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6

말도 안 되는 데 꽂히는 여성들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보고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아침을 늦게 많이 먹어서 점심 먹기 전에 밥을 몇 숟가락 덜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모님은 말씀하셨다. “가만 보면 ◯◯ 형제는 과식하지 않더라구요. 목사님도 그래야 하는데... 남자가 배 나오면 안 돼요. 배 나오면 여자들이 싫어해요.” 사실, 나도 배가 꽤 나왔다. 그래서 나를 안 좋아하는 건가? 목사님은 묵묵히 자기 밥그릇에 몇 숟가락을 더 얹었다.

사모님은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셨다. “아는 분이 소개를 해줘서 목사님을 만났어요. 신실한 신학생이 있다고 해서 만났는데 배가 (손동작을 하며) 이렇-게 나온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밥만 먹고 빨리 헤어져야겠다, 이 남자하고 다시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모님은 태권도 선수였다. 같이 운동하는 남자 선수들이 모두 몸이 좋았다고 한다. 여름에는 남자 선수들이 모두 웃통을 벗고 운동한다고도 덧붙였다. 목사님은 묵묵히 식사를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사모님은 이야기를 마저 하셨다. “밥만 먹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밥을 먹었으니까 차를 마시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 차만 마시자’ 생각하고 차를 마셨어요. 어쩌다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목사님이 ‘기도는 전쟁입니다. 저는 평생 기도하며 살 겁니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아, 나는 이 남자랑 결혼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모님이 이야기하는 동안, 목사님은 묵묵히 식사를 하셨다.

집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남편 처음 만난 날, 남편이 꽃을 들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나를 처음 보니까 나한테 주려고 그랬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자기 엄마 주려고 샀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이 남자랑 결혼하면 꽃을 많이 받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남편분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꽃을 안 사왔어, 하하하하.”

여자들은 말도 안 되는 데 꽂히기도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한테 꽂히는 여자는 왜 없나?

(2017.03.26.)


2017/05/25

내 석사 논문은 왜 망했나



석사 논문을 쓰던 중 나는 내 논문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서 단계에서도 미진한 구석이 많았지만, 그래도 일단 쓰면서 뭔가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선되지 않았다. ‘아, 이건 개소리인데’ 하면서 계속 썼다.

내 논문은 경제학에서의 과학적 실재론을 다룬다. 줄리안 라이스는 경제학에서의 설명과 관련하여 ‘설명의 역설’을 제기한다. 설명의 역설은, (i) 경제 모형은 거짓이고 (ii) 참인 모형만이 설명할 수 있는데 (iii) 그런데도 경제 모형은 설명한다는 것이다. 세 논제 각각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세 논제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설명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각 논제를 반박하는 것이며, 이는 경제학의 철학에서 잘 나가는 세 학자의 주장에 대응한다. 나는 그 중에서 우스칼리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을 비판한다. 국소적 실재론이 틀리므로 국소적 실재론으로는 설명의 역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논문의 결론이다.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일단 그 이론이 무슨 이론인지 설명해야 한다. 나는 매키가 왜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러기 위해 매키가 어떤 장치를 도입하는지, 모형의 어떤 요소가 실재론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국소적 실재론에 이러저러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솔직히 국소적 실재론에 어떠한 결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국소적 실재론에 결함이 있다는 내 비판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매키의 국소적 실재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다 쓰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인지만 가지고도 충분히 논문 주제가 되겠는데. 굳이 국소적 실재론을 다 설명하며 틀린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 이미 때가 늦었고 손 쓸 수 없었다. 철학과에서 석사 논문 쓰는 데는 보통 6학기 정도 걸린다. 이미 나는 9학기였고 그 다음 학기부터는 지도교수님이 1년 간 연구년인 상황이었다. 교수들은 연구년에 보통 외국 대학에 간다. 그 학기에 석사 논문을 쓰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경제학이 과학적 실재론의 대상인지를 가지고 논문을 썼다면 완성도도 높아지고 졸업도 한 학기 이상 앞당겨졌을 것인데, 나는 이 사실을 논문 쓰는 중간에 알았다.

어떻게 논문을 쓰기는 썼고 통과되기는 했다. 아무래도 선생님들이 봐줘서 통과한 것 같다. 기존에 다루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귀엽게 봐준 것 같다. 지도교수님의 다른 제자들의 선례로 볼 때, 내가 기존 주제를 가지고 이 정도 수준으로 논문을 썼으면 논문 심사장에도 못 가거나 통과해도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방생되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논문이 공개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결함을 고치기로 했다. 선생님들이 봐주셨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논문의 모든 문장을 다 고쳤다. 그런데도 논문이 나아지지 않았다. 논문은 문장으로 구성되고 나는 모든 문장을 다 고쳤는데 이상하게도 논문의 동일성이 유지되었다. 테세우스의 배 같은 논문이었다.

논문을 수정하는 내내 어떻게 해야 덜 틀린 것으로 보일까 고민했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으나 다 실패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설계상 결함이 있으면 시공사가 아무리 공사를 잘 해봐야 망한다는 것이다. 공사 도중에 설계 변경해서 잘된 예는 드물다. 이건 논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설계를 잘 해야 한다. 설계가 망했는데 공사를 강행하면 예정된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설계가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학회를 열고 대학원생 모임을 한다. 그런 자리에서 발표를 하면 토론 시간에 온갖 비판이 쏟아진다. 왜 그런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발전시키지 않고 비판해서 죽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의 성격을 잘못 파악해서 그러는 것이다. 학회나 대학원생 모임은 은행으로 치면 스트레스 테스트와 비슷하다.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받고 파산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으면 두세 명씩 사적으로 자주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위로나 격려를 받고 싶으면 애인이나 가족한테 받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은 되든 안 되든 남들한테 자꾸 보여주고 점검받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 진척이 있을 때마다 그래야 하고, 진척이 없어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설계를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설계상의 결함을 줄일 수 있다. 나는 내가 뭘 하는지 남들한테 안 보여주고 혼자 꼼지락꼼지락 하다가 낭패를 보았다.

(2017.03.25.)


2017/05/24

현관문 앞의 눈노란놈

     

작년 9월, 눈노란놈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고양이였다. 그 때는 새끼라서 눈동자가 노란색인지도 몰랐다. 새끼일 때 눈노란놈은 현관문 문턱을 넘지 못하고 현관문 앞을 알짱거리기만 했다.
  
반년이 지나 눈노란놈은 다 큰 어른 고양이가 되었다. 눈노란놈은 지금도 현관문 문턱을 넘지 않는다. 다만 문턱을 밟고 큰 소리를 낸다. 아마도 밥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 같다.
 
 
 
 
 
 
(2017.03.24.)
     

2017/05/23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기업에서 개최한 <인문학 캠프>의 주제는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왜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어차피 회사에 입사하면 노예처럼 부릴 거면서.

하여간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이상하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나와 나의 삶이 분리될 수 있나?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내가 노예 상태인 것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이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심오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개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잡지에 <인문학 캠프>에 참가한 대학생과 인문학 멘토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 기사로 실렸다. 그들은 어떤 대화를 했을까?


- 청년: “이번 인문학 캠프 주제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 방법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꼭 내 삶의 주인이어야 할까…….”


- 인문학 멘토: “이야기의 대전제를 뒤바꿀 수도 있는 좋은 질문이군요. 정해진 답은 없어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예요. [...] 이제껏 살아온 과정은 어땠나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애초부터 정해진 답이 없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것은,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굳이 토론해서 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 어쨌든 대화는 계속 된다.


- 청년: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치열하게,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 인문학 멘토: “예를 들면, 어떻게 노력했죠?”


- 청년: “전공이나 어학 공부 모두 열심히 했어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죠. [...].”


[...]


- 인문학 멘토: “그렇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는 방법을 택해본 적은 있었나요?


- 청년: “네. 있었어요. 돌아보면 초・중・고등학교 시절이 모두 그랬죠.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를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살았거든요. 그래서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모든 걸 주체적으로, 제 생각대로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는지 모르겠어요. [...]”


대학생은 대학 입학 이전에는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등 삶의 주인이 아니었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대학 입학 이후 자기 계발을 열심히 했는데, 이 둘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냥 사는 게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삶의 주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인문학 멘토: “우리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어요. 사는 게 바빠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을 돌아보자는 것이 이번 캠프의 의의였죠. 그러니 본인이 한 질문에 대해 제가 답을 내릴 수가 없어요. 다만 이런 조언을 건네고 싶네요. 본래 삶이란, 인문학이란 시험에 나오는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듯 명료한 하나의 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거. 자, 이제 자신만의 답을 정리해 보세요.”


멘토의 답변은, 아무 말이나 해도 답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 없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말했던 것은, 대학생들이 어떤 답을 찾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아무 말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 청년: “멘토님, 2박 3일 동안 제가 내린 답은 이거예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건 사실 없다는 것. 하지만 어차피 삶에서 오는 모든 질문에 정해진 답이 없는 거라면, 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오롯이 저만 알 수 있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나아갈 명확한 방향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번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때그때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요? [...]”


- 인문학 멘토: “바로 그거예요!


답도 없고 방향도 모르겠다는데 뭐가 “바로 그거예요”인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다 끝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사에 나온 것이 실제 토론 내용을 적은 것이 아니라 2박 3일 간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임을 기억하자. 기사로 나온 것은 아마도 캠프 주최측이 사전에 만든 시나리오일 것이다. <인문학캠프> 홈페이지에서 멘토들의 일정을 보면, 인문학 멘토는 합숙을 두 번 해야 한다고 나온다. 아마도 첫 번째 합숙에서 멘토들은 사전 교육을 받으며 캠프 예행연습을 했을 것인데 그 때 캠프측에서는 멘토들에게 토론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라고 하면서 예시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기사에 나온 것은 사전 교육 당시 예시로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학생이나 멘토나 멍청하게 2박 3일 간 실없는 소리나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인가? 나는 그보다는 캠프의 의도에 맞게 대학생과 멘토가 일종의 연기를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캠프에 참석한 대학생들 중에 정말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궁금해서 그 캠프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최소한의 상식과 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업에서 하는 <인문학 캠프>에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인문학 캠프>에 왜 갔을까? 많은 대학생들은 방학 때도 놀지 않았음을 기업에 증명해 보이기 위해 쓸데없는 짓을 하며 알리바이를 만든다. <인문학 캠프>라는 것도 결국은 그런 알리바이를 만드는 작업일 것이다. <인문학캠프>에 참가한 사람 중에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궁금한 사람이 많았을까, 캠프를 주최한 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을까?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 청년: “전공이나 어학 공부 모두 열심히 했어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자기 개발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죠. 휴학을 한다거나 쉴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정말 쉬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 인문학 멘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 수 없었던 이유는 뭔가요?


- 청년: “취업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졸업하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요즘 같아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내 노력이 부족해서 잘 안 되면 어떡하나. 늘 불안했어요. 여전히 쉬는 게 두려워요.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그 속에서 나만 덩그러니 멈춰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몇 년 뒤 회사의 노예가 되기 위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찾는 연기를 한 대학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연기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 중 일부는 일종의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멘토들은 대학생들이 느꼈을 자괴감보다 더 큰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문학 캠프> 홈페이지에 다르면, 인문학 멘토가 되려면 인문학이나 인지과학 분야 박사 수료 또는 박사 학위 취득 1년 이내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학부생들 앞에서 삶의 주인이 되는 소리나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캠프에 참여한 인문학 멘토들은 사전 교육을 받으며 ‘아니, 저게 무슨 개소리야?’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멘토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먹고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멘토들은 토론 자리에서 참가자들한테 “그런데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 그렇게 물었는데 참가자들이 말귀를 못 알고 “어, 그러게. 그게 무슨 소리지?” 하면서 토론 내내 허둥거리고 캠프 측이 바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인문학 멘토는 직무유기를 한 것이 된다. 참가자들이 눈치가 빨라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인문학 캠프의 방향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잖아!” 하며 동요하면 인문학 멘토는 업무방해를 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대학생들이 연기하고 싶어도 연기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상황이 웬만해야 연기도 하는 것이지 억지 상황이 그렇게 너무 뻔히 보이면 연기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 계약서에는 피고용인이 직무유기나 업무방해를 하면 안 된다고 써있다. 멘토는 캠프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야 한다.

멘토는 캠프에서 5일 일하면 100만 원을 받는다. 나름대로 괜찮은 아르바이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박사 학위자라면 캠프에 참가하는 내내 가슴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학원에서 죽네 사네 하며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마땅히 돈 나올 구석이 없어서 인문학 캠프에 멘토로 참여하기로 한 상황을 상상해보자. 주위 사람들 중 나 같은 사람이 그 회사에서 왜 그런 걸 하는지 이야기해준다. 그 회사 부회장의 엄마는 부회장보고 이지성과 친구가 되라고 했다고 하고 부회장은 이지성한테 자녀 교육을 맡기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외 명문대를 다닌 사람이 이지성에게 인문학을 부탁한다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캠프 프로그램을 보는데, 이건 인문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다. ‘내가 이런 걸 하려고 학위를 받았나.’ 그래도 그 사람은 돈이 없고 피-고용인이니까 캠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박사는 캠프에 참석한 대학생들한테 말한다. “본래 삶이란, 인문학이란 시험에 나오는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듯 명료한 하나의 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니 자신만의 답을 정리해 보세요.” 지도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논문에서 하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야?”라고 묻던 지도교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게요, 저는 지금 애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캠프가 끝나고 스마트폰에 찍힌 입금 내역을 본다. ‘삶은 구차하고 목숨은 질긴 것이구나’ 하며 쓴웃음을 지어도 그리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처음에 기사를 읽고는 웃었는데, 그 캠프에 학부생들이 왜 참여했을지를 생각하니, 그리고 캠프에 참여한 인문학 멘토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안 좋아졌다.

* 링크: [대학내일] 제가 꼭 제 삶의 주인이어야 하나요? 청년이 묻자, 인문학이 답했다

( https://univ20.com/63686 )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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