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7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2017/10/06
2017/10/05
2017/10/04
윤리학자의 참교육
철학에서는 아무 말이나 그럴싸하게 잘 꾸미기면 다 용납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말이나 막 했는지 어떤 선생님은 교양서적에 이런 말을 써놓기도 했다.
도덕의 문제도 ‘도덕 전문가’가 따로 있다. 도덕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윤리학자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덕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 문제에 대해서는 개나 소나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학자는 생명・의료윤리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언은 어디까지나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적합한’ 전문가의 발언은 아니다. 생명과학자는 생명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윤리・도덕 문제에 관해서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는 도덕에 관한 발언을 자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가 도덕에 관한 ‘적합한 권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는 ‘그 종교의 도덕’에는 전문가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따라야 할 도덕의 전문가는 아니다. (최훈, 136-137쪽)
“개나 소나”라는 말은 내가 웃기려고 덧붙인 것이 아니라 실제 원문에 있는 말이다. 얼마나 짜증 났으면 교양 서적에서 “개나 소나”라는 표현을 썼을까?
관리 안 되는 철학과의 일부 학생들에게는 생각 안 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전공 수업에서도 아무 말이나 하며 대체로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왜 그럴까? 옳고 그름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에 맞추어 판단해야 하지만, 좋고 싫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좋고 싫음의 문제인 것처럼 슬쩍 바꾸면, 멍청한 데다 무식하기까지 한 사람조차도 마치 뭔가 그럴듯한 견해가 있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통제되지 않는 철학과 수업에서 난장판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학생에게는 어떠한 교육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윤리학자 루이스 포이만과 제임스 피저가 제시하는 방법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나는 철학 강의 초반에, 주관적 상대주의를 격렬하게 옹호하는 학생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이들은 “판단하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첫 번째 과제를 내준다. 다음 수업 시간에 나는 모든 답안지에 “F”를 써서 되돌려준다. 내가 쓴 논평들을 보면 대부분의 답안지가 우수했음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학생들이 이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면(몇몇 학생들은 이제껏 자신들의 과제물에 그런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어서 그 의미를 묻기도 한다), 나는 채점을 함에 있어서 주관주의를 받아들였노라 대답한다. “하지만 그건 부당합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 더 이상 윤리학에 관해서 주관주의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포이만・피저, 49쪽)
* 참고 문헌
최훈, 『변호사 논증법』 (웅진지식하우스, 2010).
루이스 포이만・제임스 피저, 『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견』, 박찬구 외 옮김 (울력, 2019).
(2017.08.04.)
2017/10/03
교수 연구실에 붙은 성경 구절
일이 있어서 물리천문학부에 갔을 때, 연구실 명패 밑에 붙여놓은 성경 구절 푯말을 보았다. 신명기 8장 2-3절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2-3절)
그 교수는 왜 이런 구절을 붙여놓았을까? 지도학생이 연구 주제를 못 찾고 헤매도 모세가 광야를 헤맨 것을 기억하며 견디라는 것인가, 지도학생을 낮추시며 지도학생이 주리게 하시며 연구비를 먹이는 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사는 줄 알게 함이라는 건가, 아니면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교수라서 성경 구절을 붙여놓은 것인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나도 개신교 신자라서 여느 신자들처럼 마음에 품고 산다. 마태복음 4장 19절 같은 구절이 그렇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장 19절)
그렇지만 나는 교수가 된다고 해도 성경 구절 같은 것을 연구실 문에 붙여놓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고 해도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문구를 교수 연구실 앞에 붙여두는 것은 좋지 않다.
(2017.08.03.)
전원주택을 처음 구입하는 사람들의 과욕
예전에 박재희 박사가 EBS에서 손자병법 강의할 때 한국인과 중국인이 처음 사업할 때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업 자금이 1억 원 있으면 중국인은 그 돈을 3등분하여 세 번 사업한다고 한다. 처음 사업하면 무조건 망하게 되어 있으니 사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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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잘 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그에게 “문화 권력”이라는 수식어가 들러붙는다. “권력”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하는데 “문화 권력”이라고 불리는 건 그냥 그 사람이 요새 잘 나간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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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정소연 옮김 (궁리, 2007). ] [1] <런던 중앙 인공부화, 조건반사 양육소> 34층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회색 건물 세계 정부의 표어: “공동체, 동일성, 안정” 선과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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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는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생물학자가 어쩌다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인가? 『다윈 지능』에서 최재천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목사님(강원용 목사)은 설명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최 교수는 진화론자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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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서 명령의 뜻을 나타내는 말투로는 해라체와 하라체가 있다. 해라체는 ‘동사 어간+어라/아라’ 형태의 구어체 명령형이고, 하라체는 ‘동사 어간+라/으라’ 형태의 문어체 명령형이다. 대화할 때 상대방에게 어떤 명령의 뜻을 전달할 때는 해라체를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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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되는 것이다> 짤은 『고우영 십팔사략』 10권 96쪽에 나온다.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송으로 이어지는 5대 10국 시대에서 후한이 망할 때 풍도가 유빈을 죽인 일을 그린 것이다. 907년 주전충이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後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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