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면서 왜 「오자서열전」만 집필하고 「하희열전」은 집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오자서열전」만 보면 거의 오자서 혼자서 초와 오의 승부를 결정지은 것처럼 나오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며 「하희열전」이라는 형태로 서술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하희가 어떤 사람이기에 오자서만큼이나 초와 오의 승부에 영향을 주었단 말인가? 하희는 매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정(鄭)에서 태어난 하희는 진(陳)의 대부였던 자만에게 시집을 갔다가 곧 사별하고, 하어숙과 개가하여 하징서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살해되어서 다시 과부가 되었다.
하희는 미색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다시 과부가 되자 하희는 진(陳)의 군주인 영공, 대부인 공녕, 의행보와 공공연하게 정을 통했다. 어떤 날은 세 사람이 하희의 집에 모여 주연을 즐기며 서로 하희에게서 받은 속옷을 보여주며 징서가 대부의 얼굴을 닮았네, 전하의 얼굴을 닮았네,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농담을 하징서가 듣고 말았고 결국 주연이 끝나고 영공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마구간에서 활을 쏘아 영공을 죽이고 스스로 진공(陳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 공녕과 의행보는 초로 도망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초의 장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을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이고 영공의 아들 성공을 왕위에 앉혔다.
장왕은 진에서 초로 돌아오면서 아예 하희도 데리고 왔다. 장왕도 하희의 미색에 반해서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대부인 신공무신이 간언해서 겨우 장왕의 마음을 돌렸다. 초의 장군인 자반도 하희의 여색에 반해서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했다가 신공무신이 충고해서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장왕은 하희를 대신인 양로에게 주었는데, 양로는 진(晉)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하희는 양로의 시체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친정인 정(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사실 신공무신은 하희와 정을 통하고 있었고 이것이 모두 신공무신의 큰 그림이었다. 신공무신은 곧바로 하희를 따라 정(鄭)으로 이주하여 하희와 함께 살았다.
이렇게 되니까 장군 자반이 화가 났고 신공무신에게 반역죄를 물어 초에 남아있던 신공무신의 일족을 모두 죽이고 재산까지 몰수했다. 신공무신은 초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진(晉)에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영지까지 받았다. 연애를 좀 세게 하다가 자기 일족을 멸족시킨 신공무신은 복수를 다짐했다. 신공무신이 강구한 방책은 초의 인접국인 오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는 식염을 생산하여 부강해졌지만 아직 전술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공무신은 진과 오의 동맹을 이끌었고 자기 아들을 오로 보내어 군사고문단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오의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그러면서 오는 양자강 유역의 미개민족을 끌어들였고 이들이 초를 등지면서 초의 본토까지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여기서 질문한다. 오자서의 일화나 하희의 일화나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오자서가 초와 오의 전쟁에서 기여한 바는 불분명하지만 하희가 기여한 바는 비교적 명확한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사마천은 「오자서열전」만 쓰고 「하희열전」을 쓰지 않았는가? 위에서 언급한 하희의 이야기는 모두 「오태백세가」 등 여러 군데에서 단편적으로 나오니 사마천은 「하희열전」을 쓰려고만 충분히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마천이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이 편향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사기』에는 유향의 『열녀전』(列女傳)에 나올 법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맹자의 어머니의 일화도 나오지 않는다. 여성이 나오면 일부러 심술궂게 표현했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공자의 부모가 야합하여 공자가 태어났다는 식으로 기술한 것을 그러한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에는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여성이 많았고 여성을 유교 도덕으로 얽어매는 교육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사마천은 마치 그러한 모습을 불쾌하다는 듯이 기술한다는 것이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다.
이렇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견해를 소개하면 요즈음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동양사 쪽 연구도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은 확실히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은 1979년 5월 19일자 <시나노 마이치니 신문>(信濃毎日新聞)에 실린 것이기 때문이다.
* 뱀발
그런데 왜 사마천은 당대 사회보다도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문 과학자의 의견을 묻고 싶다.(14-15쪽)
요새 작은 고추에 집착하는 진중권이 이러한 가설을 접했다면 반가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중권처럼 고추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섣불리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라, 전문 과학자에게 의견을 묻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태도가 더 건전한 태도인 것 같다.
* 참고 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이경덕 옮김 (다른세상, 2004), 10-15쪽.
(2021.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