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9

주말에 체리나무를 심으며



주말에 이틀 동안 밭에 나무를 심었다. 아버지가 일하면서 알게 된 분이 체리 농사를 제안해서 밭에 체리나무를 심게 되었다. 이틀 동안 한 일은 다음과 같다.

우선, 풀이 자란 밭에 불을 놔서 마른 풀을 다 제거한다. 밭둑 근처 나무들도 정리하는데, 이 나무들은 나중에 지지대나 말뚝 역할을 할 것이다. 포크래인을 이용해 배수로를 판다. 배수로를 확보하지 않으면 나무뿌리가 썩게 된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날에 한 일이다.

거름을 뿌린다. 거름포대를 밭에 옮기고 포대 안에 있는 거름을 골고루 밭에 뿌린다. 트랙터로 밭을 간다. 줄자, 밧줄, 말뚝 등을 이용해 정확하게 구획을 나눈다. 가로-세로로 3.5미터에서 4미터 간격으로 구획을 나누어 바둑판처럼 만든다. 정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어야 통풍이 잘 된다. 나무를 심기 위해 구덩이를 판다. 가로-세로-깊이가 각각 50센티 정도 되는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에 토양 살충제를 뿌린다. 토양 살충제는 벌레가 나무뿌리를 못 파먹게 한다. 토양 살충제를 뿌린 뒤 구덩이 안에 흙을 섞는다. 나무뿌리를 구덩이에 넣고 구덩이 밖에 있는 흙을 잘게 부수어 구덩이에 넣는다. 구덩이에 흙을 넣을 때 나무를 잡고 살짝 위아래로 흔든다. 그래야 나무뿌리에 빈 공간이 없이 흙이 들어찬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심고 나서 두 발로 땅을 꾹꾹 밟아서 눌러주면 안 된다. 뿌리가 나름대로 자리 잡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게를 실어서 뿌리를 밟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틀린 것 같다. 여기까지 두 번째 날에 한 일이다.

그렇게 체리나무 115그루를 심었다. 물론 나 혼자 115그루를 심은 것은 아니고, 아버지, 아버지의 동료,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두 명과 함께 심기는 했다. 그건 그거고, 나는 내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해본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니, 박사 학위를 못 받거나 어떻게 학위를 받았으나 자리를 못 잡으면 농사를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논문을 나오게 만든다거나, 학생들이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거나, 전염병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다 말라죽게 생겼는데 한 달쯤 푹 쉬고 재난학교나 만들자는 재난 같은 칼럼을 쓰는 일 따위와는 비할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농사는 가치 있는 만큼 힘든 일이고, 농사가 가치 있는 만큼 나의 허리와 관절도 소중하다. 어떻게든 65세 전까지는 직업으로 농사를 짓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뱀발: 항상 그렇지만, 팔자 좋은 것은 화천이었다.






(2020.03.09.)


2020/05/08

재난학교를 만들자는 재난 같은 칼럼



<경향신문>에 실린 “탈바꿈을 위한 재난학교를 만들자”라는 칼럼을 보자. 이 칼럼의 원래 제목은 “푹 쉰 후 슬슬 재난학교를 만들자”였는데 글쓴이의 요청으로 인터넷판 칼럼 제목이 수정되었다고 한다. 칼럼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문단(1):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비슷한 시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 문단(2): 코로나19 사태는 글로벌 차원의 세계적 전문가들과 시민 연대 속에서 풀어가야 할 사안이지만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 문단(3): 위험이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위험사회’가 도래했다. 근본적인 탈바꿈이 필요하다.

- 문단(4): 탈바꿈을 하려면 일단 쉬어야 한다. 쉬면서 숨을 골라야 무엇을 버리고 취할지 보일 것이다.

- 문단(5): 탈바꿈을 하려면 기본소득제도를 실현해야 한다.

- 문단(6): 탈바꿈을 하려면 재난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 문단(7): 한국영화가 세계적 돌풍을 일으킨 것처럼 재난학교가 세계를 구할 돌풍을 일으키기를 바란다.

이 칼럼은 모든 문단이 다 이상하다. 글쓴이가 하는 모든 주장의 근거는 봉준호가 오스카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봉준호가 오스카상을 받았다는 것이 코로나19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글의 첫 문단부터 봉준호의 오스카상 수상과 로코나19의 유행이라는 아무 관련 없는 두 사건이 한 문단에 등장한다. 첫 문단만 읽어봐도 이 칼럼이 망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상당히 심각하게 망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단(3)에서 글쓴이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언급하며 한국사회가 탈바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가 어떤 것인지, 그게 코로나19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나도 모르고 글쓴이도 설명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칼럼은 한국사회를 탈바꿈 해야 한다는 글이니 무엇을 어떻게 탈바꿈을 해야 하는지를 글쓴이가 글에서 밝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내용은 없다. 탈바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미 문단(3)에서 칼럼의 밑천이 드러났으니 그 다음부터는 좌충우돌 대모험이 펼쳐질 차례다.

문단(4)에서 글쓴이는 탈바꿈을 위해 일단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로로 인해 현재 한국 생산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쉬면서 숨을 골라야 [...]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가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글쓴이는, 사실은 자기도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만다. 여기서도 봉준호 감독은 등장한다. 봉준호가 수상 소감에서 자주 ‘역동적 코리아’를 언급했다고 하는데 뜬금없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문단(5)에서 글쓴이는 탈바꿈을 위해 기본소득제도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제도의 실현가능성을 어떻게 가늠하는가? 글쓴이는 또 봉준호 감독을 언급한다.


두 번째 할 일은 기본소득제도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선진국도 못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오스카 시상식 장면을 떠올려보자. 시상식에서 세기의 지성 백인 남성 노년 감독들에게서 역력한 피로감을 본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근대화의 불을 지핀 서구 백인 사회는 늙어가고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봉 감독은 폭발적 에너지의 화신이었다. 아직은 변화를 향한 역동적 에너지가 남은 한국에서, 그것도 빈부격차를 소재로 대박을 친 영화가 나온 나라에서 기본소득제를 먼저 시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글쓴이가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본 것과 기본소득제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수상식장에 앉아있는 늙은 백인 남성 감독들이 서구 백인 사회가 늙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 봉준호 감독이 폭발적인 에너지의 화신이라는 것이 한국이 역동적 사회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 머리가 새까맣든 에너지의 화신이든 말든 한국은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조금 있으면 초-고령화 사회가 될 텐데,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문단(6)에서 글쓴이는 탈바꿈을 위해 재난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봉준호 감독이 나온다.


세 번째는 재난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소셜 미디어 상에서 탈바꿈 중인 지구 주민들의 연구와 활동은 눈부시다. 그간 봉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이런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다.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은 무모한 근대기획을 넘어서 여타 생명들과 인공지능이 더불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훌륭한 텍스트들이다. 재난학교의 학생들은 각자 선 자리에서 자신이 풀어야 할 재난을 알아간다. 전염병이 돌면 모여서 손 소독제와 마스크를 만들며 서로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고 안전망이 되어 준다. 이들의 활발한 교류는 선물경제와 사회적 창업으로도 이어지기도 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학교에서 어린이들은 순진무구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보다 재난 상황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글쓴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무모한 근대기획을 넘어서 여타 생명들과 인공지능이 더불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훌륭한 텍스트”라고 치자. 그래서 어쩌자고? 재난학교라고 만들어 놓고 영화나 쳐보고 앉아있으면 재난 대책이 알아서 툭 튀어나오는가?

글쓴이가 말하는 ‘재난학교’라는 곳은 “전염병이 돌면 모여서 손 소독제와 마스크를 만들며 서로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고 안전망이 되어”줄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동네에서 아이들 모아놓고 봉준호 영화나 보고 소꿉놀이나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재난학교를 만들어서 무슨 수로 한국사회를 탈바꿈하겠다는 것인지 이 칼럼만으로는 알 수 없다. 재난학교에서의 “활발한 교류는 선물경제와 사회적 창업으로도 이어지기도 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글쓴이가 자급자족의 뜻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가 되려면 우선 마스크 제작에 필요한 면이나 펄프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겠는가? 손 소독약은 무슨 수로 만드는가? 야생 식물이라도 채집하려고 하는 것인가? 재난학교에서 “어린이들은 순진무구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보다 재난 상황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게 예리한 감각을 가진 어린이라면 재난학교에 들어갔다가도 금방 뛰쳐나올 것이다. “엄마, 이 사람들 이상해”라고 하면서.

문단(7)에서 글쓴이는 재난학교가 세계를 구할 돌풍을 일으키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드러낸다. 여기서도 봉준호 감독은 나온다.


이런 학교들이 지금 우리 주변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제도화된 학교 안에 둥지를 튼 경우도 있고 주말학교나 방학 캠프의 형태로 동네 카페에 둥지를 튼 경우도 있다. 그간 정부에서는 도시 재생과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크고 작은 물리적 공간들을 만들었다. 특히 서울시는 무중력 지대나 우리 동네 키움 센터와 같이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지원해왔다. 재난학교 시민들과 시민공무원과 공공 인프라가 제대로 만날 수 있다면 서울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또 한 번 역동적인 역사를 써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일으킨 세계적 돌풍처럼 한국의 시민들이 재난학교를 통해 세계를 구할 돌풍을 일으키기를!


거듭 말하지만, 재난학교와 봉준호 감독은 아무 관련이 없다. 글쓴이가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슨 수로 그 놈의 재난학교가 세계를 구할 돌풍을 일으킬지 모르겠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는 왜 “서울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또 한 번 역동적인 역사를 써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재난은 전국적으로 오는데 왜 하필 서울인가? 한국이 서울공화국이라서 그런가? 굳이 추측해보자면, 글쓴이가 좋아하는 방식의 소꿉놀이를 서울시가 지원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링크: [경향신문] 탈바꿈을 위한 재난학교를 만들자 / 조한혜정

(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2232055015 )

(20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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