의 약속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그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열정적인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는 어떠한 사람 안에서 현실적으로 생겨났을 때 그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지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생겨나 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자신의 본성상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한 번에 하나씩 개별적으로 해결됨을 요하는 문제이다. 이렇듯 인식이 되기 위해서 인식 주관에게 개인적 전용을 요구하는 인식이 주관적 인식 이라고 하였을 때 주관적 인식은 관찰자가 일정한 조건 하에 있어야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 서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사변에 있어서는 어떤 사변적인 존재 형이상학이 없는 실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듯하다. “실존은 그 자체로 신을 위한 하나의 체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존하는 마음을 위한 체계일 수는 없다. 하나의 체계라는 것은 폐쇄된 어떤 것이라는 것인 반면 실존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추상적 관점에서는 실존과 체계가 함께 파악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존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사유가 실존을 실존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폐기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실존은 하나의 간격인 반면 체계적인 것은 사물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순수한 실존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적 모순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실존

252-
“사유가 추상적일지라도 사유하는 자는 현실적으로 있다”는 추상적인 철학적 사유에 대해 헤겔은 열렬히 항의했다. 하지만 헤겔의 구체성은 여전히 순수 추상으로 남아있다. 
그는 독일어 동사인 지양하다(aufheben)가 “삭제하는 것”과 “보존하는 것”을 공평하게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그의 모국어에 침투한 형이상학적 정신의 중요한 징표를 보았다. 그의 철학 안에서는 모순된 것들이 항상 단지 자신들을 지양함에 의해서만 삭제되기도 하고 보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추상적 모순은 지양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추상적이다. 현실적 실존을 논리의 문제로 파악하기 위해 실존을 논리화 한다면 그것은 곧 헤겔과 같은 추상적 모순들의 계속적인 극복으로서의 논리가 될 뿐이다. 순수 추상의 계열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함께 주어지고 우리가 선택해야만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는 어떠한 것도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추상 자체는 현실적 모순을 배격한다. 그래서 헤겔은 추상의 계열 내에는 전혀 어떤 모순도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도 쉽게 모순을 극복하였다. 여기서는 오직 실존만이 현실적 모순을 위한 필연적인 전제 조건이다.
 
철학적 문제가 철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에서 우리는 현실적 모순의 난점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영원의 상 아래서 관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식 주체는 스스로 실존과 시간에 모두 관계되며,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영원은 시간과 함께, 추상은 실존과 함께 공동실존(co-exist)한다. 우리는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 영원과 실존의 공동 현존이 적어도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신이 영원한 반면 인간 자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공동 실존만이 인간 안에서 가능하며 그들의 총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 실존은 하나의 사실이며, 더불어 그 사실은 하나의 적나라한 역설이다. 따라서 인간 인식은 실존을 파악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참된 인식을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고 고전적으로 정의 할 때 이러한 일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존은 먼저 제외되어야 하며 그때 남아 있는 것은 실존을 감한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추상, 곧 사유가 된다. 사유와 사물이 같은 곳에서 지성과 사물의 일치는 사유와 사유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역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객관적 인식이 실존하는 실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관적 인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오직 윤리적인 그리고 윤리-종교적인 인식만이 실재적 인식” 이라는 점이 따라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인식 주체가 실존한다는 사실에 본질적으로 관련되는 유일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있어서 진리가 실존과 하나이며 실존이 진리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이러한 인식의 진리는 인식 주관에 의 한 바로 그것의 전용에 달려 있는데 (신에 관한 인식은 인식자가 신과 관계 맺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 따라서 주관적 인식의 진리는 바로 그것의 주관성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주관적 인식에 있어서는 관계 자체가 진리이며 이것은 주관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와 실존의 관계

256-
우리는 실존을 우리 내부로부터 경험하는 그러한 유일한 존재 밖의 무엇에다가 정당하게 귀속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다양한 존재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는 답은 우리의 인식이 존재 일반의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 인식이 귀속되는 존재들의 구체적 실재를 무시한다. 일반성에 의해 대상화하는 인식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적 실존은 우리 자신의 실존이지만 이것은 분명 데카르트의 제1진리 사유와는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만약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있지 않다. 생각한다는 것은 실존을 무시하는 것이며,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나의 사유 속의 나의 실존이 아니라 나의 실존 속의 나의 사유일 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에 의하면 나는 하나의 “생각하는 사물(thinking thing)일 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고 따라서 현실적 실존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여기서의 역설은 내가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유와 실존의 공동 현존이 바로 사람 자신인 바의 역설인 것이다. 실존자들인 한 우리가 실존하는 주체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각각의 개별인은 단독적이다”고 말한다. 다른 주체가 주관성에 의해 파악되는 유일한 경우는 종교적 신앙뿐인데, 하지만 그 대상이 또 하나의 실재라는 데서 신앙은 역설이 된다. 신앙의 대상은 바로 가르치는 그의 실재, 곧 그가 실존한다는 사실이 며, 우리는 그가 말하는 바의 것을 믿는 게 아니라 그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의 무한한 역 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한계

258-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변증법은 현대의 개신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 체계 내에서는 다른 주체에 의한 어떤 한 주체의 정상적 인식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가 실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존이 행하는 바의 그 무엇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관계인 인간의 역설적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엄연히 다른 시간적 관계가 통일성 속에 놓여짐을 알게 된다. 시간에 관계된 존재는 현재 이 순간에 있다는 것인데, 현재적 존재는 실존에 불과하기 때문에 객관적 지식은 현존하지 못하고 과거 속이나 예견으로서 미래 속에 머물 뿐이다. 시간이 현실적 실존과 일치하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객관적 지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순수하게 추상적인 사유는 어떠한 사유 주체도 없는 즉 실존이 없는 사유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실존과 사유를 동시에 갖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는 본질에 낯선 환경에 처해 있다. 
실존의 고유한 기능은 사람들이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영원한 측면과 인간 자신 사이에 끊임없는 단절을 만듦으로써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배제하는 것인데, 인간은 영원이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 대신 실존을 가지는 것
인간은 단지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의 무엇일 뿐이며 신의 경우와는 다르다. “신은 생각하지 않으며 창조한다. 신은 실존하지 않으며 영원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면서 실존하고, 실존은 사유와 존재를 지속적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사유를 존재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렇듯 실존을 존재의 영속적인 단절과 동일시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후에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추상적인 철학적 사유에 의한 실존의 억압에 대한 종교적 저항일 뿐, 엄밀히 말해 실존철학을 재개하려는 노력은 아니었다. 키에르케고르의 논조는 실존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현실적 실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일한 임무는 실존하는 것이지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2021.08.01.)
     

2020/11/09

포스트 코로나 같은 소리는 왜 죄다 시시한가?



언론에서 나오는 “포스트 코로나”니 “뉴 노멀”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영양가가 없어보인다. 의학 쪽은 모르겠는데 나머지 분야에서는 기존의 뻥쟁이들이 눈에 띤다. 현실에 대해서도 개뻥을 치던 사람들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하니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그런데 뻥쟁이들이 획기적인 뻥을 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던 뻥에 “코로나19”를 덧붙여서 뻥을 친다. 다소 미온적인 뻥인 셈이다.

코로나19는 유례없는 일인 것 같은데 왜 획기적인 개소리는 나오지 않는가? 현재의 비-대면 상황을 염두에 두고 뻥을 치니까 과감한 뻥을 못 치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뻥을 칠 때는 기존의 SF 영화나 소설을 적당히 가공해서 뱉으면 통용되는데, 전염병과 관련해서는 그런 식으로 차용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가지고 올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기존의 뻥에 “코로나19”나 갖다 붙이든지, 비-대면 상황이 일상화되는 정도로 수줍게 뻥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언론에서 비-대면 상황이 일상화되거나 장기화되는 정도로 뻥을 치니 교양 수업에서 학부생들에게 토론을 시켜도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만 나온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예측하라고 하니 학생들은 비-대면 상황이 장기화된 상황을 염두에 둔 이야기만 한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예상보다 금방 끝나고, 또 깨끗하게 끝나고, 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전염병이 유행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이 지금처럼 지낼까? 회의도 화상으로 하고 수업도 화상으로 하고 공연도 화상으로 볼까? 그럴 리 없다. 전염병이 안 도는데 왜 공연장을 안 가고, 왜 극장을 안 가고, 왜 전시회를 안 가겠는가? 전염병이 안 도는데 왜 여행을 안 가고, 왜 맛집을 안 찾아가겠는가? 사람들은 지금 상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고 견디는 것뿐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같은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코로나19에 맞추어 새롭게 개발된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기존에 개발되었으나 잘 안 쓰던 것을 마지못해 쓰는 것뿐이다. 온라인 수업은 내가 학부 다니던 15년 전에도 있었다. 학교에서 비용 줄이려고 3학점 수업에서 한 시간 반은 온라인으로 하고 한 시간 반은 강의실에서 수업하라고 시키자, 여기에 맞추어 강사들은 강의실에서 하는 수업에서는 세 시간 동안 말할 분량을 한 시간 반 동안 두 배 빨리 말했고, 그걸 찍어서 온라인 수업이라고 올렸다. 대입과 관련된 인터넷 강의는 그보다도 더 이전에 있었다. 그런데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돈 내고 현장 강의를 듣는 수험생들도 많았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코로나19 끝나도 비-대면이 친숙해지고 일상화된다고? 그럴 리 없다.

어떤 사태가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더라도 그 이전 사회로 못 돌아간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세계를 바꾸었다는 것은, 계속 전쟁 중이어서 사람들이 소총 들고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 대전 때문에 국제 질서가 싹 바뀌어서 다시는 세계 대전 같은 것이 안 일어난다고 해도 그 이전으로 못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이라고 하면서 온라인 강의 같은 소리나 한다. 멍청한 소리다.

포스트 코로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경제적인 문제일 것이다. 생활 방식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 사태가 진정되면 마스크 안 쓰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가래침 아무 데나 뱉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국가 재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영업자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면 건물 임대하는 건물주들에게 타격이 올 것이고, 그들에게 대출해준 은행에도 타격이 올 거고, 그러면 걷잡을 수 없어지니까 정부에서 재정을 투입해야 할 건데 얼마만큼을 언제까지 투입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사라져도 재정 적자는 남는다.

그러면 왜 이걸로는 뻥을 안 칠까? 아마도 뻥을 칠 견적이 안 나와서 그럴 것이다. 지금 경제 상황이 좋냐 안 좋냐 가지고는 뻥을 칠 수 있겠지만, 장기간의 대규모 재정 투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뻥 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뻥을 칠 수준이면 그냥 이론을 만들고 논문을 발표하면 된다. 이러한 진짜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거나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언론에서 포스트 코로나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한들 뻥쟁이들의 용돈 벌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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