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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3

<박세일 법경제학 교과서 재개정판 출간기념> 연합학술대회를 보고



<박세일 법경제학 교과서 재개정판 출간기념> 연합학술대회에 가서 구경했다. 교과서 재개정판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고, 학술대회 부제인 “한국법경제학의 회고와 전망”을 보고 간 것이었다. 법경제학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게 거의 없어서 그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기도 했고, 한국의 법경제학 성립사가 궁금하기도 했다.

학술대회장에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박세일? 내가 뉴스에서 본 그 박세일은 아니겠지. 동명이인이겠지.’ 법경제학 교과서의 저자는 내가 뉴스에서 본 그 박세일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박세일 교수는 박근혜한테 미움받은 떨거지들 모아서 <국민생각>이라는 깜찍한 이름을 가진 정당을 만들었다가 정치적으로 홀랑 망한, 그냥 폴리페서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법경제학에서 박세일 교수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학술대회에서 사회자는 박세일 교수를 가리켜 “한국법경제학의 founding father”라고 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김일중 교수는, 한국에서 ‘법경제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지만 실질적으로 법경제학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라고 진단한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법경제학에 관한 종합소개서들의 출현”, “국내법제에 대한 법경제학적 분석 논문들의 출간”, “여러 대학에서 법경제학 과목들의 개설”, 이렇게 세 가지 현상이 1990년대 중반에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박세일 교수다. 박세일 교수는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법경제학> 과목을 한국에서 최초로 개설했고 몇 년 동안 강의하던 자료를 모아서 1994년 『법경제학』이라는 교과서를 출간했다.

박세일 교수의 기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학자들의 법경제학 연구는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는 법학과 경제학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접목하면 한국의 법경제학의 수준이 도약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세일 교수는 <법경제학연구회>를 만들어 매달 월례발표회를 열었다. 연구회는 2002년에는 <한국법경제학회>가 되었고 이때 박세일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창립 11년 뒤인 2013년에는 한국법경제학회 단독으로 국제학술대회도 열게 된다.

학술대회장에서 내가 받았던 놀라움은, 눈썹 이상하게 생기고 미신이나 믿는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가 사실은 『경제학원론』의 저자이자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였음을 알았을 때 느낀 놀라움과 비슷했다. 나는 박세일 교수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 줄 몰랐다. 박세일 교수를 회고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 같이 박세일 교수의 인품이 훌륭했음을 언급했다는 점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의 공과를 판단할 때는 한 측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이든 전문가가 해야 하는 것처럼 정치도 전문 정치인이 해야지, 교수나 학자 출신이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가 청와대 수석 비서관을 한다든지 어떤 기관의 자문을 맡는다든지 하는 현실 참여는 필요한 것이고 권장될 만한 것이겠지만, 학자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 법경제학의 founding father도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서 곤란한 일을 겪는 판이다. 역사나 문학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정당의 선대위원장을 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19.12.13.)


2020/02/12

“인공지ㄹ”이라는 신조어

   
지난 주말에 학술대회에 갔다. 쉬는 시간에 다른 학교 대학원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대학원생이 최근에 “인공지ㄹ”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마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다른 신조어 같으면 단어의 뜻과 유래를 물었을 텐데, 그 단어는 듣자마자 느낌이 와서 무릎을 치고 말았다. 아, 그걸 내가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 내가 그런 생각을 못 하다니.
  
“인공지ㄹ”이라는 말은 인공지능이 일으키는 일종의 오류나 오작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의 언어를 구현하게 하려고 기계 학습을 시켰더니 인간들이 쓰는 나쁜 말까지 배워서 인종 차별이나 소수자 혐오 표현까지 구사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문제들을 가리킨다. 물론, “인공지ㄹ”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인공지능이 일으키는 오류나 오작동이 떠오르기 전에 몇몇 유명인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지나갈지도 모른다. 저건 과학자야, 엔지니어야, 방송인이야, 사기꾼이야 싶은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러라고 만든 말이다.
  
인공지능하고 거의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인공지능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는 하는데 성과에 비해 너무 큰 뻥을 치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그냥 사기꾼이 “인공지ㄹ”이라는 말을 두고 항의하거나 시비 걸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하는 짓은 “인간지ㄹ” 또는 “자연지ㄹ”에 속하는 것이라서 “인공지ㄹ”과는 애초부터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2019.12.12.)
    

2020/02/11

인문대 글쓰기의 두 편향

   
학부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논증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학생들이 가져온 논증 에세이 기획서를 검토하면서 한 말이다.
  
논증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는 아마도 역설일 것이다. 역설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왜 그런가. 타당한 논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제가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 것 같고 결론도 전제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 같은데 결론이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결론을 내다버리고 싶지만 그 결론은 전제들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전제들도 하나하나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무시할 수도 없다.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기 싫은데도 타당한 논증처럼 보여서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인문대 학부생들의 글쓰기에 나타난 두 편향도 결국은 논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십몇 년 전 내가 학부 다닐 때는 학교에 정상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수업이 거의 없었다. 학부생들의 필수교양 수업인 글쓰기 수업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전공 수업도 나을 것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글 쓴다고 뻐기는 사람들은, 특히나 문과대 학생들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을 매끄럽게만 쓰거나, 꼭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쓴 것처럼 이해할 수 없게 쓴 글을 썼다. 왜 그랬을까. 왜 이러한 양극단이 나타났을까. 
  
전자의 경우는, 논증적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상식에 어긋나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도록 적당히 뭉개느라 그런 글을 썼을 것이다. 제논의 역설을 예로 들자면, 전제들을 매끄럽게 정리해놓고는 “그렇지만 화살이 날아간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쓰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는 글의 생명력이 탄탄한 논증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모르고 미친 놈처럼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어떻게든 독특하게 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다른 스타일을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들이 글 쓰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글의 주제와 무관한 것을 계속 덧붙이고 남들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제논의 역설로 예를 들자면, 인류가 언제부터 활을 사용했는지, 언제부터 활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시간을 화살과 같다고 비유하는지, 우리에게 화살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지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길고 지루하게 쓴 다음, “제논의 화실이 활시위를 떠났지만 날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우리 곁에 남아있다”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문과대 글쓰기의 두 편향은 결국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9.12.11.)
    

2020/02/07

저자 약력을 본 어머니의 반응

   
어머니께 어떤 책의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를 보여드렸다. 특정한 반응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다른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이 책 저자 소개 좀 보세요. 이 사람이 쓴 책이 100만 권 넘게 팔렸대요”라고만 말했다.
  
        말을 아껴 글을 쓴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엿듣고 엿본 것을 기록하기 좋아한다.
        책과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음미한다.
        타인의 세계를 존중할수록
        내 세계도 깊어진다고 믿기에.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담담히 꽃을 올려놓는다.
  
저자 소개를 다 읽고 나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친놈, 옘병하고 있네. 이게 무슨 말이야? 글을 똑바로 써야지 알쏭달쏭하게 쓰고 자빠졌어.” 내가 이 이야기를 동료 대학원생들에게 전했더니 다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 화장대에 꽃 같은 것을 올려놓지 않는다. 내가 쓴 책이 100만 권쯤 팔리면 어머니 화장대에 어느 건물 등기부등본을 올려놓을 생각이다. 가끔씩 어머니 화장대에 담담히 등기부등본을 올려놓는 아들이 되고 싶다.
  
  
(2019.12.07.)
     

2020/02/05

돌 화폐 섬 이야기에 관한 철학 전공자들의 반응

   
동료 대학원생들에게 돌을 화폐로 사용하는 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트코인과 관련한 철학적 함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내가 아는 한 그에 대한 유의미한 철학적 논의는 없다는 취지로 돌 화폐 섬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Money Mischief』(1992)의 1장에서 돌 화폐 섬 이야기를 소개한다. 돌 화폐 섬 이야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인류학자 윌리엄 헨리 퍼니스 3세가 1910년에 출간한 『돌화폐 섬』(The Island of Stone Money)이며 프리드먼은 이를 소개한 것이다.
  
마이크로네시아에 있는 캐롤라인 군도의 서쪽 끝에는 얩(Yap)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서는 금속 물질이 생산되지 않아서 돌을 돈으로 사용한다. 돌돈은 섬에서 400마일 떨어진 섬에서 나오는 석회석으로 만든다. 돌돈의 특징 중 하나는 돈의 주인이 돈에 소유주를 나타내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인정만 받으면 그 돈에 대한 소유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돌돈을 싣고 오던 배가 뒤집혀서 돈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돌의 크기, 가치, 소유주를 인정하면 그 돈의 구매력은 유지된다. 얩 섬을 스페인에게서 사들인 독일 정부는 돌돈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도로를 보수하기도 했다. 섬 주민들이 도로 보수 명령을 듣지 않자 독일 정부는 집마다 관리를 보내서 돌돈에 정부 소유를 의미하는 검은 십자 표시를 했다. 한순간에 재산을 잃은 주민들은 섬을 관통하는 도로를 보수했고, 공사가 끝난 후 정부 관리들이 돌돈의 십자 표시를 지우자 주민들은 예전처럼 살 수 있었다.
  
프리드먼이 얩 섬의 이야기 다음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1930년대 미국의 이야기다. 프랑스은행은 금본위제에서 미국이 기존 가격(금 1온스당 20.67달러)을 유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맡긴 달러 자산을 대부분 금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바꾼 금을 굳이 프랑스로 가져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은행은 그 금을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보관하도록 했다. 연방준비은행 직원은 금 저장실에서 프랑스은행이 달러 자산을 팔고 받게 된 금을 별도의 서랍에 넣고 그 서랍에 프랑스 자산이라는 표시를 붙였다. 그러자, 미국의 금 보유고가 감소했다고 난리가 났고 이는 미국 금융공황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리드먼은 두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어떤 것의 외양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것은 금융 측면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얩 섬에서 바다 밑에 가라앉은 돌돈의 소유자들이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이나 금본위제 하에서 금을 지하 보관실에 넣어놓고 금태환 화폐를 가지고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독일 정부에서 돌돈에 검은 십자 표시를 해서 섬에 난리가 난 것이나 연방준비은행 지하실 한쪽에 있던 금이 다른 쪽으로 간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프리드먼은 책의 서문에 “화폐 현상을 다룰 때 돈의 겉모습이 얼마나 오류를 유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얩 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에는 기존의 경제 현상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요소가 있는가? 암반을 뚫고 금속을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채굴한다는 것 빼고, 새로운 이론이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새로운 점이 비트코인과 관련하여 있는가? 그런 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텐데, 애초부터 그런 것이 없으니 개소리꾼들이 비트코인이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은행과 화폐 시스템에 대한 기술적 테러라는 둥, 공허한 수식어나 덧붙인 것은 아닌지.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동료 대학원생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 신기하다! 그거 어떤 철학자의 논문에 나와요? 누구의 사고 실험이에요?” 나는 분명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태평양에 있는 섬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모두 사고 실험인 줄 알았던 것이다. 문학 애호가들은 조금만 그럴듯하면 지어낸 이야기도 마치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인 것처럼 여기는데, 철학 전공자들은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어도 신기한 구석이 있으면 누구의 사고 실험이냐고 묻는다. 전 지도교수님의 말씀처럼, 철학 하는 사람들한테는 약간씩 독특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2019.12.05.)
    

2020/02/03

글쓰기 지도에서 기획서 검토의 이점

   
학부 글쓰기 수업 조교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어떤 글의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은 그 글의 초고나 완성본을 첨삭하는 일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글쓰기 지도 방식이라는 점이다. 기획서 검토에는 초고나 완성본 첨삭에는 없는 몇 가지 이점이 있다. 학생들이 글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기 좋다. 글 쓰는 실력이 는다는 것은 글의 구조를 뜯어고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기획서 단계에서 글을 검토하면, 학생은 글의 구조에 대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결과물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글의 뼈대만 있는 상태이므로 부분적으로 고치기도 쉽고 글의 배열을 바꾸기도 쉽고 전면적으로 개편하기도 쉽고 아예 새로 시작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조교도 일하기 좋아서 첨삭할 때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잡아줄 수 있다.
  
거의 다 써놓은 글을 첨삭하면 이러한 이점이 다 사라진다. 조교는 조교대로 힘만 들고 학생은 학생대로 배울 것이 별로 없다. 이미 다 써놓은 글을 고쳐서 좋은 글이 되려면 이미 초고 상태가 웬만큼 좋아야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만 글이 늘고 일정 수준 미만의 학생은 글이 전혀 안 느는, 일종의 부익부 빈익빈이 글쓰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초고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서 좋은 글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초고나 완성본을 뜯어고치다 사실상 글을 새로 써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학생은 글쓰기를 배우기 어렵다. 학생은 자기 글이 철저하게 망했다는 것과 그 폐허 속에서 처음 보는 글이 생겨났다는 신기한 경험을 할 뿐이다. 이렇게 할 거면 학생이 쓴 글을 첨삭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남이 잘 써놓은 글을 읽고 뜯어본 다음 글의 구조를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교가 학생의 글을 그렇게 다 뜯어고치는 경우도 드물다. 할 일은 많고 받는 돈은 적고 효과도 없는 일을 쓸데없이 열심히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글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하거나 새로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조교는 학생의 글을 힘들여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낮은 점수를 준다.
  
글을 못 쓰고 있는 학생에게 “일단 뭐라고 써가지고 오라”는 말을 한다면 “초고 분량의 글을 써오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언가를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다음 계획서로 간추려서 오라”는 말을 꼭 덧붙여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학생이 오해해서 초고 분량으로 무언가를 잔뜩 써가지고 오면 학생은 배운 것 없이 힘들고 조교는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해서 괴롭기만 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2019.12.03.)
    

2020/02/02

밥그릇을 빼앗긴 화천이와 털복숭이

   
고양이마다 의사표현 하는 방식이 다르다. 화천이는 배가 고프면 “야-옹” 하는 소리를 낸다. 화천이의 새끼인 털복숭이는 현관문을 두드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을 두드린다기보다는 긁으려다 두드리게 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현관문 밖에서 나는 소리만 들으면 두 고양이 중 누가 배가 고픈지를 알 수 있다.
  
“야-옹” 하는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서 고양이 밥그릇에 고양이밥을 담았다. 잠시 후 또 다시 “야-옹” 하는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에 밥을 다 먹었나, 밥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놀자고 나를 부른 것이었나, 싶어서 현관문을 열었다. 화천이가 낳은 새끼들이 밥그릇에 달라붙어서 사료를 먹고 있었다. 밥을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니까 다 큰 고양이들이 나를 부른 것이었다.
  
평소 털복숭이는 화천이 밥을 빼앗아 먹기를 즐겨했다. 자기 밥을 빨리 먹고 화천이 밥그릇에 머리를 들이밀기도 했고, 자기 밥도 다 먹기도 전에 화천이 밥그릇에 앞발을 넣기도 했다. 그랬던 털복숭이도 화천이 새끼들을 자기 밥그릇에 달라붙자 새끼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나를 부른 것이다.
  
사료를 먹던 화천이 새끼들 중 몇 마리가 배가 부른지 밥그릇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자기 밥그릇을 되찾은 털복숭이는 다시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어미인 화천이는 새끼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밥그릇 근처에서 눈을 질끈 감고 기다렸다.
  
  
  
  
  
  
  
  
  
(2019.12.02.)
     

2020/01/27

아저씨・아주머니의 천만 원 놀이

   
신림역 1번 출구 근처 노점에서 아주머니가 천만 원짜리 계란빵을 판다. 계란빵 두 개를 사고 5천 원을 내면 아주머니가 3천만 원을 거슬러 준다. 그 아주머니 말고도, 화폐 단위를 만 배 뻥튀기하는 아저씨・아주머니는 많다. 예전에 낙원상가에서 국밥을 먹고 만 원을 냈더니 6천만 원을 거스름돈으로 받기도 했다. 천 원을 거슬러 주면서 “천만 원이요!” 하는 것은 그 또래들이 하는 일종의 놀이인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원화에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경제학과 선생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외국 경제학자들이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경제학자들에게 “너네 나라는 언제 디노미네이션 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화폐를 건드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라서 어느 정부에서도 함부로 디노미네이션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잊을 때마다 디노미네이션 이야기는 나오고 있으니 언젠가 하기는 할 것 같기는 하다.
  
1000대 1로 화폐 단위를 줄이면 아저씨・아주머니들의 오락거리가 하나 줄어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1천 원이 1원이 되면, 아저씨・아주머니들은 1억 원짜리 계란빵을 팔게 될 것이고, 계란빵 두 개를 사고 5원을 낸 사람은 거스름돈으로 3억 원을 받게 될 것이다. 원화의 디노미네이션은 거스름돈 놀이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고, 아저씨・아주머니들의 즐거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2019.11.27.)
    

2020/01/26

철학자 마틴 톰슨-존스(Martin Thomson-Jones)의 성은 왜 길어졌는가

   

과학철학자 중에 ‘마틴 톰슨-존스’(Martin Thomson-Jones)이라는 사람이 있다. 동료 대학원생이 <부에나 비스타 저널 클럽>에서 그 사람의 논문을 발제하여 알게 되었다. 나는 서양 사람들 성 중에서 가운데 대쉬(-)가 들어가는 성을 볼 때마다 대쉬가 왜 들어가는지 궁금했는데, 마틴 톰슨-존스는 나 같은 사람이 궁금할까봐 자기 성이 길어지게 된 이유를 개인 홈페이지에 밝혔다. 마틴 톰슨-존스의 성은 원래 ‘존스’(Jones)였는데, 2004년에 케이트 톰슨(Kate Thomson)이라는 여자와 결혼하면서 자기 성을 톰슨-존스로 바꾸었다. 성을 바꾼 후 전화상으로 이름 철자를 불러줄 때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한다.

마틴 존스가 마틴 톰슨-존스가 되던 2004년, 나는 학부 신입생이었다. 내가 입학한 학교의 담벼락에는 한문도 잘 모르는 노인네들이 만든, 호주제 폐지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노인네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학부생 중에도 맛이 안 좋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어떤 선배가 총학생회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면서 가부장제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성을 안 쓰고 이름만 썼는데, 그 때는 난리도 아니었다. 학교 커뮤니티에 후보의 아버지는 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식의 막말이 계속 올라왔다. 미개한 시절이었다.

선배는 학교에서 성을 쓰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긴,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성을 쓰고 안 쓰고를 결정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하여간 선배의 아버지는 선배와 사이가 좋았고 선배가 학교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도 대강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선거운동을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학교 커뮤니티 글을 찾아보았다가 아버지 운운하던 게시물을 읽고 마음이 상했다고도 한다.

그 당시 나는 그 선배 옆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기술적으로만 가능하다면 정부 차원에서 전 국민 뿌리 찾기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행정력을 총동원해서 누가 양반 후손이고 누가 쌍놈 후손인지를 정확히 찾아주고, 알기 싫다고 해도 강제로 자기 조상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좋을 뿐 아니라 사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양반 후손들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서 좋고, 쌍놈 후손들은 망상에서 벗어나게 되니 좋다. 가부장적 혈통에 집착하는 사람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니 사회도 건강해질 것이다.

그 당시에는 총학생회장 후보가 성 안 쓰고 이름만 쓰는 것이 공문서 위조에 해당되는지 법리적 검토를 해야 한다는 법대생들도 있었다. 기껏 법대를 다녀놓고 그러는 것도 참 딱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 미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든 적어도 법률가는 아니어야 사회에 해를 덜 끼칠 텐데 지금은 뭐 하고 사나 모르겠다.

* 링크: 마틴 톰슨-존스의 홈페이지

( www.martinthomsonjones.com )

(2019.11.26.)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