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이가 3주 전에 새끼를 낳았다. 화천이가 낳는 새끼들은 대체로 건강한 편인데 이번 새끼들은 더 건강한 것 같다. 새끼들의 털 모양이 예전과 다른 것을 보니 새끼들의 친부가 지난 번 수컷이 아닌 모양이다. 화천이가 나를 보고 “야-옹”하고 울면 새끼들은 집에서 뽈뽈뽈 기어 나와서 나한테 덤볐다가 자기들끼리 뒹군다.
(2017.10.15.)
화천이가 3주 전에 새끼를 낳았다. 화천이가 낳는 새끼들은 대체로 건강한 편인데 이번 새끼들은 더 건강한 것 같다. 새끼들의 털 모양이 예전과 다른 것을 보니 새끼들의 친부가 지난 번 수컷이 아닌 모양이다. 화천이가 나를 보고 “야-옹”하고 울면 새끼들은 집에서 뽈뽈뽈 기어 나와서 나한테 덤볐다가 자기들끼리 뒹군다.
(2017.10.15.)
전래동화 <소가 된 게으름뱅이>는 아이들에게 게으르면 메시지를 전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동화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게으름뱅이가 소가 된 것은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관찰력과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면서 소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그렇게 일한 소가 결국 어떻게 도축되는지 모를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게으름뱅이는 소가 되기를 원했으니 최소한의 관찰력과 판단력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약간 수정해보았다.
게으름뱅이에게는 판단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그래서 노인에게서 소탈과 소가죽을 받고 그 자리에서 착용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좋은 데 쓰겠습니다.”, “어, 안 되는데. 여기서 써야 하는데...”
그렇게 소탈과 소가죽을 받아든 게으름뱅이는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 일대)을 향했다. 당항성은 당나라로 가는 배들이 정박하던 항구였다. 게으름뱅이는 일행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는다.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소승은 불법을 구하러 천축국에 가려고 합니다.”
“아, 잘 됐네요. 저도 천축국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시지요.”
“처사님도 불법을 구하러 가십니까?”
“그건 아닌데요, 제가 여기서 소가 되면 그게 불법이에요.”
스님들과 함께 천축국에 간 게으름뱅이는 소탈과 소가죽을 뒤집어쓰고 소가 되어 평생 아무 일도 안 하고 놀면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다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길흉화복이 바뀔 수 있으며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7.10.14.)
철학은 평범한 일상 경험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관해 생각하기도 한다. 먹기와 같은 단순한 경험도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양은 삶에서 얻는 즐거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특히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먹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어떤 즐거움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예컨대 한편으로는 날씬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을 결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철학적으로 사색하기 시작한다. [...]
철학은 평범한 일상 경험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관해 생각하기도 한다. 먹기와 같은 단순한 경험도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양은 삶에서 얻는 즐거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특히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면 그렇다. 그러나 먹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어떤 즐거움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예컨대 한편으로는 날씬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을 결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철학적으로 사색하기 시작한다. [...]
많이 먹을지 덜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무슨 놈의 철학적인 사색인가? 한국 사회가 철학을 얼마나 만만하지 보는지는 이렇듯 모의고사 지문에서도 나타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류의 지문이 GRE 문제에서도 나온다는 점이다. 유학 준비 중인 대학원생에 따르면, GRE 독해 지문에서도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라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일상을 낯설게 보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국내에서 생산된 개소리가 아니라 외국에서도 횡행하는 개소리인 모양이다.
도대체 일상을 낯설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몇십 년 동안 같이 살던 배우자가 낯설게 보인다면 그것은 배우자가 외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철학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흥신소에 문의해야 한다. 평생 살아온 동네가 낯설게 보인다면 그것은 치매 전조 증상이다. 철학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젊었을 때 낙엽을 볼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중년 이후에 낙엽을 보면서 서글픈 감정이 든다면 그것은 갱년기 증상이다. 철학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건강보조식품을 먹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일상을 낯설게 보아서 어디다 쓸 것이며 고작 그런 쌈싸먹는 소리나 하려고 철학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2017.10.13.)
Village People - YMCA
( www.youtube.com/watch?v=Dks2NJAVhUs )
Village People - Macho Man
( www.youtube.com/watch?v=AO43p2Wqc08 )
Village People - Go West
( www.youtube.com/watch?v=1wc-AQJ2MYo )
(2017.12.09.)
글을 쓰라고 하면 멀쩡하게 못 쓰고 꼭 미친 사람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글에 수식어나 비유를 넣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딘다. 말끔하게 쓴 글을 보면 꼭 초등학생이 쓴 글 같다면서 어떻게든 군더더기를 덕지덕지 붙이고야 만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럴까?
좋은 글의 기준은 여러 가지라서 한 가지 잣대로 글을 평가할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꼭 글 못 쓰는 사람들이 그딴 소리를 한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로 좋은 글의 기준이 여러 가지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좋은 글의 기준은 있다. 바로, 정보 전달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쓰든, 정보를 전달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평론이든 감상문이든 수필이든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수식어나 비유 등도 정보 전달과 관련된다. 구술로 전승되던 작품에는 처음부터 문자로 작성된 작품보다 수사적인 표현이 더 많다. 그러한 표현에는 문학적인 기능도 있지만 정보 전달의 기능도 있다. 구술 문학에서의 수식어는 화자가 말하는 단어를 청자가 동음이의어의 다른 뜻이나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로 혼동할 가능성을 줄여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할 때 정보 손실률을 낮춘다. 예를 들어, ‘아기’와 ‘악의’는 해당 단어만 듣고서는 둘 중 어느 단어를 말하는 건지 헷갈릴 수 있지만, “쌔근쌔근 자는 아기”라는 말을 듣고 “쌔근쌔근 자는 악의(惡意)”를 떠올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구술 문학에서의 수식어는 여러 번 들을 필요 없이 한 번만 듣고도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불필요하게 붙는 수식어는 오히려 글의 정보 전달을 방해한다. 정보 전달 기능이 떨어지더라도 문학적인 기능이 보강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대개는 추한 것에 추한 것이 덧붙는 경우라서 이중으로 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면 불필요한 수식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은 왜 수식어를 탐닉하는가? 왜 그들에게 수식어가 적은 글은 초등학생이 쓴 글처럼 보이는가? 그들이 초등학생처럼 글을 못 쓰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초등학생이 쓴 글 같다고 하는 글을 보자. 대개는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법이다. 글 못 쓰는 사람들 주변에는 죄다 비슷하게 글 못 쓰는 사람들이고, 이상한 글에 환장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죄다 이상한 글에 환장하는 사람들이다. 글이라고 써봤자 개똥 같은 글이고, 좋다면서 가져와 봐야 정상적인 글이 아니다. 아무리 글을 개떡 같이 쓰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수식어가 적다는 이유로 헤밍웨이의 글을 두고 초등학생이 쓴 글 같다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수식어가 아니다.
수식어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초등학생이 쓴 글 같은 것이나 쓰는 주제에 정보 전달이 안 되게끔 글에 온갖 수식어를 쳐바르며 좋아한다. 표현이 어쩌네 일부러 역설적인 효과를 주었네 하며 자기들끼리 핥고 빨고 즐거워하지만, 이는 단지 정보 전달이 안 되어서 글의 파편들을 탐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들의 글에 달라붙어 있는 수식어를 제거하고 요점만 깔끔하게 남겨놓는다고 해보자. 위장막 역할을 하는 수식어가 사라지고 빈약한 내용과 엉성한 구성이 눈에 보이니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이 쌓인 똥밭에서 눈이 녹아 똥이 드러나는 것처럼,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글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아무리 글 보는 눈이 없더라도, 자기 글이 엉성해 보이기는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수식어를 탐닉하는 사람들은 글 변태가 아니라, 자기들이 글을 더럽게 못 쓴다는 사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2017.10.10.)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