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면서 과학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대학원을 왔다. 과학철학 하겠다고 대학원 오는 사람은 대체로 철학을 잘 몰라도 과학을 잘 알든가, 과학을 잘 몰라도 철학을 잘 알든가, 둘 다 잘 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대학원에 오는 미친놈은 나 말고는 못 봤다. 나는 왜 그랬나?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대학원 와서 불벼락을 맞고 회심하여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지만(이를 두고 “아카데미즘의 승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 때만 해도 나는 진중권처럼 이상한 놈들이나 대충 욕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개나 소가 욕을 해서는 아무도 들을 체를 안 해준다. 똑같은 말이라도 권위가 실리면 사람들은 멋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권위는 학위에서 온다. 그렇게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그렇듯이 재앙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대학원에 지원하려면 자기소개서를 써내야 했는데 자기소개서 항목 중에 대학원에서 무엇을 전공할지 밝히라는 부분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다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다니, 나는 학부 때 배운 것도 없고 공부한 것도 없는데 대학원 들어갈 때 전공을 정해야 한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학부 동기한테 물어보았다. 내 상황이 하도 막장이라 답이 안 나왔다.
답이 안 나오자 나는 여느 때처럼 동기한테 실없는 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날도 미친놈들 흉내를 냈다. 그 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 ‘철학’을 붙이는 놀이였다. 개도 철학, 소도 철학, 다 철학, 그러면서 놀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내가 ‘경제 철학’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들어주겠네. 미친놈아, 경제 철학이 어디 있어?” 사실,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막 지껄인 것이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경제 철학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고 과학철학의 한 분과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그래, 경제 철학이다.” 동기가 옆에서 말렸다. “미친놈아 적당히 좀 해. 네가 교수면 경제 철학 한다고 하는 놈을 받아주겠냐? 딱 봐도 정신 나간 소리인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그냥 과학철학 한다고 하지 뭐.” 그렇게 나는 과학철학 전공자가 되었다. 그리고 석사 논문을 경제학에서의 과학적 실재론에 관련해서 썼다. 사례로 국제경제학의 중력 모형도 나온다.
얼마 전에 내가 다녔던 학부에서 ‘미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다룬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래 인문학? 그러면 역사학은 과거 인문학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홍보자료를 보니 아무 사물에나 ‘철학’을 붙이면서 미친놈들 흉내 내던 학부 때가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사람들은 여전히 재미있게 사는구나 싶었다.
(2016.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