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박사의 “내전과 공존”이라는 글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필자가 극우와 공존해야 하고 극우에 단호히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극우 택시기사가 하는 말을 저항 없이 다 들어놓고는, 정작 지인인 시민운동가가 “극우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않고 혼자 제멋대로 상상해 버린다는 것이다.
시민운동가인 지인과 현재 한국의 극우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그의 말에 놀랐다. 그는 “극우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호한 대처의 구체적 방도’가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해 “단호한 대처”라는 발상에 당황했다. 이것은 ‘정말 싸우자’는 이야기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양쪽은 맨손으로 백병전이라도 할 기세다. 아니, 이미 법원 습격이라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폭력의 연쇄는 앞으로도 예상되는 일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생각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단호한 대처의 구체적 방도’가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라는 말은, 단호한 대처가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구체적 방도가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체적 방도가 무엇이냐고 묻기만 했어도 시민운동가가 말한 ‘단호한 대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가닥이라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예 묻지도 않고 혼자 상상해 버리니 상대방이 말한 ‘단호한 대처’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가 있나?
정희진 박사가 생각하는 사회운동은 “공존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라는데, 지인하고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무슨 지혜를 모은다는 것일까? 정희진 박사의 ‘공존’은 ‘외면’이나 ‘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 링크: [경향신문] 내전과 공존 / 정희진의 낯선 사이
( www.khan.co.kr/article/202503182023015 )
(20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