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폭스의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8장을 읽다가 흥미로운 두 가지 일화를 찾았다.
하나는 어빙 피셔가 파레토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피셔는 1894년 유럽 여행 때 파레토를 방문했는데, 파레토의 부인이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당시는 여성의 흡연을 금기시했다. 19세기 유럽에서 남성의 흡연은 점잖고 예의바른 행동으로 여겼지만 여성의 흡연은 건방진 행동으로 여겼다.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건강 때문에 여성의 흡연을 금기시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로버트 C. 머튼의 이야기다. 머튼은 10대부터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콜럼비아대학 공대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대학 공대 박사과정에 입학한 머튼은, 입학한 첫해에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증권사에 들러 9시 30분까지 주식 거래를 했다. 주식을 거래하면서 컴퓨터공학보다 경제학에 더 흥미를 갖게 된 머튼은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싶어 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대학에는 경제학 박사과정이 없어서, 머튼은 경제학 박사과정이 있는 학교 여섯 곳에 지원서를 보냈다. 공대를 나왔다는 장점을 인정한 MIT만 머튼의 입학을 허가했고, 나머지 다섯 곳은 경제학과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약 30년 뒤인 1997년에 머튼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학자들은 ‘블랙-숄즈 공식’을 ‘블랙-숄즈-머튼 공식’이라고 불렀다.
위의 두 일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서구에서는 여성의 인권이나 자유가 한국보다 더 많이 보장된다고 하는데, 130년 전만 해도 여성이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기 힘들었다. 또 서구에서는 한국처럼 자기 전공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기 쉽다고 하며 통섭이 어쩌네 하는 소리를 하는데, 50년 전 미국에서는 다른 전공 출신의 학생을 대학원에서 잘 받아주지 않았고 전공을 바꾸는 데 제약을 받기도 했다.
선진국의 과거 모습을 살펴보면 한국의 현재 모습과 비슷한 면을 찾을 수 있다. 선진국도 처음부터 선진국이 아니었다. 선진국의 과거 모습이 한국의 현재 모습이라면, 선진국의 현재 모습이 한국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 지금 한국 상황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한심하고 암울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고 가망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현실은 냉정하게 보는 것과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양립가능하다고 본다.
* 뱀발(1): 파레토의 부인은 매우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피셔의 박사논문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주기도 했다.
* 뱀발(2): 로버트 C. 머튼의 아버지는 로버트 K. 머튼이다. 과학사회학에서 나오는 그 머튼이 맞다.
* 참고 문헌: 저스틴 폭스,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윤태경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0)
(201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