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균, 『원형과 변용: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
1. 사회적 담론이 된 경제개발계획
1) 해방과 공 개념
2) 1950년대 미국 원조의 이중적 효과
3) 1950년대 저개발국 경제개발론 도입
2. 서로 다른 길
1) 민간기업이 주도해야 한다
2) 국가가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3) 자본주의의 수정이 필요하다
3. 공통의 목표
1) 전통과 식민지의 유산
2) 서구의 이론을 선택적으로 배우자
3)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자
1. 사회적 담론이 된 경제개발계획
1) 해방과 공 개념
29
해방 직후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지는 정치세력들이 분립되어 있았지만
중도우파, 중도좌파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여당으로 가장 보수적이었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까지도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경제정책으로 채택함.
29-30
해방 직후 모든 정치세력들은 중요산업의 국유화, 농지를 제외한 모든 국토의 국유화, 계획경제의 실시 등을 공통적으로 주장함.
이러한 경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 행정체제와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됨.
31
1954년에 사사오입 개헌 시 경제조항이 개정되어 자유경제를 주로 하는 내용으로 바뀌었지만, 정부는 경제 질서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지속함.
31-32
박태균은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식민지 시기부터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회주의적 성격의 경제 정책을 받아들인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적 ‘공’(公) 개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봄.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인민주권주의에 기반한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어 있었음.
34-35
1920년대 이후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사회민주주의 이론 및 일본과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이론이 한국사회에 쉽게 수용된 것은 전통적 ‘공’ 개념과 대동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1950년대 ‘공’ 개념은 이전 시기와 그 강조점에서 다름.
조선시대와 식민지 조선 시기의 공 개념이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평등한 분배의 문제를 강조
1950년대로 넘어와서는 서구의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영향을 받아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됨.
2) 1950년대 미국 원조의 이중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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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에도 심각하던 인플레이션 문제는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의 유엔금 대여금 문제와 전쟁 이후 복구와 부흥을 위한 정부 지출 증가 등으로 더욱 악화됨.
36-37
북한이 성공적으로 전후 복구를 해내자 이는 한국 정부와 지식인에게 충격을 줌.
1954년부터 시작된 ‘경제부흥 3개년 계획’
1957년부터 시작된 ‘1차 5개년계획’
1954년에서 1960년에 공업 부문에서 연평균 20% 내외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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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한국경제는 ‘원조경제’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의 대한원조에 의존함.
농지개혁의 실패로 인한 국내 자본 축적의 실패
불안정한 사회 조건 만연한 실업자 부정부패로 인한 정부 세입의 감소
한국 전쟁 이후 한국군 규모의 급격한 확대로 인한 군비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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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더 큰 충격은 미국의 대한원조 감소
1950년대 미국은 ‘뉴룩정책’(New Look)을 채택하면서 후진국에 대한 군사 경제 무상 원조를 삭감
1957년 기점으로 하여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 DLF)을 설치하면서 유상차관으로 전환하기 시작함.
39-41
이는 한국 경제에 큰 위기의식을 심어줌.
차관을 승인받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는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계획을 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함.
41-42
1950년대의 사회・정치적 상황은 반대로 진행됨
한국 전쟁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가운데 계획 경제를 주도했던 진보당은 불법화됨.
이승만은 경제계획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
박태균은 이런 상황에서도 경제개발 계획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당시 경제개발의 입안과 실행에 대한 절실한 사회적 요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함.
3) 1950년대 저개발국 경제개발론 도입
43-44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경제계획의 입안과 실행 방법에 관심을 가지게 됨
서구에서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이 1940년대부터 시작되어 1950년대에 발전 및 확산됨.
1955년 이후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이 국내에 소개됨.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의 경제개발계획 경험도 국내에 소개됨.
경제계획기구에 대해서도 국제연합에서 나온 경제개발계획과 관련된 책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됨.
1950년대 후반에는 대학에서도 경제개발론과 관련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짐.
45
1950년대 경제개발론이 수입된 또 다른 경로는 학자나 관료들의 외국 연수나 유학
영연방 국가들이 주축이 되었던 ‘콜롬보 플랜’(Colombo Plan)이나 유엔이 주도한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United Nations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e Far East; ECAFE)에 참여한 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경제개발계획의 현황과 내용을 접하고 이에 영향을 받음.
45-46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대부분 정치적 독립과 함께 자립적인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을 시급한 과제로 내세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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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계획 실행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에서 경제개발론자들은 서구의 이론과 한국적 현실을 결합하면서 다양한 성격의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주장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에도 다양한 저개발국 경제개발론들의 논의가 반영됨.
2. 서로 다른 길
1) 민간기업이 주도해야 한다
50
이들은 경제후진 현상이 정부의 강력한 간섭 때문이라고 생각함.
51
『사상계』 그룹의 핵심 주장은 경제 민주화와 외자의 적극적 이용
외자의 적극적 이용은 자본축적의 방안으로 제시됨.
환율 현실화 주장
52-54
민주당 신파의 김영선과 주요한
김영선과 주요한은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함.
국가자본주의나 사회주의적인 발전방식은 ‘비능률적이고 부패를 조장’할 것이라고 주장함.
주요한은 김영선보다 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더 적극적인 입장
주요한은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했음.
2) 국가가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한다
56
국가주도형 경제발전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글에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함.
한국주의
56-57
외국의 원조를 통한 자본축적에 부정적인 입장
내포적 산업화의 핵심은 내자의 동원
거대기업의 국유 또는 국영을 강조
58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한국주의’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강조,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도 연결됨.
58-59
해방 직후 경제학과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진 교수들이 거의 등용됨.
59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은 사회민주주의형 경제개발론과 내용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많음.
59-60
쿠데타 주체세력 중 박정희와 유원식
박정희는 경제적 민족주의와 함께 국가사회주의와 유사한 민족 구성원 내부에서의 평등권과 국가적 평등권을 강조
61
국가사회주의적 경향은 1930년대 이후 민족운동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남.
3) 자본주의의 수정이 필요하다
61-62
진보당 경제정책의 핵심은 민족경제를 건설하고 부패한 경제구조를 개편한다는 것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모순과 무정부성을 지양하기 위하여 경제에 대한 계획과 통제 정책을 적절하게 배합한다는 것
63
4・19 혁명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사회민주주의형 경제개발론이 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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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의 과정에서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과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따라 일본 경제에 예속될 가능성을 경계하독 있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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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내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
3. 공통의 목표
1) 전통과 식민지의 유산
67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경제개발론은 크게 ‘민간주도형’, ‘국가주도형’, ‘사회민주주의형’으로 구분할 수 있음.
69
1950년대 경제개발론자들이 정부의 개입에 선호한 것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공 개념과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적 지식인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공화주의’와 일제강점기 좌파 지식인들의 ‘계획경제론’에 영향을 받은 것임.
70-
경제개발론자들이 정부의 개입을 공통적으로 주장했던 또 다른 배경은 이들이 모두 식민지 조선 시기에 교육을 받았다는 점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의 경제 정책이 국가와 엘리트 경제 관료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
이 당시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제학 또는 경제정책 관련 교육 경험에 녹아들었고 이, 것 이 당시 경제개발론자들에게 영향을 줌.
2) 서구의 이론을 선택적으로 배우자
74-75
경제개발론자들이 서구의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님.
서구의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을 ‘한국화’하여 받아들임.
첫째, 경제개발론자들은 모두 안정보다 성장을 강조했음.
이는 1950년대에 미국의 대한정책이 반-인플레이션 안정화를 기반으로 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로스토우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경제개발론자들이 성장을 위한 대전제로 인플레이션 억제를 들었는데도 한국의 경제개발론자들은 어느 정도의 통화 팽창과 인플레이션을 감수하더라도 산업생산의 확대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 방안을 지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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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중점적으로 투자할 산업 부문에서 농업을 강조했다는 점
75-76
서구에서 나온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은 다양했지만, 2차 산업과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일차적으로 중시했음.
농업 부문은 2차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이나 전제조건으로서만 강조함.
76-77
195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론자들은 농업분야의 발전을 상당히 강조함.
농업에 대한 강조는 기본적으로 1950년대의 한국 상황 때문이었음.
당시 전체 인구 중 농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
78
셋째, 균형성장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
불균형성장론이 균형성장론보다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이론임.
한국의 경제개발론자들은 균형성장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
이것은 식민지 조선 시기에 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 경제 체제 아래 불균형하고 왜곡된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한국의 특징 때문임.
3)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자
81
1950년대 경제개발론의 또 다른 특징은 실업 문제와 민족 자본 축적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강조한다는 점
실업문제 중에서도 공통적인 관심을 보이 것은 루이스와 넉시가 제기한 위장실업(또는 잠재실업)의 문제
83-
1950년대 농촌경제의 피폐화는 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졌고 위장실업 문제를 심화시킴.
84-
사회적으로 실업문제가 부각되었다면 경제적으로는 산업구조의 불균형과 국내 자본의 부족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됨.
2차 산업에서도 산업구조의 불균형도 1950년대의 중요한 경제문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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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 산업의 문제를 전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삼백산업
85
1950년대의 많은 경제개발론자들은 부족한 국내자본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
국내저축의 향상을 통한 민족자본의 형성과 자립적 경제건설
85-86
1950년대의 실업과 민족자본의 부족은 경제개발론자들이 두 문제의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으킴.
1950년대와 말과 1960년대 초반에 입안된 경제개발계획은 이 두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함.
(202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