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22

“저항하는 인문학” 또는 “해방의 인문학”



인문학이 대학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항하는 인문학”이니 “해방의 인문학”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우 편협한 견해일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좋지 않다.

우선, 그들에 따르면 인문학 중에 남는 것은 전체의 10%도 안 된다. 우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외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도 제외된다. 수리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도 제외된다. 포퍼나 노직도 제외된다. 동아시아에서도 맹자나 묵자 정도 빼놓고 다 제외된다. 그러면 현대의 몇몇 철학자만 남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철학자들의 철학이 남는 것이 아니라 과격하지만 현실성이 전혀 없는 구호, 그리고 빈약한 개념에 덕지덕지 붙은 형용사구만 남는다. 그러려고 대학에 인문학이 전공으로 있어야 하는가?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체 게바라 티셔츠 입듯 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전략적으로 봐도 “저항하는 인문학” 같은 소리는 정말 안 좋다.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자를 배출하지 않겠다는데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대학에서 퍽이나 인문학이 살아남겠다.


- 대학&정부: “나, 너네 없앨 거임.”

- 인문학 전공자: “안 돼요! 우리를 없애면 안 돼요!”

- 대학&정부: “왜?”

- 인문학 전공자: “우리는 당신들한테 저항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자유롭다구요!”

- 대학&정부: “꺼져, 미친놈들아.”

< 끝(폐과) >


아무 것도 모를 뿐 아니라 최소한의 감조차 없는 사람들은 한국의 인문학을 위해서 짹 소리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

(2015.04.24.)


[외국 가요] 포 논 블론즈 (4 Non Blondes)



4 Non Blondes - What’s Up

( www.youtube.com/watch?v=1IsPiADs9Yo )

(2024.03.04.)


대학원생이 되새겨볼 말 – 야마나카 신야의 『가능성의 발견』

   

야마나카 신야는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다. 노벨상 수상 이후 야마나카 신야는 『가능성의 발견』이라는 책을 썼다. 재능 없다고 손가락질 받던 정형외과가 기초과학 연구자로서 노벨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다음은 그 중 일부분이다. 대학원생이 되새겨볼 만하다.

“당시 교수님이 강조했던 ‘아베노의 개 실험’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

아베노는 오사카시립대학 의학부가 있는 오사카시 아베노구의 아베노를 말한다. 어떤 미국인 연구자가 미국 개는 머리를 때리면 “멍멍”하고 운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랬더니 다른 일본인 연구자가 일본 개 역시 머리를 때리니 “멍멍”하고 울었다는 ‘일본 개 실험’ 논문을 썼다. 그런데 더 한심한 어떤 연구자가 아베노에 사는 개를 실험해 “멍멍”하고 울더라는 ‘아베노의 개 실험’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실험을 재탕, 삼탕하는 연구를 경계하라는 것이 ‘아베노의 개 실험’의 속뜻이다.” (57쪽)

“어느 날, 메리 교수는 연구소에 근무하는 20명 정도의 박사 후 연구원들을 모아 놓고 ‘VW의 중요성’을 말했다. [...] VW의 V는 Vision의 V이다. 비전은 장기적 목표로 바꿔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VW의 W는 Work hard의 W이다. 즉,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다.

일본 사람들은 참 열심히 일한다. [...] 하지만 어느새 목적을 잃고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잊기도 한다. 나 자신도 그런 자각이 있었기에 메리 교수의 VW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았다.” (57-59쪽)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실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반드시 가능해진다. 나는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124쪽)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은 반드시 실현된다. [...] 우리의 비전은 몇 장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책갈피를 찾는 무모한 것이었다. 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37-38세였으며 정년까지는 30년이 남아있었고, 정년 전까지만 찾으면 된다는 각오였다. 비전은 비전이지만 아주 먼 미래까지 생각한 장기 목표였던 셈이다.

초기화 인자를 찾는다는 목표 자체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단기 목표로 ES세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자를 찾기로 했다. 그런 인자는 여럿 있을 것이며 한 개를 발견하면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다. 또한 그런 중요한 인자 중에는 책갈피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나하나 단기 목표를 달성해가면서 장기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127-128쪽)

(2015.04.22.)

2015/06/21

[과학철학] John Worrall (1989), “Structural Realism: the Best of Both Worlds”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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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전한 과학이론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휘어져 있는 시공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작은 입자, 여러 가지 종류의 힘들 등. 어느 한 가지도 우리의 맨눈으로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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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참 여부를 둘러싸고 많은 실재론 논쟁이 오고 갔으나 모두가 알고 있듯 이러한 논쟁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며 되려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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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워럴은 그중에서도 18세기 에테르 이론에 관하여 푸엥카레가 제시한 오래된 아이디어가 실재론과 반-실재론자들의 상충하는 두 세계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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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논증인 ‘기적불가논증no miracle argument’과 반실재론자들의 무기인 ‘과학이론의 급진적 변환radical shift의 사례들’을 조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저자의 목표이며 이 글의 제목인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이 달성하리라 기대하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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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불가논증은 과학이론의 찬란한 성공은 ‘과학이론들이 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지시체들의 참된 모습을 기술하거나 적어도 참에 매우 가까운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도달 가능했다고 이야기 한다. 만일 과학이론이 이룩한 수많은 경우의 엄청나게 대담한 경험적 예측이 전부 허상을 상태로 기능했던 것이라면 이는 대단한 기적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적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그 이론적 대상들이 실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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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가설이다.’ 하지만 과학이론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훌륭하게 설명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실재하는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주장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역관계가 성립한다는 이 주장의 타당성을 우리는 조금 더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미 모두에게 널리 알려진 경험적 사실들을 대상으로 이들을 정합성 있게 설명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기응변의 부가이론들을 활용하면 골수 창조론자도 화석의 조재를 훌륭히 설명할 수 있다. 정말로 놀라운 기적임을 주장하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들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라우든이 보였듯이 기적불가논증에 기댄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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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불가논증은 우리의 직관에 심리적으로 호소하는 면이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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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이런 불편한 기분 역시 조금 더 엄밀한 과학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차차 누그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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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뉴턴 이론의 운명을 따라가 보자. 뉴턴 이론은 엄청난 예측을 해냈지만 일반상대성 이론과 상충하면서 결과적으로 틀린 이론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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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단순히 뉴턴 이론을 자신의 특수한 경우 중 일부로 포섭하는, 조금 더 일반적으로 확장된 이론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재론자들에게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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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들의 참 개념을 ‘근사적 참’ 또는 ‘본질적으로 교정하는 것essentially correct’으로 일보 후퇴시킴으로써 그들의 수정된 실재론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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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과학 이론은 근사적 참에 기반하고 있다. 과학이론은 본질적으로 누적적이며 단지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기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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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주장에 따라 현재 받아들이는 이론을 T라고 하고 그 대안 이론을 T라고 하면 T는 T에 비해 더 참에 가까울 것이다. 이 관계는 누적적이므로 우리는 참에 더 가까운 미래의 이론 T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끊임없이 조금 더 참에 가까운 이론 T을 발견할 것이다. 먼 미래 한없이 K에 가까운 T에 도달한 후 본래의 시작점에 위치한 과거의 T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때도 과연 우리는 T가 근사적 참을 말하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개구리(K)는 근사적으로 올챙이(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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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들의 가정이 부정될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만약 과학사의 사례에서 도저히 누적적인 변화로 볼 수 없는 급격한 변화radical shift를 인정한다면, 정말로 (수정된 실재론자들을 포함한) 실재론자들은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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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과학사의 사례를 살펴보자.
과학의 발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라 이루어졌다.
(1) 빛다발은 작은 물질적 입자들로 이루어져있다.(18세기)
(2) 빛은 주위 모든 곳에 존재하는 탄성체(에티르)의 진동을 따라 움직이는 비물질이다.
(3) 빛은 탄성적 성질을 지닌 물질(에테르)이 아닌 전자기장의 진동에 의해 전달된다.
(4) 빛은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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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과 (2) 사이의 어떤 식의 확장관계를 찾을 수 있을까? 한쪽은 입자설을 이야기하고 반대편은 그 입자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대신 진동하는 어떤 물질(에테르)에 의한 빛의 전달을 주장한다. 빛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 둘 사이에는 이론 수준에서의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엿보이는 누적적 성질은 과학이론은 선행 이론에 기반하여 얻은 경험을 포용하며 후속이론으로 발전해왔다는 경험적 사실에 제한된다. 경험적 수준에서는 분명 필연적으로 누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론 수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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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뉴턴 이론의 경우로 돌아가자. 이번에도 경험적 수준에서는 상대성이론을 뉴턴역학의 경험을 포용하는, 일종의 확장된 이론이라 여길 수 있다. 두 이론에 의해 도출된 떨어지는 사과의 속도는 각각 다른 값을 나타내지만 이는 관찰적으로 구별 불가능하다. 따라서 뉴턴의 방정식의 예측에 의한 경험값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한정된 경우(속도의 비가 광속에 비해 한없이 0에 가까울 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론적 수준에서는 그렇지 않다. 뉴턴이론에서 공간은 한계가 없고 시간은 절대적이며 질량은 언제나 일정하다고 전제하는 반면, 상대성 이론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 둘은 철저히, 완전하게 서로의 전제를 배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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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는 과학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경험적 수준의 누적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론적 수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현재의 이론들도 과학사의 빈번한 사례들에 비추어보아 미래에는 거짓이라 판별될 것이 귀납적으로 자명하므로 우리는 영원히 참된 이론을 알 수 없다는 일종의 ‘회의적 귀납’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메타-회의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대 과학이론이 근사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참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 동시에 과학사의 수많은 사례에 비추어보아 알 수 있듯이 이 이론들이 존재적으로 반드시 거짓으로 판명될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것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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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하여 실용주의자 또는 구성적 반실재론자들은 ‘이론은 경험적 결론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으며 이론의 대상으로 삼는 지시체의 실재 유무를 묻는 것은 과학 이론의 역학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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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만족할 수 없는 일부는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론이 자연의 실재 참 모습을 비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참이라 확언할 수는 없다’는 포퍼식의 추론적 실재론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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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두 입장 모두는 기적불가논증에는 답을 하지 못한다. 후속이론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된 선행 이론들이 여전히 경험적 수준에서는 놀라운 수준의 예측력을 발휘했던 기적의 사례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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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과학 이론의 경험적 성공과 과학사의 실패 사례들을 양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일까? 보이드와 퍼트남은 과학적 실재론이 이미 이에 대하여 충분한 답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과학 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누적적인 사례 이외에 다른 급격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학자들은 작업은 종래의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종전 이론을 한정한 경우로 가지는 포용력을 지닌 후속이론을 개발하는 두 가지 경우로 한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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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라우든은 플로지스톤, 칼로릭, 에테르 등의 사례를 들며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논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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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적 성질을 가진 에테르의 기계적, 물리적 진동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는 프레넬의 믿음이 어떻게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 편입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실재론자들은 또 한 번 후퇴를 감내한다. 그들은 누적적인 변화가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의 경우를 ‘성숙한 과학 이론’으로 한정시킴으로서 라우든의 비판 사례들을 피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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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숙한 과학’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과학을 지칭하는가? 어떤 기준을 들어 성숙한 과학을 미성숙한 과학 이론과 구분해야 할까? 성숙한 과학이라는 구획으로 스스로를 반실재론자들의 지적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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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와 퍼트남은 위의 기준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워럴은 그 스스로 성숙한 과학을 위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실재론의 중심 논증인 ‘기적불가논증’의 진의를 읽어냄으로서 해결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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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기적불가논증은 오직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거운 이론에 한해서 적용될 수 있다. 기존의 지식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이론은 어떠한 기적도 낳지 않는다. 따라서 실재론이 언급하는 기적불가논증은 새로운 경험적 사실의 예측이 가능한 이론에 한해서만 이야기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성숙한 과학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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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자들은 이 필터를 통해 라우든의 비판 사례들 중 많은 수를 미성숙한 과학의 예로 규정하고 회피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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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필터를 통해서도 걸러지지 않고 끝내 살아남은 사례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실재론자들에게 남겨진 가장 강력한 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적수 중 하나로 프레넬의 에테르 이론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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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나위 없이 프레넬의 에테르 이론은 광학에서 훌륭한 예측적 성공을 거두었다.(Fresnel’s white spot) 그리고 프레넬이 빛을 운반하는 매개 물질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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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숙한 과학의 조건을 만족하는 프레넬의 에테르 매개 이론은 후발 이론인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에 의해 완전히 타도되었다. ‘기적적인 성공을 거둔 이론’이 거짓인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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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프레넬의 이론의 모든 주장은 그 경험적 사실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된 것인가? 그 기적 같은 예측력은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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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이론 사이에 경험적인 사실 말고도 어떤 연속성이 존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한 세기 전에 이미 푸엥카레에 의해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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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의하면 프레넬은 빛의 본성을 밝혀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구조를 훌륭하게 포착했다. 무엇이 진동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구조를 밝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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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넬 이론의 예측력은 그 구조적 실재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맥스웰의 이론에 온전히 계승되었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의 구조를 나타내는 형태인 수학적 방정식에 집중해보자.
프레넬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R/I = tan(i-r)/tan(i+r)
  R/I = tan(i-r)/tan(i+r)
  X/I = (2sinr*cosi)/(sin(i+r)cos(i-r))
  X/I = 2sinr*cosi/si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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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I, R, X는 각각 빛의 진행방향으로 편광된 진행, 반사, 굴절된 빛의 강도의 제곱근 값을 의미하며, I, R, X은 각각 그 방향에 수직인 방향으로 편광된 빛의 상치값이다. i, r은 입사각과 굴절각이다. 프레넬은 위의 식을 빛의 진행방향에 수직 방향으로 진동하는 에테르의 기계적 성질에서 유추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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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그러한 에테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동하는 것은 서로 수직 방향을 진행하는 전자파와 자기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진행, 반사, 굴절값의 상대적 강도는 정확히 프레넬의 방정식을 따라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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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넬은 빛의 실재성 중 그 구조만큼은 정확히 포착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적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자연의 구조적 실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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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맥스웰의 전자기장을 최종적인 참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이는 프레넬의 에테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미래 언제라도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이 밝혀낸 자연의 구조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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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에서 벌어졌던 이론의 교체는 ‘구조적 수준에서의 누적적인 성장’과 ‘존재론적 아이디어의 급진적인 교체’로 이루어진다. 실재론자들이 주장했던 과학 이론의 누적적인 성질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이 아닌 자연의 구조에 대한 지식에 한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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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럴은 위와 같은 이유로 보이드의 완전한 실재론full-blown realism의 대안으로서 그 주장을 자연의 구조에만 제한한 구조적 실재론structure realism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학사의 사례들을 따라 현재 받아들이는 과학 이론들에 대해 귀납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시에 경험 사실 외의 이론적 요소가 누적적으로 전승될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누적되는 것은 자연의 구성적 실재에 대한 지식이며 기적과도 같은 설명력은 여기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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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구조적 실재론이 프레넬의 이론처럼 종전 이론의 구조가 완전히 후속 이론에 적용되는 경우만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프레넬의 경우가 특수한 경우이며 일반적으로는 선행 이론의 방정식이 후속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서 포섭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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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구조적 실재론이 가진 또 다른 장점에 대해 살펴보자. 파인은 양자역학의 예를 들며 과학적 실재론이 완전한 패배를 맞이했음을 주장했다. 실재론자들의 해석은 이해할 수 있는 것intelligibility을 대상으로 해야 하며 이해가능유무는 선행 이론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기반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주장들은 상대성 이론을 포함하는 동역학적 물리 체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실재론적 해석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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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조적 실재론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비판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구조적 실재론자는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기초 법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뉴턴이 상정한 원거리에 작용하는 힘(중력)은 자연에 존재하는 더 줄일 수 없는 근원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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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구조적 실재론자는 미시세계에서는 정말로 자연이 양자역학의 주장을 따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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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양자의 상태를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오해이며 그것은 반드시 고전적 과학 이론이 토대로 두고 있는 형이상학을 만족하는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더 큰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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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양자이론이 실재론의 막을 내렸다는 것은 너무 과도한 주장이다.
  
  
* in Dialectica 43. Repinted in D. Papineau (ed.)(1996), The Philosophy of Science, pp.139-165.
  
  
(2017.02.07.)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