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2

이준석 현상의 의의

     

40대 끝줄에 있던 이인제가, 미국의 빌 클린턴이 40대이고 영국의 토니 블레어도 40대이니까 한국에서도 40대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가 있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였다. 다른 나라 대통령이 40대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당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멍청하게 그런 소리나 믿고 있었다. 원래 많은 사람들이 꽂혀서 반응하면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어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 대통령이 두 번 연속 70대인 상황을 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걸맞게 한국에 70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에도 30대 당 대표가 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생물학 박사는 이준석에게서 10년 동안의 치열한 정치활동을 보았다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 무슨 정치활동을 보았는지는 써놓지 않았다. 그 분이 워낙에 주장만 있고 근거는 없는 글을 쓰는 분이라 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자신 있게 내세우는 것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나는 이준석의 치열한 정치활동은 잘 모르겠으나 그의 치열한 방송활동은 대충 알 것 같다. 그런데 치열한 방송활동으로 따지면 김어준이나 김용민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 김용민은 정치하려고 했다가 민주당을 말아먹었지.

 

우리는 이미 30대가 국가의 지도자가 된 나라를 보고 있다. 한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북한이다. 이준석보다 한 살 많은 김정은은 1984년생이고 30대다. 이준석은 서른일곱 살이 되어서야 겨우 당 대표를 시작하지만 이미 김정은은 2011년부터 북한을 통치했다. 그래서 젊은 지도자를 모시고 있는 북한이 부러운가? 도대체 30대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북한에 젊은 지도자가 등장한 이후, 뉴스에서 가끔씩 자료화면으로 볼 수 있는 <평양중앙방송>의 화질이 좋아지기는 한 것 같기는 하다.

 

인간에게는 어떤 숫자나 패턴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천문학자 프란체스코 씨지는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이렇게 논증(?)했다. “머리에는 두 콧구멍, 두 귀, 두 눈, 입, 이렇게 일곱 창문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는 [...] 일곱 천체가 있다. [...] 많은 자연현상으로부터 행성의 수가 필연적으로 일곱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과연 이준석 열풍의 동조하는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이준석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2021.06.12.)

     

2021/08/10

[외국 가요] 카롤리네 크루거 (Karoline Krüger)



Karoline Krüger - You Call It Love

( www.youtube.com/watch?v=OZ7K6M32zZ4 )

(2021.08.20.)


원로 교수들은 왜 학부 교양강의를 할까?

     

올해 초에 전 지도교수님께 전화가 왔었다. 선생님께서 DGIST에서 학부 교양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수업에서 조교를 하지 않거나 학위논문 작성 등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수업조교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수업조교 일을 하겠다고 했다. DGIST에서 외부 조교들한테 임금 겸 장학금 비슷하게 주는 것 같은데 하여간 노동량이나 노동강도에 비해 받는 돈이 많아서 나는 만족하고 있다.

 

나는 현 지도교수님이 전 지도교수님께 인력을 주선한 줄 알았다. 나의 전 지도교수님이 현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나 혼자 추측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기 초에 있었던 지도교수 면담 때 이번 학기에 아르바이트나 수업조교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전 지도교수님 수업조교를 할 예정이라고 별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놀라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뭐? 학부 수업을 하신다고? 어디서?” DGIST에서 하신다고 답하니까 선생님은 또 물어보셨다. “수업 몇 개 하시나? 한 개?”, “두 개 하십니다.”, “두 개? 많이 하시네. 힘드실 텐데...” 나의 추측과는 달리 전 지도교수님은 곧장 나에게 연락하신 것이었다. 하긴, 조교 인력을 구하겠다고 현직 교수에게 문의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나는 전 지도교수님이 공평무사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 학기 내내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시험은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오프라인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시험 며칠 전까지 시험 감독에 관한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구에 태어나서 한 번 갔나 두 번 갔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15년 전쯤에 어쩌다가 대구 외곽에 갔던 적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번에는 대구 시내에 들어가겠구나, 이 정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렇게 대구에 갈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시험 전날까지도 선생님이 그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시험 감독 관련하여 선생님께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고 선생님이 과제 관련해서 나에게 연락하셨을 때 시험 감독에 대하여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뭐.. 내가 시험 감독하러 갈 예정인데, 한 사람이 가면 되니, 굳이 두 사람이 갈 필요는 없겠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이 시험 감독하러 서울에서 대구로 가고 나는 시험 감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서울도 아닌 대구에서 학부교양 강의를 하시나? 거기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우선, 돈 때문에 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아닐 것이다. 선생님은 잠실에 사시고 아마도 그 집은 전세가 아니라 자가일 것이기 때문에 돈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경력상의 이유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교수 정년퇴임하시고 명예 교수인 분이 학부 교양강의 한다고 무슨 경력이 추가되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빼면 남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어떠한 보람이라든지 하는 것이 남는다. 내가 볼 때는 그것이 최선의 설명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한 10년 쯤 전에 원로 교수들이 학부 교양수업을 하는 이유에 대한 기괴한 발상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이었느냐 하면, 원로 교수들이 학부 교양수업을 하는 이유는 아직 철학에 오염되지 않은 학생들의 “직관을 빨아먹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자극적으로 쓰려고 직관을 빨아먹는다는 표현을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 “직관을 빨아먹기 위해서”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 <동방불패> 같은 데서 흡성대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놈의 직관을 빨아먹는가 싶었지만 하여간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매우 진지했다.

 

내가 학부생들 비평문을 가채점하면서 10년 전에 들은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직관을 빨아먹는다는 것이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내가 학부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전 지도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학부생 때의 나보다는 나은 것 같기는 하다. 글도 정상적으로 쓰고, 문장에도 비문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원로 교수가 뽑아먹을 만한 직관이 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로 교수가 정년퇴임하고 학부생들 수업을 하면, ‘선생님들이 고생하시는 구나’ 하고 생각하든지 ‘교육자는 나이 들어서도 교육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지, 직관을 빨아먹니 마니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천박하게 생각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2021.06.10.)

    

2021/08/08

능력주의의 함정?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매체들에서 능력주의가 대단히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데, 나는 능력주의의 문제라고 불리는 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진보 언론에서 목소리 좀 내는 사람들은, 마치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내재화해서 차별을 당연시하고 사회적인 연대를 깨뜨리는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런가?

내가 능력주의가 뭔지 정확하게 몰라서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정치철학”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진보 언론에서 능력주의의 사례라고 제시하는 사례들은 능력이나 능력주의와 별로 상관없다. 가령, 어떤 고만고만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고졸자와 대졸자의 차별을 옹호하거나 학교별 차별을 옹호한다고 해보자. 이게 능력주의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학생들보다 딱히 유의미하게 더 능력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대학을 명문대로 바꾸어도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명문대를 다녀서 능력이 생긴 건지 능력이 있어서 명문대를 다닌 건지 하여간 명문대 출신의 능력자가 그에 걸맞는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는 명문대 출신 비-능력자가 명문대 나왔다고 행패 부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능력주의가 아니고 그냥 행패 아닌가? 명문대를 나왔으면 나온 것이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왜 행패를 부리는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제시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이다. 내가 노력을 더 했으니 남보다 대접받아야겠다는 것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능력주의의 사례에서 사람들이 어김없이 노력 같은 소리를 한다. 내가 노력했으니까 내가 더 누리자는데 왜 방해하느냐고 꽥꽥거리는 것을 두고 능력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능력주의인가?

군 가산점 가지고 찡찡거리는 것을 보자.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에서 능력주의를 옹호한다고 지목하는 사람들과 군 가산점제 부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외연이 겹칠 것이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군 가산점제와 양립할 수 없다. 군대에서 고생했으면 고생한 만큼 돈으로 받고 끝내야지 가산점을 부여하면 시험 결과가 왜곡된다. 공무원 시험 한두 문제 차이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데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지는 모르겠으나, 군 가산점을 부여해서 시험 결과가 바뀌면 공무원이 되어야 하는 사람과 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뒤바뀌게 된다. 이게 무슨 능력주의인가?

그러니까 언론에서 능력주의의 함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쟁에서 밀려날 것 같거나 이미 밀려난 젊은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꽥꽥거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능력주의라고 하니 앞뒤가 안 맞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처방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성품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원래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으면 행패를 부리게 되어 있다. 도박장에서 돈을 다 잃은 사람이 부리는 행패를 엄격한 규칙의 함정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경쟁에서 밀려날 예정이거나 이미 밀려난 사람들의 꼬장이나 땡깡이나 응석을 능력주의의 함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 언론에서는 그 동안 수많은 지면과 기자와 필진을 들여 헛다리나 짚고 있었던 셈이다.

도박장에서 돈 잃은 사람들이 행패 부리는 것을 막으려면 몇 가지 조치들이 필요할 것이다. 가령, 밑장 빼는 사람들을 적발할 수 있도록 곳곳에 타짜를 배치한다든지,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해 건장하고 운동능력 있는 사람들을 경비요원으로 고용한다든지, 돈을 다 잃은 사람에게는 집에 돌아갈 차비와 순대국 사먹을 돈을 준다든지 등등. 이렇게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엄격한 규칙의 함정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 나아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물론, 언론에서 능력주의 같은 소리를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학교 출신의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 없는 사람들의 행패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 너무 재수 없어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하여 흐리멍덩한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마치 정치적 올바름의 지표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제의 진단과 처방에 투입될 에너지를 허튼소리 하는 데에 투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21.06.08.)


2021/08/07

사마천의 여성관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면서 왜 「오자서열전」만 집필하고 「하희열전」은 집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오자서열전」만 보면 거의 오자서 혼자서 초와 오의 승부를 결정지은 것처럼 나오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며 「하희열전」이라는 형태로 서술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하희가 어떤 사람이기에 오자서만큼이나 초와 오의 승부에 영향을 주었단 말인가? 하희는 매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정(鄭)에서 태어난 하희는 진(陳)의 대부였던 자만에게 시집을 갔다가 곧 사별하고, 하어숙과 개가하여 하징서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살해되어서 다시 과부가 되었다.

하희는 미색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다시 과부가 되자 하희는 진(陳)의 군주인 영공, 대부인 공녕, 의행보와 공공연하게 정을 통했다. 어떤 날은 세 사람이 하희의 집에 모여 주연을 즐기며 서로 하희에게서 받은 속옷을 보여주며 징서가 대부의 얼굴을 닮았네, 전하의 얼굴을 닮았네,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농담을 하징서가 듣고 말았고 결국 주연이 끝나고 영공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마구간에서 활을 쏘아 영공을 죽이고 스스로 진공(陳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 공녕과 의행보는 초로 도망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 초의 장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진을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이고 영공의 아들 성공을 왕위에 앉혔다.

장왕은 진에서 초로 돌아오면서 아예 하희도 데리고 왔다. 장왕도 하희의 미색에 반해서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대부인 신공무신이 간언해서 겨우 장왕의 마음을 돌렸다. 초의 장군인 자반도 하희의 여색에 반해서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했다가 신공무신이 충고해서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장왕은 하희를 대신인 양로에게 주었는데, 양로는 진(晉)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하희는 양로의 시체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친정인 정(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사실 신공무신은 하희와 정을 통하고 있었고 이것이 모두 신공무신의 큰 그림이었다. 신공무신은 곧바로 하희를 따라 정(鄭)으로 이주하여 하희와 함께 살았다.

이렇게 되니까 장군 자반이 화가 났고 신공무신에게 반역죄를 물어 초에 남아있던 신공무신의 일족을 모두 죽이고 재산까지 몰수했다. 신공무신은 초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진(晉)에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영지까지 받았다. 연애를 좀 세게 하다가 자기 일족을 멸족시킨 신공무신은 복수를 다짐했다. 신공무신이 강구한 방책은 초의 인접국인 오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는 식염을 생산하여 부강해졌지만 아직 전술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공무신은 진과 오의 동맹을 이끌었고 자기 아들을 오로 보내어 군사고문단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오의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그러면서 오는 양자강 유역의 미개민족을 끌어들였고 이들이 초를 등지면서 초의 본토까지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여기서 질문한다. 오자서의 일화나 하희의 일화나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오자서가 초와 오의 전쟁에서 기여한 바는 불분명하지만 하희가 기여한 바는 비교적 명확한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사마천은 「오자서열전」만 쓰고 「하희열전」을 쓰지 않았는가? 위에서 언급한 하희의 이야기는 모두 「오태백세가」 등 여러 군데에서 단편적으로 나오니 사마천은 「하희열전」을 쓰려고만 충분히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대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마천이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이 편향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사기』에는 유향의 『열녀전』(列女傳)에 나올 법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맹자의 어머니의 일화도 나오지 않는다. 여성이 나오면 일부러 심술궂게 표현했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공자의 부모가 야합하여 공자가 태어났다는 식으로 기술한 것을 그러한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에는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여성이 많았고 여성을 유교 도덕으로 얽어매는 교육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사마천은 마치 그러한 모습을 불쾌하다는 듯이 기술한다는 것이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다.

이렇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견해를 소개하면 요즈음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동양사 쪽 연구도 그러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은 확실히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은 1979년 5월 19일자 <시나노 마이치니 신문>(信濃毎日新聞)에 실린 것이기 때문이다.

* 뱀발

그런데 왜 사마천은 당대 사회보다도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문 과학자의 의견을 묻고 싶다.(14-15쪽)


요새 작은 고추에 집착하는 진중권이 이러한 가설을 접했다면 반가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중권처럼 고추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섣불리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라, 전문 과학자에게 의견을 묻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태도가 더 건전한 태도인 것 같다.

* 참고 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이경덕 옮김 (다른세상, 2004), 10-15쪽.

(2021.06.07.)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