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년 봄에 농로를 살펴보다가 땅의 모양을 보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삽으로 파보았더니 흄관이 묻혀있었다. 예전에 있었던 배수로였는데 아버지가 나무를 심는다고 배수로를 잘못 팔 때 흙에 묻혔던 모양이다. 배수로가 있어야 할 곳에 배수로가 없으니 배수가 더 안 좋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어 내 눈에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한씨네 집에서 하수를 내보내던 하수관이 밭에 묻혀 있었는데, 한씨네 집은 10년 넘게 빈 집인 데다 내가 해당 하수관을 이용할 일은 없고 다른 사람이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서 근처 공사 현장에서 작업하던 건설업체의 도움을 받아 이중관으로 된 하수관을 포크레인으로 모두 파냈다. 문제는 흄관이었다. 흄관이 땅에 묻힌 사실도 모르고 매화나무를 심었는 데다 흄관을 활용할지 제거할지 결정하려면 흄관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몇 개가 어느 방향으로 묻혀있는지 알아야 했다. 인부들은 내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고 주변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나를 도와주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을 해달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흄관 주변의 흙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묻혀있는 흄관은 한 개였다. 배수관으로 쓰기에는 길이가 짧았다. 그렇다고 파내서 없애자니 비용도 비용이고 매화나무도 캐서 옮겼다가 다시 심어야 했다. 어차피 흄관이 묻힌 자리에 배수로를 만들어야 해서 흄관을 활용하여 배수로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흄관 안에 이중관을 넣어서 길이를 연장하면 되겠다 싶었다.
흙을 파낸 자리에 빗물이 고여서 빗물을 퍼냈더니 땅에서 물이 솟았다. 흄관을 우회하는 작은 배수로를 만들어 물을 빼낸 뒤 이중관을 끼워넣을 곳에서도 흙을 파냈다. 이중관이 흄관에 안 들어갔다. 분명히 흄관의 내경에 맞게 300mm짜리 이중관을 샀는데 왜 흄관에 안 들어가는 것인가? 지난 번에 배수로를 팔 때와 같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전에도 이중관을 묻었는데 밭둑에 불을 지르다 이중관이 타버려서 무너졌던 것이다. 그러면 흙을 파내고 잔해를 모두 걷어낸 후 배수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아버지는 대충 뭉갰던 것이다. 지난 번 배수관은 새로 파기는 팠는데 잔해 위에 대충 새 배수관을 묻었고 이번 배수관은 아예 손을 안 댔다. 배수관 출구는 흙이 무너졌고 배수관 입구는 얼결에 흙으로 파묻어버려 10년 전에 배수관이 사라졌던 것을 내가 생고생을 하며 다시 파냈다. 지난 번에는 그나마 마른 땅에서 잔해를 파내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진흙에서 잔해를 파내는 것이라 훨씬 힘들었다.
잔해를 다 파내니 흄관에 이중관이 쑥 들어갔다. 흄관과 이중관 위에 흙을 덮는데 흙이 모자랐다. 뒤란을 정비하면서 흙을 파낼 일이 있어서 일단 놔두기로 했다. 파낸 흙을 흄관과 이중관 위에 덮기로 한 것이다. 이전에 철거한 배수관을 재활용하여 배수관의 입구와 출구의 흙이 덜 파이도록 했다. 여기까지가 작년 10월의 일이다. 이후 흙을 파낼 일이 있을 때마다 빈 곳에 채워 넣었고 배수로가 완성되었다.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