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6

조국 사태에서 보이는 진보인사들의 헛발질



조국 교수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인 것이 법적으로도 문제없고 도덕적으로도 문제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공계 학부생을 통해 이공계 대학원생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로 들은 것이다. 그 대학원생은 해당 논문을 직접 읽었다고 하는데 그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당 학술지가 SCI급이기는 하지만 해당 분과에서 보면 상당히 낮은 학술지.

(2) 실험 방식도 정형화된 것이어서 연구실에서 실험 프로토콜만 가지고 있었다면 고등학생이 실험해도 금방 데이터 뽑을 수 있는 수준.

(3) 과학 쪽에서는 국내 학술지를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음.

(4) 국내 학술지의 경우 SCI급이라도 피어 리뷰를 엄격하지 않게 하지 않아서 통과하기가 어렵지 않음.

(6) 학부 친구들 중, 특히 특목고 출신들은 고등학교 때 간단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논문에 저자로 이름이 올라간 경우가 꽤 있었음. 이는 그 친구들 부모님이 엄청난 특권층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특목고생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일.

(7) 그러나 사람들에게 ‘논문’에 대한 환상이 있고 ‘SCI급’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도 있어서 해명을 아무리 잘 해도 안 믿었을 것 같기는 함.

그 대학원생의 분석이 맞다면, 조국 교수의 딸이 논문의 제1저자인 것에는 법적・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정유라 때처럼 한 사람을 위해 없던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능력 있는 집안에서 있는 제도를 활용해서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받게 한 것이므로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학교나 독서실에서 수능 문제만 푸는 것보다 이렇게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의 발달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왜 찜찜한 기분이 들었을까.

조국 교수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라는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냥 덤덤했다. 그냥 석연치 않은 일이 있나보다 싶었다. 조국 교수 딸이 SCI급 논문의 제1저자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짐작도 못한 세계가 있구나, 좋은 집에서 태어난 재능 있는 자식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그런데도 법적・도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부당하게 특혜를 취하는 사람에게는 욕이라도 하겠는데 정당하게 특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욕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박사과정까지 온 나도 이렇게 놀란 마음이 드는데, 논문을 쓰기는커녕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조국 교수 딸의 논문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겠는가.

조국 교수와 관련된 촛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놀란 마음으로 나왔을 것이다. 시위대 중에는 일베충도 있을 것이고, 박근혜가 무죄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유한국당 지지자들도 있을 것이고, 대학에서 청소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면 내가 내야 할 등록금이 오른다면서 청소노동자들의 시위를 방해한 개돼지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놀란 마음으로 뛰쳐나온 순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법적으로 문제없는 일 가지고 유난 떨지 말고 꺼지라고 하면 순순히 꺼질까? 아니다. 일단은, 마음이 진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위대를 싸잡아서 매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쓸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쓰면서 시위대 밖에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여론을 왜곡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연로한 진보인사들은 눈치도 없이 아무 말이나 해서 여론을 악화시킨다. 어떤 역사학자는 지금 시위하는 대학생 중에 자기소개서를 자기 손으로 쓴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했다. 시위대 중에 농어촌특별전형으로 대학에 온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언론인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을 두고 “수꼴”이라고 했다. 결국 그 언론인은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다. 어떤 남성 소설가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찍소리도 못하던 성인군자들이 입에 거품 물고 송곳니를 드러낸다고 비웃었다. 지금 대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이명박-박근혜 때 중고등학생이었다. 어떤 여성 소설가는 조국은 문재인 대통령이 믿는 사람이니까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건 그냥 개소리다. 어떤 국회의원은 조국 교수의 딸이 보편적 기회를 누린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온 것은 그런 기회를 누리지 못해서다. 어떤 교육감은 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다들 현장실습하고 에세이를 쓴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도 웬만큼 좋은 학교가 아니고서는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된 에세이를 쓰기 어렵다.

이 판국에 진보인사들이 할 말이 있겠는가. 사회가 이렇게 된 책임이 기성세대에게 있다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그래도 시위할 때 “자유한국당은 오판하지 말라” 같은 구호 한 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달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조롱하고,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가르치려고 든다. 분위기 파악을 못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감이 없나 모르겠다.

(2019.08.26.)


2019/10/22

조국은 왜 그렇게 글을 많이 썼을까?



조국의 딸이 고등학교 때 대학 연구실에서 2주 간 인턴해서 논문의 제1저자가 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인가, 나와 너무 먼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보는 것 같아서 현실 감각이 잠깐 마비된 것인가? 조금 씁쓸하기는 했지만 박탈감 같은 것이 들지도 않았다. 박탈감이라는 것은 내 것이거나 내 것이어야 했던 것이나 내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을 빼앗겼을 때 드는 감정이다. 조국 딸이 가진 것은 내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어서 그런 것 같다. 몇 가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 연구실에서 출퇴근을 기록하며 일하던 대학원생들은 그 사실을 알았을까?’, ‘저 정도 최상류층은 업체를 안 거치고 부모가 직접 자식 스펙 관리를 하는구나’ 하는 정도였다.

꼭 유승준을 보는 것 같다. 유승준이 다른 연예인보다 더 큰 비난을 받았던 것은 다른 연예인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유승준에 대한 기대가 다른 연예인들에 대한 기대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싸이의 첫 번째 군 복무에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싸이를 크게 비난하지 않았다. 싸이에 대한 기대치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달랐다. 도대체 무슨 아름다운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고 군대도 안 다녀왔는데도 해병대 홍보대사를 했다. 그래 놓고는 군대를 안 가겠다면서 당당히 국적을 포기하니 사람들의 분노가 더 컸다. 만약에 조국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이 정도로 분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황교안이나 나경원이 그랬으면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조국은 왜 그렇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열심히 했을까? 조광조가 왕도정치 말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뻔하고 재미없고 비슷비슷한 글을 하루에도 여러 개씩 썼을까?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국적을 포기했지만, 애초부터 국적을 포기할 마음이었는지, 원래 군대 갈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국적을 포기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와 달리 조국은 확실하다. 아름답지 않은 행동을 한참 먼저 하고 나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조국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면서도 그런 글을 썼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나 많이 글을 썼을까?





(2019.08.22.)


2019/10/21

직조와 명징



두 달 전쯤에 평론가 이동진이 영화 <기생충>에 한줄평을 남긴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동진은 <기생충>을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평했고, 이에 대해 ‘명징’이나 ‘직조’ 같은 단어를 쓰는 게 맞냐 안 맞냐, 수능에서 국어영역 1등급 맞은 나도 모르는 단어다, 나는 이 단어 안다 멍청이들아, 대중을 상대로 하는 평론가가 이러면 안 된다, 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는 게 신문에 나올 정도로 당시 한국이 태평성대였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랬다고 한다. 기사를 대충 때우려고 했던 기자들이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어떤 것을 ‘직조’에 비유할 때 적절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글이다. 루쓰 코완은 다음과 같이 썼다.


가사 노동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를 별도로 고찰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가사 노동과 도구의 관계는 상호적이며 때로는 변증법적이기도 하다. 도구는 가정에서의 수행 방식을 제한하지만, 발명가들은 새로운 도구를 유행시킴으로써 그러한 제한을 끊임없이 깨뜨려 왔다. 도구는 노동 과정을 재조직하여 새로운 필요를 창출했고 필요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다시 새 도구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 이 책은 이렇게 다중적인 초점을 가진 역사를 집필하면서 어려운 과제를 다소 수월하게 하기 위해 ‘노동 과정’과 ‘기술 체계’라는 조직적 개념을 이용하였다.(20-21쪽)

[...] 지난 100년 간 미국 가정의 가사 노동에서 일어난 변화를 서술하는 것을 직조에 비유한다면, 노동 과정과 기술 체계라는 두 개념은 날줄과 씨줄에 비유될 수 있다. 생소한 용어지만 그 개념이 뜻하는 바는 중요하다. 이들 개념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은 압축된 묘사와 분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몇몇 중요한 특성들을 명확히 표현해준다.(24쪽)


루쓰 코완이 가사 노동의 역사를 직조에 비유한 것은 노동 과정과 기술 체계를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진이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냈다고 했을 때 ‘직조’라는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했는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봉준호는 영화 <기생충>을 통해 뭔가를 명징하게 보여준 것 같은데, 한줄평은 그리 명징한 것 같지는 않다.

* 참고 문헌

루쓰 코완, 『과학기술과 가사노동』, 김성희 외 옮김, 이기영 감수 (학지사, 1997)

(2019.08.21.)


2019/10/18

비 오는 날 창고에 들어간 화천이



비가 내리지만 창고에서 꺼낼 것이 있어서 창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문 앞에 있던 화천이와 화천이 새끼가 갑자기 창고로 뛰어 들어왔다. 현관문 앞이 습해서 그랬던 것 같다. 창고로 들어온 고양이들은 계단으로 폴짝폴짝 올라가더니 계단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2층으로 올라가야 해서 비키라고 했는데도 고양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창고 문을 닫기 전에 고양이들을 창고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계단에 있던 고양이들은 오히려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간 고양이들은 창문을 통해 비 오는 풍경을 보았다. 현관문 앞에서 마당에 비 내리는 것을 봐도 되는데, 고양이들은 굳이 창고 2층까지 올라가서 비 오는 것을 보았다.









(2019.08.18.)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