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기업에서 개최한 <인문학 캠프>의 주제는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왜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어차피 회사에 입사하면 노예처럼 부릴 거면서.
하여간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이상하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나와 나의 삶이 분리될 수 있나?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내가 노예 상태인 것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이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심오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개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잡지에 <인문학 캠프>에 참가한 대학생과 인문학 멘토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 기사로 실렸다. 그들은 어떤 대화를 했을까?
- 청년: “이번 인문학 캠프 주제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 방법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꼭 내 삶의 주인이어야 할까…….”
- 인문학 멘토: “이야기의 대전제를 뒤바꿀 수도 있는 좋은 질문이군요. 정해진 답은 없어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예요. [...] 이제껏 살아온 과정은 어땠나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애초부터 정해진 답이 없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것은,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굳이 토론해서 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 어쨌든 대화는 계속 된다.
- 청년: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치열하게,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 인문학 멘토: “예를 들면, 어떻게 노력했죠?”
- 청년: “전공이나 어학 공부 모두 열심히 했어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죠. [...].”
[...]
- 인문학 멘토: “그렇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는 방법을 택해본 적은 있었나요?
- 청년: “네. 있었어요. 돌아보면 초・중・고등학교 시절이 모두 그랬죠.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를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살았거든요. 그래서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모든 걸 주체적으로, 제 생각대로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는지 모르겠어요. [...]”
대학생은 대학 입학 이전에는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등 삶의 주인이 아니었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대학 입학 이후 자기 계발을 열심히 했는데, 이 둘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냥 사는 게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삶의 주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인문학 멘토: “우리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어요. 사는 게 바빠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을 돌아보자는 것이 이번 캠프의 의의였죠. 그러니 본인이 한 질문에 대해 제가 답을 내릴 수가 없어요. 다만 이런 조언을 건네고 싶네요. 본래 삶이란, 인문학이란 시험에 나오는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듯 명료한 하나의 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거. 자, 이제 자신만의 답을 정리해 보세요.”
멘토의 답변은, 아무 말이나 해도 답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이 없고 본인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말했던 것은, 대학생들이 어떤 답을 찾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아무 말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 청년: “멘토님, 2박 3일 동안 제가 내린 답은 이거예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건 사실 없다는 것. 하지만 어차피 삶에서 오는 모든 질문에 정해진 답이 없는 거라면, 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오롯이 저만 알 수 있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나아갈 명확한 방향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번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때그때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요? [...]”
- 인문학 멘토: “바로 그거예요!
답도 없고 방향도 모르겠다는데 뭐가 “바로 그거예요”인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다 끝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사에 나온 것이 실제 토론 내용을 적은 것이 아니라 2박 3일 간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임을 기억하자. 기사로 나온 것은 아마도 캠프 주최측이 사전에 만든 시나리오일 것이다. <인문학캠프> 홈페이지에서 멘토들의 일정을 보면, 인문학 멘토는 합숙을 두 번 해야 한다고 나온다. 아마도 첫 번째 합숙에서 멘토들은 사전 교육을 받으며 캠프 예행연습을 했을 것인데 그 때 캠프측에서는 멘토들에게 토론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라고 하면서 예시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기사에 나온 것은 사전 교육 당시 예시로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학생이나 멘토나 멍청하게 2박 3일 간 실없는 소리나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인가? 나는 그보다는 캠프의 의도에 맞게 대학생과 멘토가 일종의 연기를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캠프에 참석한 대학생들 중에 정말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궁금해서 그 캠프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최소한의 상식과 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업에서 하는 <인문학 캠프>에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인문학 캠프>에 왜 갔을까? 많은 대학생들은 방학 때도 놀지 않았음을 기업에 증명해 보이기 위해 쓸데없는 짓을 하며 알리바이를 만든다. <인문학 캠프>라는 것도 결국은 그런 알리바이를 만드는 작업일 것이다. <인문학캠프>에 참가한 사람 중에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궁금한 사람이 많았을까, 캠프를 주최한 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을까?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 청년: “전공이나 어학 공부 모두 열심히 했어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자기 개발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죠. 휴학을 한다거나 쉴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정말 쉬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 인문학 멘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 수 없었던 이유는 뭔가요?
- 청년: “취업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졸업하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요즘 같아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내 노력이 부족해서 잘 안 되면 어떡하나. 늘 불안했어요. 여전히 쉬는 게 두려워요.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그 속에서 나만 덩그러니 멈춰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몇 년 뒤 회사의 노예가 되기 위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찾는 연기를 한 대학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연기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 중 일부는 일종의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멘토들은 대학생들이 느꼈을 자괴감보다 더 큰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문학 캠프> 홈페이지에 다르면, 인문학 멘토가 되려면 인문학이나 인지과학 분야 박사 수료 또는 박사 학위 취득 1년 이내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학부생들 앞에서 삶의 주인이 되는 소리나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캠프에 참여한 인문학 멘토들은 사전 교육을 받으며 ‘아니, 저게 무슨 개소리야?’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멘토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먹고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멘토들은 토론 자리에서 참가자들한테 “그런데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라고 물어보면 안 된다. 그렇게 물었는데 참가자들이 말귀를 못 알고 “어, 그러게. 그게 무슨 소리지?” 하면서 토론 내내 허둥거리고 캠프 측이 바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인문학 멘토는 직무유기를 한 것이 된다. 참가자들이 눈치가 빨라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인문학 캠프의 방향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잖아!” 하며 동요하면 인문학 멘토는 업무방해를 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대학생들이 연기하고 싶어도 연기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상황이 웬만해야 연기도 하는 것이지 억지 상황이 그렇게 너무 뻔히 보이면 연기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 계약서에는 피고용인이 직무유기나 업무방해를 하면 안 된다고 써있다. 멘토는 캠프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야 한다.
멘토는 캠프에서 5일 일하면 100만 원을 받는다. 나름대로 괜찮은 아르바이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박사 학위자라면 캠프에 참가하는 내내 가슴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학원에서 죽네 사네 하며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마땅히 돈 나올 구석이 없어서 인문학 캠프에 멘토로 참여하기로 한 상황을 상상해보자. 주위 사람들 중 나 같은 사람이 그 회사에서 왜 그런 걸 하는지 이야기해준다. 그 회사 부회장의 엄마는 부회장보고 이지성과 친구가 되라고 했다고 하고 부회장은 이지성한테 자녀 교육을 맡기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외 명문대를 다닌 사람이 이지성에게 인문학을 부탁한다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캠프 프로그램을 보는데, 이건 인문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다. ‘내가 이런 걸 하려고 학위를 받았나.’ 그래도 그 사람은 돈이 없고 피-고용인이니까 캠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박사는 캠프에 참석한 대학생들한테 말한다. “본래 삶이란, 인문학이란 시험에 나오는 선택지 안에서 정답을 고르듯 명료한 하나의 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니 자신만의 답을 정리해 보세요.” 지도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논문에서 하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야?”라고 묻던 지도교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게요, 저는 지금 애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캠프가 끝나고 스마트폰에 찍힌 입금 내역을 본다. ‘삶은 구차하고 목숨은 질긴 것이구나’ 하며 쓴웃음을 지어도 그리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처음에 기사를 읽고는 웃었는데, 그 캠프에 학부생들이 왜 참여했을지를 생각하니, 그리고 캠프에 참여한 인문학 멘토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안 좋아졌다.
* 링크: [대학내일] 제가 꼭 제 삶의 주인이어야 하나요? 청년이 묻자, 인문학이 답했다
( https://univ20.com/63686 )
(201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