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9

EBS <다큐프라임>의 정보량



지식을 전달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보량이다. 전달하려는 정보량이 너무 많으면 듣는 사람이 정신을 놓고, 정보량이 너무 적으면 쓸모없거나 지루해서 상대방이 다른 생각을 한다. 이는 다큐멘터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청자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다큐멘터리라면 영상과 음성과 문자를 통해 적정 정보량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EBS 다큐프라임> 중에서 교육 분야와 철학 분야는 정말 못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교육 분야는 거의 차량용 블랙박스 수준이다. 학생들 꽁무니 쫓아다니면서 쓸데없는 것이나 촬영해놓고는 다큐멘터리라고 우긴다. 촬영 편수만 여러 편이지 내용도 하나 같이 똑같다. 주입식 교육 그만하고 수업 시간에 토론이나 시키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능력과 창의성이 호랑이 기운처럼 팡팡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렇게나 주둥이를 나불거리게 냅두었더니 그렇게 된다고? 웬만한 대학에는 교육학과와 심리학과가 있다. 교육공학 전공자나 인지심리 전공자에게 몇 마디만 물어보았어도 그렇게는 안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여러 대학에서 수업 개선 사업을 했고 그와 관련된 자료집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구글에서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뿐만 아니라 학과별로 적합한 수업 방식을 연구한 자료들도 많다. 그러한 여러 연구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는, 학습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플립트 러닝(Flipped Learning) 같은 학습 방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으며 오히려 기존의 강의식 수업 방식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절대로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토론식 수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기법을 써야 하는지, 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다큐프라임>이 말하는 것처럼, 주입식 교육을 받으면 비판적 사고능력과 창의성이 죽고 자유롭게 주둥이를 털게 하면 그러한 것들이 길러진다는 식의 결론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내용을 다 빼버려야 하고, 얼마 안 되는 내용으로만 다큐멘터리 분량을 채워야 하니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철학 분야는 ‘다큐프라임’이 아니라 ‘드라마프라임’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50분짜리 한 편이 5분짜리 <지식채널e>보다 정보량이 적다. 정보량이 적은데 많은 시간을 때우려니 세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도 5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든다. 트롤리 딜레마를 설명하려고 멀리서 아주 천천히 기차가 달려오고, 묶여있는 사람들의 겁에 질린 표정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여주고, 기관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몸을 차창 밖으로 반쯤 꺼내고, 두 갈래인 철로를 보여주는데, 이것들이 모두 다 느린 화면으로 나오고 나레이션도 외국인을 위한 방송인 듯 천천히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는다. 이렇게 해도 분량을 채우기 어려운지 중간 중간에 내용 전개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철학을 접한 적 없는 시청자를 겨냥해서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니 다큐멘터리를 <텔레토비>처럼 만들 필요는 없다. 내용이 산만하고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PD든 작가든 자기들도 무엇으로 내용을 채워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다큐프라임>에서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회에 물음을 던지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한다. 괜한 짓 하지 말고 기존의 지식이나 잘 전달했으면 좋겠다.

(2018.02.09.)


2018/04/08

[과학철학] Musgrave (1985), “Realism versus Constructive Empiricism” 요약 정리 (미완성)

     

[ Alan Musgrave (1985), “Realism versus Constructive Empiricism”, in P. M. Churchland and C. A. Hooker (eds.)(1985), Images of Science: Essays on Realism and Empiric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197-221. ]


  I. Truth, Empirical Adequacy, Empirical Equivalence
  II. Theory and Observation
  III. Realism and Explanation


[197]
머스그레이브는 이 글에서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에 대한 주장이 과연 성공적이지 않다는 입장
- 1절: 반 프라센의 약한 반-실재론을 살펴보고 참과 경험적 적합성의 차이에 대하여 살펴봄.
- 2절: 반-실재론의 주요 반박에 대한 반 프라센의 답변이 다른 반-실재론자들보다 낫지 않음을 논증함.
- 3절: 실재론과 설명 사이의 연결을 살펴보고, 이 연결을 단절하고자 하는 반 프라센의 시도를 평가함.


  I. Truth, Empirical Adequacy, Empirical Equivalence

[197]
- 실재론에 대한 반 프라센의 정의: “과학은 이론을 통하여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참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과학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뜻한다.”
하지만 반 프라센은 과학이 문자 그대로 참임을 입증할 수 있을지라도,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참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198]
그러므로 반 프라센은 “과학의 목표는 참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구성적 경험론Constructive Empiricism을 제시한다. 구성적 경험론에서 과학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만을 뜻한다. “어떤 이론이 이 세계 속에서 관찰 가능한 사물과 사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참일 때, 즉 그것이 ‘현상을 구제’할 때 그 이론은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말한다.

[198-199]
- 관찰가능한 대상을 다루는 이론에서 참은 경험적 적합성과 서로 일치함.
- 그러나 관찰불가능한 대상을 다루는 이론에서 참은 경험적 적합성을 함축하지만, 그 반대는 아님.
경험적으로는 적합하지만 거짓인 이론이 있을 수 있음.
따라서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이론을 참이라고 믿는 것은,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믿는 것보다 위험성을 조금 더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 프라센은 어떠한 관찰현상들을 경험적으로 동등하게 설명하면서도, 논리적으로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반 프라센은 이 경우에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참의 개념이 이론 선택의 표준적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반 프라센의 경험적 적합성도 위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험적 적합성도 우리가 특정 시점에서 가질 수 있는 증거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200-201]
반 프라센은 실제 과학에서 양립 불가능하지만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의 발생의 예로 뉴턴의 사례를 제시한다. 반 프라센은 중심이 절대공간에서 정지상태에 있는 뉴턴의 이론과, 중심이등속도로 절대공간을 통과하는 이론은 현상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 프라센에 대한 머스그레이브의 반박 [201]
반 프라센의 설명은 이론을 확장시킬 때 그들의 동등함은 사라질 수 있다. 반 프라센이 제시한 이론들은 태양계 내의 현상을 고려할 때에만 경험적으로 동등하며, 절대공간에서 정지해 있는 다른 별을 포함하는 보다 확장된 이론이 되면 이론들 사이의 경험적 동등성은 사라진다.

[201]
반 프라센은 뉴턴의 예를 조금 더 확장시켜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과 결합해도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201-202]
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이러한 예들은 과학사적 허구이며, 실제로 경험적으로 동등한 예가 있더라도 과학의 발전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202]
반 프라센은 이에 대해 우리는 논리적 속임수로 인공적 대안 이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례가 실제 역사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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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
- 하지만 실재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단순히 논리적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 문제는 논리적 가능성은 있지만 과학의 실제 역사적 상황에서는 일시적 현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논리적인 관점에서만의 우려라고 반박한다.
- 일부 실재론자들은 단순성(simplicity)과 같은 선택기준으로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실재론자들은 단순성을 참의 개념과 연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반 프라센은 단순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단순성은 이론의 참이나, 참이 될 가능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실용적 덕목(pragmatic virtue)으로 여긴다. 반 프라센은 단순성을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보는데, 실재론자들이 엄격한 경험주의를 포기하고 이러한 형이상학을 과학 안으로 이끄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반 프라센은 구성적 경험론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기에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반 프라센에게 단순성은 이론 선택의 영역이지만, 적어도 이론상의 평가에 관한 것으로 비-경험적 속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며, 선택의 기준으로서 실용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단순성은 이론을 조금 더 참 또는 경험적 적합성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본다.

[203-204]
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조금 더 단순한 이론이 경험적으로 조금 더 적합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반박한다. 또한 실재론자들도 실용적 덕목을 채택함으로써 자연은 단순한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머스그레이브가 보이게 실재론자들은 구성적 경험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험적으로 동등한 문제를 다룰 때 실용적 덕목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자연은 단순하다’라는 명제는 가망 없는 애매한 형이상학적 원리지만, 성공적인 이론들은 단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증거는 있다고 말한다. 머스그레이브는 이론이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것 아래 구축되었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만한 형이상학적인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 Theory and Observation

[204]
반 프라센은 이론과 관찰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재론자들의 오래된 반론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가?

[204]
반 프라센은 우선 “우리의 모든 언어는 속속들이 이론에 감염되어 있다”고 말하는 실재론자들의 말에 동의하며, 과학의 언어에서 그러한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204-205]
또한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대상과 기구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탐지 가능한’ 대상 사이에 연속적인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실재론자들의 주장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관찰 가능한’이라는 용어가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모호한 개념은 어떠한 범주의 경계선상에 있는 사례들을 지니는 개념이다. 반 프라센은 모호한 개념이더라도 양극단에는 이에 관한 명확한 사례들이 존재하며, 이 사례들을 가지고 분명한 구별을 이끌어내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 프라센은 육안으로 보는 것은 관찰의 명백한 사례이며, 물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을 선천적인 한계를 지닌 특정 종류의 측정 장치로 본다. 그에게 관찰 가능성의 기준은, 어떤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때 관찰 기구의 도움 없이 우리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 머스그레이브의 반박: 관찰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나타나는 능력이기 때문에 반 프라센이 주장하는 관찰가능성의 외연과 인식가능성의 외연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예) 우리 중 일부는 색맹인 것과 같은 예로 인간에 의해 관찰 가능한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인간의 내재적 한계는 역사 속의 진화론적 변화와 관련 있는 문제이다.

[205-206]
이에 대해 반 프라센은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한 것에 대한 분류는 존재론적인 의미는 없다고 한다. 관찰 가능함과 존재는 서로를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 프라센은 과학의 목적과 인식론적 태도를 통해 과학적 실재론을 정의했으므로 관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구분의 인식론적인 의미는 실재론 논쟁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문제는 과학 활동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또 우리가 과학 이론을 받아들일 때 얼마만큼 믿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반 프라센은 인간은 그들이 관찰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론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반 프라센에게 있어서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믿는 것, 즉 그 이론이 관찰 가능한 것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 프라센은 한밤중에 벽을 할퀴는 소리와 무언가 작은 발을 가진 것이 발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경황을 가지고 쥐가 있다고 추론하는 예시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쥐가 있다는 것을 추론하는 방식과 같은 것으로 윌슨의 안개상자를 통해 전자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반 프라센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추론은 오직 경험적 적합성을 최선의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끌 뿐이라고 말한다. 반 프라센은 관찰 불가능한 이론에 대한 최선의 설명에서는 경험적 적합성과 참은 일치하지 않으며, 우리는 거기에 실제로 전자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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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이러한 주장이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적합성에 언젠가 관찰자가 관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포함되는 것만으로 생쥐에 대한 증거가 전자에 대한 증거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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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반 프라센이 과학자들은 관찰 불가능한 것에 관한 이론에 대해서는 실제로 경험적 적합성만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은 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만일 한 과학자가 안개상자를 통해 전자를 탐지할 때, 그가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도, 그러한 탐지를 할 수 있을지 반문한다. 머스그레이브는 반 프라센의 과학적 세계와 이론적 세계간의 구분을 언급하며, 전자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전자의 이론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는 것은 과학자들의 관행을 고려해볼 때 맞지 않다고 말한다.

[207-208]
마지막으로 머스그레이브는 관찰 가능성과 관찰 불가능성의 구분을 다루는 반 프라센의 방식이 비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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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관찰 가능한 것인 A와 관찰 불가능한 것인 B를 포함하는 이론 T를 가정할 때, 구성적 경험론자들은 관찰 불가능한 B에 대한 명제를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다루게 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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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머스그레이브는 구성적 경험론자들이 관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구분을 짓는 이분법이 일관적이지 않고, 결국에 이들은 이론 T에 속한 관찰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III. Realism and 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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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실재론만이 과학이 거두고 있는 상당한 예측적 성공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실재론의 궁극논변이다.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면 과학의 성공은 단지 기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설명하는 최선의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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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도 현대 과학 이론의 성공이 기적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실재론자들이 과학의 성공을 참을 확인하는 증거로 설명하는데, 이는 정당화 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적의 논증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 프라센은 과학을 생물체의 생존환경처럼 치열한 경쟁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며 오직 성공적인 이론, 즉 사실상 자연의 실제적 규칙성을 파악한 이론만이 살아남는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진화론적 설명은 형이상학적 가설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하는 선택 매커니즘에 근거하여 과학적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에 의존하지 않고도 과학의 성공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경험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 매커니즘에 따라 나타난 과학의 성공은 기적이나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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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반 프라센의 진화론적 설명이 과학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왜 어떤 이론이 성공적인지를 설명하는 것과, 왜 성공적인 이론만 살아남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 프라센의 설명은 왜 성공적인 이론만 살아남는가에 대한 설명이며, 이에 대한 내용은 실재론자나 반실재론자 모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이 왜 어떤 특정 이론이 성공적인가의 문제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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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실재론자들은 자연선택의 매커니즘이 자연에 내재한다는 주장 자체가 경험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가설로 간주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설사 이러한 선택 매커니즘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경험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진화론적 설명이 과학의 성공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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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또한 과학의 성공을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신기한 예측적 성공을 만족시키는 이론들에 대한 것으로 제한하며, 기존에 알려진 결과들을 예측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결과들을 예측하는 문제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전자는 허구의 존재자들을 상정하여 기존의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모형을 고안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실재론적 설명이 아니라면 기적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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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머스그레이브는 실재론자들의 궁극 논변이 기존에 알려진 결과에 대한 예측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결과에 대한 예측의 문제에 관한 것일 때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반 프라센은 이러한 정교화된 궁극 논변에 관해서는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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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궁극 논변은 메타적 수준으로 나아간다. 메타적 수준에서는 인식론이 자연화 되어야 하며 과학철학은 과학에 대한 사실들을 설명해야 한다. 이때 설명에 대한 요구와 실재론자들이 참인 이론에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 설명하는 것이 참이 아닐 경우 그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이론에는 설명이 들어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적절한 설명은 참인 이론을 요구한다. 하지만 반 프라센은 설명에 대한 실재론자들의 요구를 공격한다. 그는 설명은 반드시 참인 이론을 요구하지 않으며 설명력이란 참인 이론만큼이나 경험적으로도 적합한 이론도 해낼 수 있는 실용적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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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은 설명적 원리들이 거짓이라 생각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설명에 대하여 말한다고 주장하며, 실재론자들이 설명에 하는 요구는 실제 과학에서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명이 참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뉴턴은 그의 중력을 보이기 전에 중력에 대한 설명을 했어야 했지만, 뉴턴은 자신의 이론에서 중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예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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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설명에 대한 요구와 궁극적 설명에 대한 요구에 대하여 실재론과 본질주의를 함께 다루는 실수를 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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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우리가 어떤 것을 설명할 때는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실재론자들은 때로 가장 심오한 설명력은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궁극적으로 자기설명적인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자기설명적이라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본질주의의 핵심으로서, 진정한 설명이란 오직 궁극적이거나 자기설명적 설명이어야 한다고 보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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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질주의의 전통에는 진정한 설명은 또 다른 어떤 것을 상정함으로써 현재의 의문점을 해소해서는 안 된다는 직관이 전제되어 있으며, 이 전제에는 진정한 설명이란 문제풀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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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설명이 어려운 문제의 효과적인 해결방법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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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과학적 설명에 있어 이러한 직관과 본질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 프라센은 뉴턴이 설명을 거부했고 그의 이론에 중력현상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단지 기술할 뿐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머스그레이브가 보기에 뉴턴은 자신의 중력이론에서 중력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설명이 요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정확한 추론을 했고 조수와 같은 중력현상을 중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히 기술하며 명쾌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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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그레이브는 반 프라센이 뉴턴의 주장을 본질주의와 실재론 사이에서 혼동하여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을 기술하면서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설명이라는 기술이라는 개념 사이를 반대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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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서 볼 수 있듯이 궁극적이거나 자기설명적인 설명이 없이도 설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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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은 앞에서 우리의 경험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원리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대상에 관해서는 경험적 적합성 이상의 인식론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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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반 프라센은 구성적 경험론이 과학적 설명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과학적 설명도 질문의 맥락과 관련된 상대적인 대답일 뿐이라고 보며, 설명의 화용론적pragmatic 분석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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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은 설명을 굉장히 맥락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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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이 제시하는 설명이란 단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설명이론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설명은 설명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따라서 “왜 (R과 대조하여) Q인가?”라는 식의 질문에는 “P가 (R과 대조하여) Q이다”라는 형식의 대답이 적절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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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설명이라면, 그리고 이 질문형식이 문맥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설명의 적합성도 여러 가지 문맥에 의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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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반 프라센은 설명의 비대칭성 문제의 시작은 현상들 간의, 또는 예측과 설명 간의 대칭적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대답을 요구하는 “왜?”라는 질문 형태의 문맥에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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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는 설명의 비대칭성 문제와 관련하여 깃대와 그림자의 반례에서 깃대를 탑으로 수정하여 서술한다. 그림자의 길이에서 탑의 높이를 유도할 수 있더라도, 탑의 높이에서 그림자를 유도하는 것은 동등한 설명의 지위를 얻을 수 없다. 반 프라센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질문이 발생하는 문맥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림자의 길이에 대한 설명이 탑의 높이라고 할 때의 문맥과 탑의 높이를 그림자의 길이로 설명하려는 문맥이 다른 점을 지적한다. 
반 프라센은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명백한 해결책은 바로 인과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설명은 원인을 드러내 주지만, 비설명적 연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인과성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아니라고 본다. 어떠한 요소가 원인으로 선정되느냐는 것조차 맥락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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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은 경험적으로 충분하고 강한 이론도 참인 이론만큼이나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설명되는 사실은 항상 관찰 가능한 사실이며, 그러한 사실에 대한 설명에서 인용되는 사실 역시 관찰 가능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론은 관찰 가능한 사실 바로 그것에 대해 옳은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충분한 이론들은 정의상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때로는 어떤 관찰 가능한 사실이 다른 관찰 가능한 사실을 인용하면서 설명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앞에서 나온 깃발은 좋은 예이다. 깃발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는 관찰 가능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 프라센의 과학적 설명에 관한 예에서 든 비열의 수치와 같은 일반화된 초기조건들은, 사실 관찰 가능한 사실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관찰 가능한 현상들에 대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과학에서 이것들은 항상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관찰 가능한 현상들이다.
반 프라센은, 실재론자들은 어떤 이론이 경험적으로 충분한 설명 안에 있더라도 그것이 참이어야 한다고 요구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실재론자들은 경험적으로 충분한 증거를 넘어서, 자신들의 엄격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부담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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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구성적 경험론자도 관찰가능과 관찰불가능 사이의 구분을 해야 하고 여기에 결정적인 인식론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학의 새로운 예측적 성공에 관한 실재론적 설명의 대안을 제공해야 하고, 화용론적 설명에 관한 복잡한 설명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은 각각 실재론과 구성적 경험론의 단점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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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은 이전의 다른 반실재론의 입장보다는 조금 더 생존 가능했다. 하지만 머스그레이브는 그 이유를 단지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이 기존의 입장들보다 약화도니 이론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구성적 경험론은 모든 면에서 기존의 반실재론보다 약한 입장이며 따라서 보다 실재론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머스그레이브는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론이 실재론에게 타격을 약간 입히는 정도였다고 평가한다.


(2018.04.12.)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